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2023. 4. 9. 부활주일오전예배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거기서 말하는 세 가지는 다 나의 유일한 길,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진리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언덕위의 찬송’에 나오는 가사처럼 “가시는 길 십자가지만 그것 없이 될 수 없기에 영원한 벗...” 영원한 형제를 우리에게 만들어주시고자 그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로마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의 그 죄명이 십자가의 명패로 달렸습니다. 거기에 씌어있는 말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쓸 것을 썼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거기 나온 명패에 쓰인 이름은 복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구세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요한복음 4장 말씀처럼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유대인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지역적인 유대인이 아니고요, 혈통적인 유대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2장 뒷부분에 보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속하고 십자가로 건너와서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우리는 표면적 유대인은 아닐지라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진정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시는 이면적인 유대인입니다.
십자가 위에 붙어있는 나사렛 예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고린도후서 5장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는 불합격자이기 때문에 합격 점수를 예수님이 따가지고 우리가 주님께 참여할 때 우리의 점수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기의 심령과 자기의 생활의 점수로는 다 탈락하고 맙니다. 천국에 갈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은혜로 내 대신, 우리 대신 죄 없는 자가 죄 값을 치루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에서 나사렛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자라시고 삼십 세 때까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또 친히 목수로 지내신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생애를 삼 년간 살아가신 때에도 달리 부르시지 않으시고 나사렛 예수로 불렀고 그 이름을 주님은 좋아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의 예수님의 평가할 때, 우리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고 멸시 받는 그 땅에 살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가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고, 이 못된 나의 육도 처리해주시고, 부활의 근거에서 새 삶을 주실 때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근거 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내가 예수님 모시고 아버지께로 갈 때는 나를 부인하고 나의 오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부활의 생명을 힘입는 것은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마가복음 마지막 16장에 보면 예수님의 빈 무덤에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여인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천사라고 생각하는데요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천사가 말하고 있는 부활의 증거는 나사렛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사십 일간 계시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지금도 천국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그날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마음이 임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말하니 그가 걷고 뛰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메시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우리는 막연하게 그렇게만 부를 수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나의 왕, 나의 주님이라 불러야 될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의 길에서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로 길을 열어주신 주님을 따라 내 자신을 십자가에 넘겨 버리고 세상도 못 박아 버리고 오늘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할 줄 압니다. 부활의 생명을 따라, 그 빛을 따라서, 그 주님의 음성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될 줄 압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오늘도 그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시고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오늘도 부활의 생명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포도나무의 가지로 삼아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쳐 가십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구원의 길이었다면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도 구원과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길에서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고자 할 때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새롭게 속할 때 우리의 길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의 길은 스스로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신 주님,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내 육체적인 자아를 처리하시고 세상과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새롭게 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