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까부터 저기 세워져 있는 낚싯대 얘기를 여태 하지 않았다. 은퇴할 때가 지나서도 고생한 노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젊은 녀석을 입양할까 했지만 마지막으로 대업을 이루고 뿌듯한 마음으로 은퇴하도록 해주고 싶은데, 자칫 부러진 허리를 쥐고 물에 엎어지며 생을 마감하는 사태를 보게 될까 내심 걱정스럽기도 하다. 사실 낚시는 밤을 새우는 동기만 부여할 뿐이지만, 그래서 중요하다. 아무 목적도 없이 밤새 저수지에 앉아 있는 남자를 상상해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높은 사람이 사무실을 순시한다든지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나온 카메라가 돌아갈 때 딱히 할 일이 없어 컴퓨터 앞에 앉아 지뢰찾기에 몰두하며 일하는 척 하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낚시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밤의 숲에서 울리는 소쩍새의 울음은 육신을 정화시킨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그네소리 같아 무섭게 들린 적 있는 호랑지빠귀의 휘파람은 에코를 타고 퍼져 나간다. 춘천에 있는 중도에서 모자에 버들강아지를 꽂고 동반자와 함께 엿들었던 “꾸우꾸우 꾹꾹”의 주인공인 멧비둘기는 여기에서도 제법 열심히 울어댄다. 그 곳에서 까치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연구해보기도 했다. 자세히 들어보면 까치들은 소리를 내는 횟수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 같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연구비가 지급될 것 같지 않아 중단해버렸다.
딱따구리보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쪼아대는 굴착기 소리에 익숙해져 쉽게 지나치는 것들이 주위에 많다. 새집은 나무와 함께 자란다. 나무가 성장하면서 점점 높아지는 이 경이로운 건축물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더라도 고층빌딩처럼 과시하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에게 집터를 내주는 나무 또한 제 몸집에 비해 작은 땅만 점유할 뿐이다. 그렇다고 까치와 상수리나무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까진 없다. 인간도 한때 땅에서 자란 듯한 지붕 낮은 집에서 살았으니까. 버섯처럼 생긴 초가집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였고, 지반에 뿌리를 내리고 늙어갔다.
현대인이 더 예뻐지고 살이 찌고 키가 커졌다고 인간성이 격상되진 않았다. 소똥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쇠똥구리들을 바라보는 우리를 또 누군가는 키득대며 지켜본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도 원숭이만이 아니어서 코끼리는 나뭇가지를 집어 이마를 긁고, 까치도 식사를 위해 도구를 사용한다. 수중생물의 기술수준은 세운상가를 방불케 하며, 조개와 게처럼 서로 다른 종들의 공생관계는 오히려 나아 보인다. 거미는 훌륭한 직공이자 건축가이며, 또 다른 위대한 건축가인 개미들 중에는 애벌레에게서 실을 뽑아 사용하는 종도 있다. 두루미는 일과를 마치고 세수까지 하며, 까마귀와 돌고래와 코끼리와 하마는 장례의식을 치른다. 북극곰과 썰매개가 우정을 나누는 유명한 사진은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만 제외하면 동물과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가장 외로운 종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인간처럼 되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그들은 더 이상 진화할 필요가 없었다.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했다며 우월감을 채우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선 단순화가 진화일 수 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만든 옷까지 입는 인간에게 동물보다 우월한 만큼만 그들을 살생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아무도 자격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들은 시체 다루기의 일인자들이며, 벌꿀채취는 도둑질이고, 농사도 그렇다. 자연 역시 추악하고 잔인하다. 그런데 채식이 아니라 채식‘주의’라 하는 이유가 있다. 108배마저 운동효과 운운하는 세태지만, 건강을 위해 협동농장에서 일하려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다. 생명과 자연에 대한 예의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예의와 통한다.
저수지에선 자주 물에 손을 담그게 되는데, 물은 온기(에너지)를 일정하게 간직하기 때문에 공기가 더울 때 물은 시원하고 추울 때엔 그 반대이다. 그 점에서 물과 공기는 서로 다른 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세계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대문명과 선사시대 이전의 생활이 공존한다. 유럽인이 북미에 갔을 때 원주민의 생활은 책으로 짐작만 할 수 있었던 시대의 그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저수지의 밤 역시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 공간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 사람은 도시와 떨어져있는 만큼 자신과 가까워진다. 기꺼이 불편하게 사는 것을 무능인양 오인하는 것은 자기보다 유명한 누구를 안다고 자랑하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못났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불편이나 고생인 줄 모르는 삶은 옛날에만 가능했던 건 아니다.
물론 전등 안에 쌓인 벌레들의 사체더미 같은 생활이 우리의 책임만은 아니다.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재벌은 국가경제와 지역경제와 많은 사원들을 볼모로 삼고 죄 사함을 받았으며, 수원과 포항과 같은 도시들은 현대판 영주들의 영지가 되었다. 어떤 기업은 모든 사원들에게 금연을 강요하고 검사까지 받으라고 했다. 사원을 사복으로, 노동자를 농노로 여기지 않고선 불가능한 발상이다. 대기업의 사원들은 회사의 상품과 주식을 의무구매하고 주변에 강매해야 하는 고용된 구매자에 가깝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 말하며 양 손을 살랑거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는 도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따지고 싶어지며, 주방에 CCTV를 설치하고 손님들에게 중계방송 하는 식당이 좋은 사례라며 권장하는 뉴스에는 분노마저 인다. 피와 장기로도 모자라 웃음과 감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것이 매매되고 있다. ‘인간=노동≠상품’의 등식은 ‘인간=상품’이 되어버렸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돌에 걸터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다. 여름밤이 12시간쯤 되어줘도 기꺼이 지새고 싶은 기분에 취해 있었으니. 그러나 여름밤은 짧다. 서리에 작은 식물들이 일제히 죽고 나면 자가 난방 기구인 옷과 이불은 한계를 드러낸다. 성탄절 전후에 저수지를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하긴 성탄절에 방 잡기 힘든 건 전통이다. 요셉과 마리아도 방을 잡지 못했다. 여관방이 없어 노숙을 한 덕분에 동방박사들은 혜성 또는 UFO를 발견했지만(성탄절을이 로마의 축제일에서 유래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1월에 황량한 저수지를 찾은 방문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단단해진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선보였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호수와 저수지는 겨울이 끝나갈 즈음에 얼음 깨지는 소리를 낸다. 석촌호수에서도 깊은 밤에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 호수들 중 하나에 놀이공원이 들어서면서 지옥을 내려다보는 전망대에 들릴 법한 기괴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지만, 밤에는 다른 편 호수에서 얼음이 부서졌다. 오남저수지에서도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포부를 품었다. 술에 취하면 욕구가 강렬해졌지만 졸려서 다음으로 미루길 여러 번, 정신이 멀쩡한 날에는 추워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저수지는 얼음에 갇혀 무늬가 된 나뭇잎들은 놓아주었고, 풀려난 잎사귀들은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을 권리를 얻었다.
얼음이 풀리면 먹을거리가 많지 않을 듯한 여기에서 겨울을 보낸 검소한 오리들도 여행채비를 한다. 그들이 떠나기 전, 어느 날씨 좋은 날에 숫자를 세어보았다. 처음에는 30, 40마리였는데, 다시 세어보니 50, 60마리였고, 이상하다 싶어 또 세어보니 70, 80마리로 불어났다. 흩어져 있던 오리들이 인원점검 소식을 듣고 서로에게 기별을 넣어 모여 든 것이 틀림없다. 겨울오리는 떠남으로써 봄을 알렸고, 호랑지빠귀는 소리를 거둬들여 동틈(동이 튼다는 말은 얼마나 시적인가)을 알렸다.
다시 까마귀가 떠오르고 토끼는 하늘 속에 녹아드는 푸른 새벽녘에 저수지에는 갑자기 바람과 물결이 인다. 상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물안개의 파도를 밀어 보내면, 천천히 움직이는 바람이 눈에 보이면서 정지된 순간이 아닌 연속성과 그 이상의 기운을 담은 안개의 풍경이 펼쳐진다. 물은 얼음이 녹아 흐를 때까지, 구름이 되어 비로 내릴 때까지 기다려왔다. 멀게는 북극과 남극에서도 왔을 그들은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가장 신비롭지만 가장 짧은 순간, 길이 막혀 저수지에 머물러 있던 물은 안개의 파도가 되어 둑을 넘어섰다.
첫댓글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복사해 갑니다...감사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