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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모든 것의 시작은 긴장되고 낯선 법이다. 백두대간 생태탐방을 시작하는 7월31일, 강릉종합운동장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나중에는 내 머릿속에 개성적으로 기록될 사람들이, 그 때는 몇 번을 보아도 구분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저희들 끼리 모여 조용한 대화를 이어가고, 가져온 식량을 모으고, 짐을 싸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를 포함한 소수는 탐색전을 벌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나를 긴장하게 한 것이 있었으니, 몇몇 학생들이 모여 이질적으로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하나의 ‘대화방’이었다.(그 때는 처음봐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석환이 형과 태기형, 그리고 몇몇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백두대간에 가는 것이 그리 썩 내키지 않았다. 이 생태탐방의 주된 목적이 뭐였더라? 생태탐방과 등산, 그리고 단체 활동을 통한 단결력, 협동심 함양 등이 아니었던가. 나는 성격이 내성적인지라 단체 활동과 관련된 것에는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게다가 나는 고1이고, 동생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형 노릇’도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백두대간을 다른 사람과는 달리 ‘즐기러 가는 곳’, ‘얻으러 가는 곳’이 아닌,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기 위한 하나의 ‘시험’으로 여겼다. 내가 정의하는 ‘백두대간 생태탐방’은 바로 나의 형으로써의 능력과 체력, 인내심, 끈기, 참을성 등을 시험하고 나에 대하여 제대로 된 ‘이해’를 쌓기 위한 시험의 장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자신감도 부족한 내가 활발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아니 모여 있을지도 모르는 한 조에서 방해라도 될 까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 있을 외향적인 사람이 누군지를 알기 위한 탐색전을 벌였으며, 그렇게 해서 찾게 된, 외향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화방’을 경계했던 것이다. 활발한 아이들이 많지 않으면 나도 굳이 힘들게 말할 필요가 없게 되니, 내가 좋아하는 침묵과 명상의 은혜를 백두대간에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7월31일]
등산 첫 날인 동시에, 오랜만에 내 체력을 시험해 볼 기회였다. 나는 저 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등산 첫 날이라고 해서 바로 산으로 간 게 아니고, 라파즈 한라시멘트에 잠시 견학을 갔었다. 설명회가 있었는데, 내용이 꽤 흥미로웠다. 영동지방(맞나?)에 석회석이 많아서 그 주변에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는 내용은 학교에서 배웠던 거라 머리에 잘 들어왔다. 점심도 그곳에서 먹었다.
자, 점심도 먹었으니, 준비운동을 하고 등산을 할 시간이다. 처음 산행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백봉령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단체사진과 조별사진을 찍고 들꽃들이 만발한 산 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첫날은 활기 충전의 의기양양함에 별 무리 없이 갈 수 있었다. 물론 대화는 없었다. 선생님들이 따로 마련해준 대화의 장에서도 처음과 다르지 않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아, 이 5조에는 외향적이고 활발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없구나. 나는 이 분위기에 맞추어 나의 몫을 다하면 되는구나. 조장이 밥할줄 아는 사람 있냐고 묻고 있는데? 난 조장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야. 조원들끼리의 서먹함과 침묵을 깨고 단결과 혐동심을 이끌어 내는 건 조장의 몫이지, 내 알바 아니잖아? 난 이 분위기를 즐기기나 해야겠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을 채굴하는 곳이 나왔다. 전망을 보니 참으로 웅장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인간은 부모 자연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가는구나. 내가 여기 온 일부 목표가 산림생태에 대해 교육을 받으러 온 것이니, 이 광경을 잘 봐두고 산림 복원의 필요성을 나중에 이 경험을 참고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
매우 긴 워밍업을 끝내고 온 산림 종자 연구소. 우리는 여기에 배이스 캠프를 설치했다. 텐트를 치는 것은 저번 해에 유럽가서 많이 해봤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힘들었다. 텐트를 치는 작업은 개인적이지 않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우리는 서로에게 부탁하고, 들어주기도 하며 서먹함의 끝을 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동생들이 나보고 존댓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리나라는 모르는 사람일 경우 동생이 형에게 존댓말을 해야 하는 것이 관례이며, 내가 고등학생이고 저들은 중학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그 느낌이 참 신기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라 그런걸까? 나와 4년이 차이나는 친동생은 사실 동생이라기보다는 존댓말을 안 하고 살았기 때문인지 그저 친구처럼 느끼고 있던 나였다. 때문에 나는 형으로써의 의무가 무엇인지, 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참다운 형노릇을 하는 것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내가 분명한 ‘형’이니만큼 동생들에게 잘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형으로써의 의무는 무엇일까? 일단 내 성격이 내성적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되도록 고민 상담 등의 ‘자상한’ 이미지는 피해야겠다. 그래, 요리, 설거지 등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정확히 정해지지 않은 일들을 내가 도맡아 하자! 바쁠 때 노는 일이 없도록 하자. 부지런하게 보이기 위해 부지런해지자. 되도록 많은 일들을 하자. 동생들이 원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들어주도록 하자. 단, 체력적인 문제를 참고해 “대신 들어줄게”라는 말은 먼저 하지 않도록 하자….
밥을 먹고 우리는 등산에 대한 비디오들을 보았다. 먼저 본 비디오에서는 등산 초보들의 보행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등산 선조들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경제속도, 레스트 스텝, 세컨드 윈드 등 물리적인 장비가 필요 없이 그저 방식만 바꾸면 되는, 아주 경제적인 정보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알토란같은 지식들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고, 다음 날 산행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오늘은 힘들었지만, 그것은 내 보행법의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고 내일은 대대적인 수정이 이루어져 정말 편하게 등산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같고 의기양양해진 나였다.
두 번째 비디오에서는 저번 해 백두대간 산행의 영상이 나왔다. 이번 해와 같이 저번 해에도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었나보다. 저번 해에도 왔었던 사람들은 그 촬영 내막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그 영상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충격적인 상황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한 줄로 가는 모습이었다. 설마 저번 해에 저랬다고 이번 해에도 저럴까? 나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을 마음에 그날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잘 시간이 되었다.(잘 때도 물론 첫날이라 잡담이나 대화는 없었다.) 방학이라 하염없이 방에서 나태하게 뒹굴었던 평상시와는 다르게 정말 깨알같은 첫날이었다.
[8월 1일]
오늘이 가면 14.5km라는 대장정을 마치게 된다. 오늘이 가장 고비이다. 더구나 능선을 따라 걷는 거라 계곡도 없고, 계곡이 없다는 것은 중간에 마실 물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실 물을 꽉꽉 채워 넣느라 가방 무게도 늘어나고 내 고생길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가방에 초콜릿 바도 넣었으니 출발해 볼까?
역시 내 예상대로, 첫 코스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그 길고 긴 오르막길을 오르며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공부는 등산과 같다. 초반에는 오르막길처럼 힘들지만, 이 부분을 통과하면 완만한 능선길이 나온다.’
(근데 난 이것을 공부에 적용시키지 않았다.) 이 말대로라면 이 힘든 오르막길을 오르면 능선길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힘든 것도 점점 줄게 되겠지. 난 그렇게 믿었고, 그것을 원했다. 이 고달픔이 조금이라도 줄기를 원했는데, 현실은 냉정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이 끝나니, 평지 비슷한 게 나오기는커녕 오르막길만큼 힘든 내리막길이 나오는 게 아닌가? 등산은 정말 짜증나도록 힘들다.
이 육중한 산이 나로 하게끔 운동부족과 저질체력의 깨달음을 직접 체험하게 하여 과거의 나태함을 잊기 위해 즐겁게 등산하려 들떠있는 나를 차갑게 진정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남학생들을 진정으로 괴롭힌 것은 ‘한줄서기 운동(?)’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부모님과 친한 산악회 회원분들, 그리고 사촌들 등과 함께 많은 산들을 다녀봤고, 백두대간 생태탐방도 이번이 3년째이건만,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하고 힘든 산행은 처음이었다(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온 산행은, 한마디로 ‘자유로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번 산행의 상황은 그 때와는 다르게 어제의 불안감을 사실로 전환시켜 나를 절망케 하였다….
그 때의 산행이 어땠느냐 하면, 여학생 두 조가 앞서가고, 그 다음 3, 4, 5, 6조 순으로 따라가는 형식이었다. 여기서 한 줄로 간다고 함은, 쉴 때 다 함께 쉬고, 먹을 때도 다 함께 먹고, 갈 때도 다 함께 가는, 이른바 공동체적 산행을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컨드 윈드 효과를 위해 더 걷고 싶어도 모두가 쉴 땐 쉬어야 하고, 자기만의 경제속도를 위해 빨리가고 싶어도 참아야 하며, 앞에서 머뭇거리면 그 피해가 뒤쪽까지 전해지는, 나로 봐서는 아주 고통스러운 행렬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산행에서 항상 선발을 고집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은근 경쟁심도 생기고, 먼저 앞서감으로 인하여 생기는 나홀로 산행의 특혜(사방이 고요, 안정감, 여유로움, 자유로움)를 즐기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 산행에서는 개인 페이스(경제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길이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고행의 대장정이 끝이 난 후에 산림 종자 연구소로 돌아와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그리고 힘든 산행을 함께 한 동료들과도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이래서 내가 등산을 좋아하나보다. 한창 걸을 때는 힘들지만, 추후에는 그것이 모두 추억이 되고,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
선생님들께서도 힘든 코스를 완주한 우리가 대견스러우셨던지, 통닭을 쏘셨다. 다음 날 또 다른 힘든 산행이 기다리고 있을 걸 알면서도, 우리는 맛있게 통닭을 먹고, 김남균 선배님이 틀어주신 정체불명의 애니(?)를 보았다. 그리고 수박을 먹었고, 3, 4조를 중심으로 한 수박껍질 먹기 복불복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내 ‘그릇’의 크기를 고려해 참가하지는 않았다.
[8월 2일]
전날 고행을 치른 우리를 처음으로 반겨준 것은 아침 햇살도, 새들의 지저귐도 아닌 불길한 전조였다. 아마도 비가 올 것 같다.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조장 석환이 형도 백두대간 6년을 하면서 비가 안 온적이 없다 하고, 나도 2년 하면서 비가 안 왔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전날의 버금가는, 혹은 전날을 능가하는 고생을 염두해서 비옷도 챙기고, 초콜릿은 더 많이 챙기고, 대신 물은 조금만 넣었다(비 오는 날은 수분 손실이 평상시보다 적을 테니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은 흠뻑 젖었고 신심은 전날보다 고달팠다. 그제서야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생각해보니, 첫날 보행법의 지혜에 관한 비디오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 왜 여전히 지치고 힘들까? 알고보니 내 보행법은 예전부터 정석적이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를 때 뒷다리를 쭉 펴고 다닌 것이며, 앞서가기 위해 힘든 것도 참고 꾸준히 쉬지 않고 올라갔던 그 과거의 보행법이, 레스트 스텝이고 세컨드 윈드였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산행을 더욱 편하게 해야 한다. 근데 어떻게?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것이, 8번째 방법인 ‘즐겁게 산행하라! 부재: 뭔가에 몰두하라.’였다.
‘빨리 무언가 생각하자…. 마지막 날 밤에는 장기자랑을 한다고 했겠다. 장기자랑에선 뭘 할까? 노래를 부를까? 이왕이면 팝송이 재밌고 호응도 클 것 같아. 내가 외운 팝송들 중 부를 만한 노래로는 뭐가 좋을까? 그래, 린킨파크의 ‘What I've done’이 부르기도 편하고 좋고 재밌고 만족스러울 것 같다. 플로라이다의 ‘Low’도 좋을 것 같은데 포르노 성이 있어서 아쉽지만 패스…. 근데 이 노래들을 갖고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mp3 좀 챙겨올걸 그랬다….’
내 앞쪽에서는 ‘던전앤파이터’ 얘기로 열을 올리고, 나도 이런 식으로 혼자 노니 마음의 외침을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걷기만 하다보니 어느 새 점심시간이 되어있었다. 점심은 라면이다! 근데 비가 온다…. 자리가 좀 불편하긴 했지만 라면은 무사히(?) 먹을 수 있었다. 빗속에서 먹는 라면 맛도 일품이었다. 비가 와서 라면은 즐기지 못하고 그저 배만 채우는 음식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만, 다행이도 우리에게 별미가 되어주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삼겹살이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그것이 힘든 산행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정말 놀라운 것은, 빗속에서의 그 힘든 시간들, 언덕을 오를 때의 영원처럼 길게 팽창하던 시공간의 느낌, 비에 젖어 미끄러운 길을 걸으며 신을 원망하던 그 때의 고달픔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부정적인 시간들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반복될 것이라는 어떠한 불안감도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지난 일이고, 추억이고, 과정이고, 통과한 시험이며, 인생의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그 때를 생각하니 내가 나 스스로 장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산행의 묘미인가보다.
[8월 3일]
오늘은 숙소를 바꾸는 날이다.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다. 어제 온 비 때문에 밖이 너무 추워서 그런 걸까? 석환이 형이 조장다운 행동한 후에서야 나도 생체 흐름을 깨고 텐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비와 이슬에 젖어 축축한 텐트를 접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흠뻑젖은 텐트의 주변에는 솔가지와 먼지, 그리고 잡다한 풀, 심지어는 정체모를 벌레들이 여럿 붙어있다. 참 비위에 거슬리긴 하지만 이 일은 누군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조원 모두가 힘을 합쳐 간신히 텐트를 걷었고, 우리는 개인 짐을 쌌다.
비온 후에 확인한 나의 짐가방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과자는 뚜껑이 열린 채 엎어져 있었고, 어제부터 내린 비로 인해 젖은 옷들을 모아놓은 주머니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빨래를 널고 싶긴 하지만, 오늘도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리고 여건도 좋지 않아, 찝찝하지만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개인 짐가방은 따로 트럭에 실어졌고, 우리도 버스를 타고 닭목령으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5조가 여자 2개조와 6조의 뒤를 이어 4번째에 서게 되었다. 전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단지 5번째에서 한 단계 앞으로 온 것뿐이지만…앞으로 갈수록 편해지고, 뒤로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산행이 아닌가. 첫 번째로 가는 것은 꿈도 못 꾸니 뒤쪽에서 앞으로 보내진 것, 난 그나마도 감사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새로운 강사 선생님이 오셨다. 자원봉사로 오셨단다. 아주 활발하고 긍정적이고 재밌는 말투 덕에 산행의 지루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선생님은 야생 전반에 대해 얘기해 주셨지만, 주로 참나무, 소나무 등 우리나라 특산 나무들에 대해 주로 설명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조일전쟁 때 우리나라 판옥선의 주재료로 쓰였다는 소나무(맞나?), 그리고 여러 나무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선생님의 말씀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잘 키운 소나무 하나 열 자식 안 부럽다.’가 아닌가 싶다. 현존하는 10억짜리 소나무를 직접 보고 나니 그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닭목령에서 고루포기 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배려와 참을성을 요구하는 듯 했다. 대자연의 위대함과 그 규모에 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미물이며, 그런 내가 이 생태탐방 과정을 완주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고루포기 산은 그 이름이 주는 주관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역설적이게도 살인적인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짧지만 강력하다. 나는 ‘사점’, 즉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의협심과 긍정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원망하고, ‘한줄서기’의 비극적인 행렬이 만들어내는 고통의 끝을 경험하며 심신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각하였고, 속으로 느끼는 것을 생각으로 인정하는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와의 통합을 경험했다. 평소에 개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속마음의 느낌을 부정하며 살았던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본능적인 느낌을 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을 정도로 그 날의 산행은 힘들었다….
힘들게 고생하여 올라온 만큼 고루포기 산 정상에서의 느낌도 짜릿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유감스럽게도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 드는 생각이라고는 ‘아, 여기가 고루포기 산 정상이구나.’하는 것과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하나?’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아쉽다.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한 기분이다. 그 때 그 느낌을 좀 더 즐겼어야 했는데….
조금 내려와서 밥을 먹었다. 점심은 라면이다. 역시 힘든 일을 한 후에 먹는 밥은 그게 무엇이든지 다 입에 잘 맞는 법이다. 맛있게 먹고 난 후, 어른들과 다른 참가자들은 옆에서 제기차기를 했다. 물론 난 참가하지 않았다.
능경봉을 지난 후의 길은 지루하게 연속되는 내리막길이다. 올라온 길 만큼 내리막길도 길었다. 길 옆쪽에 가지와 다른 가지가 서로 붙은 나무가 하나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들었던 자연의 신비다! 이런걸 직접 보는 것은 백두대간 생태탐방 참가자들의 특혜다. 사진을 찍고는 싶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으니 눈요기만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자. 오늘은 방송국에서 취재를 온다고 하던 날이 아닌가.
대관령에 도착하니 방송국 피디 한 분이 계셨다. 나는 텔레비전에, ‘내가 입다물게 된 계기’라는 이름의 사연을 통해 과거에 한 번 출연했던 적이 있어서 나는 카메라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들은 카메라가 오면 피하거나 어색해 했고(몇몇 소수를 제외하면…), 나는 카메라가 있든 말든 쿨하게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 때의 속마음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시?
우리는 내가 그리던 대관령에 도착했고, 시설 좋은 화장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가 야영을 할 평창 대관령 관리소로 이동했다.
나도 별다른 기대는 안했건만…그 관리소의 화장실과 수도시설은 처음의 산림 종자연구소에 비하면 너무 열악했다. 화장실은 푸새식이라 냄새가 진동하고 수도는 하나밖에 없어 설거지 할 때나 씻을 시간에는 자연적으로 줄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물은 산에서 내려온 물이라 그런지 너무 차가워서 머리감을 때는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건 일시적인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걸 알고 지금까지 버텨왔잖은가. 지금 피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떳떳하게 웃을 수 있다! 긍정적인 태도도로 이 생태탐방을 웃으며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하자. 가슴에 아쉬움의 앙금이 남지 않도록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자.
[8월 4일]
오늘이 마지막 산행 날이다. 이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의외로 빨리 갔다. 왜일까? 여기서의 하루는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걸까? 되돌아보니 정말 힘들었던 둘쨋날, 셋쨋날, 그리고 어제, 우리의 하루는 두 파트로 이등분되어있었다. 5~7시간정도 등산하는 때와 저녁먹고 쉬는 시간. 두 개의 파트 모두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는 찬 새벽에, 오늘이 마지막 산행이라는 외침을 들으며 일어났고, 멍청하게 밥을 먹은 후 조금 익숙해진 듯한 솜씨로 텐트를 접었다. 개인 짐을 쌌고, 가방 끈은 평소와는 다른 결연함으로 조였다. 오늘은 참가자들 모두 의지가 사뭇 달라 보였다. 긍정적인 사람은 ‘얼마 안 남았구나.’할 테고, 나 같이 부정적인 사람은 ‘아직도 11km나 남았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태탐방에서의 마지막 준비운동을 끝내고, 우리는 양떼목장으로 향했다.
양떼목장은 정말 재밌는 곳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경치가 마음에 들었고, 양에게 먹이 주는 체험도 인상 깊었다. 물론 피디님은 1800만원짜리의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양한 상황들을 기록하셨다. 너무 열심이신데.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영화 ‘국가대표’의 촬영지가 한눈에 보이는 양떼목장의 정상에는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발자취가 훤히 내다보인다. 왼쪽 언덕의 초록빛 가득한 풀밭에서 하얀 점처럼 보이는 양들이 모여 풀을 뜯고 있는 광경도 한번 권해볼 만한 경치이다. 물론 이런 경치를 놓칠 순 없으니, 우리는 의자에서 조별사진을 한번 씩 찍었다. 나도 이 경치를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았다.
우리는 운 좋게도, 양떼목장의 비밀통로(?)를 통해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국사성황당까지 갈 수 있었다. 국사성황당은 무슨 굿을 치는 곳이라는데, 정확한 것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시면 3대가 다 잘 된다는 약수를 마시고 난 후에 백두대간 생태탐방 최종 목적지인 선자령 까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마지막 산행이라고 해서 수준이 등산이라기보다는 거의 산책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자령까지의 최후 고난 길인 오르막 길과 무섭게 내리쬐는 태양빛은 고행을 산책으로 착각했던 나를 '후회'가 아닌 '반성'으로 까지 이끌고 갔다. 촬영 때문인지 억지로 입은 초록색 단체복에서는 너도나도 땀 냄새가 진동했고 3일째와는 다르게 올라가는 온도와 무더위가, 잘 걷기는커녕 제대로 앉아 쉬지도 못하도록 나를 모질게 괴롭혔다. 다른 사람들의 불쾌지수도 꾀나 높았던지, 선생님들이 무언가를 조금만 요구해도 바로 불평과 욕이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중간에 전망대 비슷한 것이 있었고, 선생님들은 그곳에서 우리의 발자취를 보여주셨다. 고통과 고역의 고루포기산이 보이고, 능경봉이 보이고, 다른 이름 모를 산들도 많다. 모두 우리가 지나온 산들이다. 순간, 나는 우리가 이 긴 시간동안 얼마나 먼 거리를 왔는지 새삼 놀랐고, 조그맣고 하찮은 나를 장엄한 백두대간에 비교하며 발걸음과 노력에 회의를 갖으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포기하지 않고 전진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 모두가 의미있는 시간들이었구나. 아쉽지만 감명은 여기까지, 더우니까 빨리 가자….
남은 길도 만만하지만은 않다. 울퉁불퉁하게 이어진 산길을 벗어나니 시야가 확 트인 언덕이 나타난다. 더불어 풍력발전소도 보이기 시작했다. 경치는 좋아졌지만, 힘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고군분투하여 선자령의 비석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이젠 한계라고 생각될 때, 선생님이 강의를 위해 휴식하는 시간을 가져서 나는 겨우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대관령에 있는 풍력발전기에 관해 이야기해주셨다. 우리나라에는 풍력발전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덴마크의 ‘UNSON’이라는 회사가 만든 것을 몇 억을 주고 수입해 온단다. 우리나라가 독자적인 기술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데, 그 발전량이 수입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매년 손해 보면서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실감하니, 참 딱하다고 느껴졌다.
긍정적인 말씀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은 아니지만, 산림은 강국이란다. 난 지금까지, 산불이 나면 헬기를 동원해서라도 끄고, 그걸 서둘러 복구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모든 나라가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산불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번 일어났다 하면 손발 놓고 있어야 하며, 그게 자연적으로 꺼진다 하더라도 굳이 다시 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과는 다르게 선진적인 우리나라의 숲 문화를 배우기 위해 여러 선진국에서 큰돈을 들여 견학을 오기도 한단다. 이 말을 들으니 내심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지고, 나도 한국인으로써의 자부심도 생겨났다. 이제부터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 식목일엔 꼭 나무를 심어야겠다.
그리고…우리는 드디어 선자령의 비석 앞에 섰다!! 그 길고 긴 여정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모두들, 그리고 나도 정말 수고 많았다. 그동안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비가 와서 몸이 흠뻑 젖었던 일이며, 가져온 수건이 모두 젖어 마른 옷으로 몸을 닦아야 했던 일이며, 오랜만에 경험한 산행의 고달픔이며, 물 부족의 갈증 등의 장애물들을 해쳐 나도 인생의 시험을 멋지게 통과했다. 나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다. 산을 오르며 느껴지던 자연에 대한 원망과 부정적 시각은 이미 기억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우리는 선자령에서 가져온 주먹밥을 먹었고 사진도 실컷 찍었다. 내려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체력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뭐 그 정도쯤이야 많이 격어본 일이다. 익숙해져 있었기에, 불평을 쏟아낼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내려가는 도중에 물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내가 원하던 계곡이 나왔다. 무척 더웠지만, 등목은 ‘하산’이라고 하는, 필요와 충족 사이 기다림의 고초를 겪은 후에야 할 수 있었다. 뭐 과정이야 어찌됐든 우리 남자들은 상쾌했고, 모처럼 계곡물에다 땀에 찌든 단체복을 빨 수 있어서 만족했다.
즐겁고 시원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대관령 옛길을 따라 하산하다가 출렁다리를 건너 대관령 휴양림으로 갔다. 우리의 숙소는 숲속수련장이다. 숲속 단체 수련장에서는 텐트에서 자지 않고 방갈로에서 잘 거란다. 방갈로가 넓어서 우리는 6조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밥도 6조와 함께 먹었고, 놀 때도 6조와 함께 놀았다.
8시에는 장기자랑을 했다. 근데 이건 뭐, 말만 ‘장기자랑’이지, 사실은 자신의 ‘장기’를 남들 앞에서 뽐내는 개념이 아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남들 앞에서 시도하는, 그런 것이었다(적어도 우리 조의 경우는 그랬다). 우리 조는 ‘카레’를 불렀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내성적인 내가 낼 수 있는 한 가장 큰 목소리로 불렀는데, 들리기나 했는지 모르겠네. 부끄럽긴 했지만, 이 경험은 내가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낼 수 있도록 내게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캠프파이어. 이 활동에서 나로서는 정말 낯 뜨겁게 느껴지는 자세와 놀이를 했다. 나 같이 소극적인 사람에게 이런 활발함을 강조하는 놀이는, ‘즐긴다’라고 보기보다는 ‘넘긴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 활동을 별 탈 없이 무사히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해당된 역할과 비중은 부담감이 느껴질 정도로 무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힘든 과정을 끝낸 그 날 밤에는 정말 푹 잤다. 집에서 자는 것처럼 잤다. 어떠한 꿈도 꾸지 않고, 별다른 생각도 없이, 쓸데없는 걱정도 없이.
[8월 5일]
처음 일어났을 때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실감이 잘 안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분위기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고, 밥도 평범하게 먹었다. 수돗가에서 간단히 씻은 후에는 집에 갈 준비에 모두가 바빴다. 그러나 그 과정마저도, 그저 평소 숙소를 옮길 때 많이 보던 풍경이라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가방을 메고 새로 오신 선생님의 숲 해설을 들으며 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간다. 가면서 인위적으로 조성했다는 소나무 숲도 보고,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초가집도 보고, 서울 가면 보지 못할 숲을 마지막으로 둘러본다. 그리고 아스팔트 길을 걸어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버스를 보니 그제서야 집에 간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내가 나도 모르던 새에 58km를 완주했구나! 그동안 나쁜 기억들도 많았지만, 이젠 모두 인생의 밑거름이고, 추억이고, 통과된 시험이다.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버스를 타고, 얼마 안 있어 우리가 5일 전 출발지였던 강릉 종합운동장으로 돌아왔다.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 해단식을 마치면 우리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강릉 사는 사람들끼리는 알고 지낼 것 같은데, 나 같은 서울 촌놈은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내가 만약 다음 해에 이곳을 또 찾게 된다면, 그 때는 중1이 된 내 동생과 함께 올 것이다. 그 땐 또 어떤 에피소드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p.s. 백두대간에서 제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인간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산행이란게 무엇입니까? 모두
가 참여해야만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말', '필연적인 말'로 대화를
엮었고, 제 걱정과는 달리 모두 비교적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 눈을 보며 대화하는 것,
'영혼의 소통'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트럼프도 한몫 하고.
저희조에는 저만큼 내성적이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네요.ㅎ
제가 누군지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전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이름을 알아도 "그게 누구였지?"할 테니까요..ㅎㅎ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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