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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평화'에서는 시체 태우는 냄새가 난다
-‘평화롭고 싶다’는 본능이 개인과 사회, 종교의 윤리까지 거세시킨 시대에 관하여
1. 들어가며; 부조리극
이 글을 쓰기 몇 시간 전, 나는 대학원에서 현직 선생들의 윤리과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정은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어떤 현직 윤리교사의 해맑은 말을 들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의 수업. 수업시간 내내 교수도 대학원생들도 하나같이 하하호호 너무나 행복했다. 새로운 행복과 번영의 신천지에 대한 희망과 찬송이 빼곡했다. 오래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 그를 떠나보내고 요 몇일 마음을 겨우 추스리던 즈음, 나는 이 행복의 전당인 교실 내에서 극도의 고독을 느낀다. 이런 부조리극은 본 적이 없다.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많은 살인을 지시하고 국내외 테러 행위에 직접 연관된 젊은 독재자가 ‘넘넘 귀여워지는’ 공간. 나름 배울만큼 배운 이들의 벌이는 아카데미에서의 어떤 향연.
극단주의로 유명한 ‘일간베스트’ 사이트에서는 전두환씨를 ‘엔젤두환’이라며 ‘하트뿅뿅’한다. 5월 광주의 영령(英靈)들을 고의로 조롱하는 네티즌들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자들은 대학원에서 윤리수업을 듣는 자가 아니다. 현직 윤리교사도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윤리'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에 혼돈을 느낀다. 현기증이 치민다.
만일 그 젊은 여선생이 김정은에게 살해당한 무수한 영령들, 무고한 생명들의 수북한 시체, 그 혈흔에 아주 눈꼽만큼이라도 감정이입할 능력이 있었다면 차마 귀엽다는 소리는 못했을테지. 대체 현 상황은 누굴 탓해야 할까. 윗 세대의 그 아무도, 평화를 연구한다는 학자도, 종교계의 사제도, 도덕적 권위를 갖는 어떤 현자도 이 젊은이들에게 참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한 학기 내내 미운털 박힐 것을 각오하고 아웃사이더적으로 소신껏 떠들던 나는, 이상하게 그 천진난만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떠나 보낸 내 강아지를 생각하며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많은 생각과 많은 슬픔이 포개어지는, 무척 기운없게 시작하는 5월의 첫 날이었다.
2. 평화를 욕망한다는 것
아래(붙임.1)는 ‘세계 젊은 지도자 대회’에서 소녀시절 탈북하였던 박연미씨가 했던 연설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디 선진사회 대중들께서 김정은을 유쾌하고 해학적 캐릭터로 묘사하여서는 안된다고. 애끓는 간구다. 지금도 쉼 없이 공개 처형이 이어지고 인신매매와 제 멋대로의 성폭행이 자행되는 동토 속 인간들의 통곡하는 소리. 진지하게 들어보시기 바란다.
혹시 당신은 평화를 좋아하시는가.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느냐고? 안다. 나는 지금 쓸모없는 질문을 하는 중이다. 평화를 희구하지 않는 유기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 peace, 즉 ‘유기체가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의 이 말은 옳고 그름을 넘어선 본능적 단어다. 식욕이나 성욕과 마찬가지다. 가치중립적이다. 그래서 평화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편리하고 안온하며 예측가능하고 불안요소가 소거된, 요컨대 평화는 모든 유기체가 꿈꾸는 상태다. 그러니 성폭행범도 평화를 말하고, 가정파괴범도 평화를 말한다. 수십억을 꿀꺽한 비리 정치인도 평화를 위한다며 평소 잘 가지도 않는 교회에서 기도 드리는 시늉을 한다. 미국에서 80년대 가장 유명했던 평화운동가는 대마초에 취해 사는 포르노물 제작자였다. ‘힐 더 월드’를 외치며 탱크 포신에 장미꽃 꽃는 퍼포먼스를 벌이던 유명 팝스타는 아동성애를 평생 고치지 못한 환자였다. 교인들 700명을 이끌고 남미 가이아나로 도망간 옛 감리교 전도사 출신의 어떤 교주는 자기 추종자들 전원을 독극물 먹여 살해했다. 그런 그조차 죽기 직전까지 환각처럼 반자본주의와 세계전쟁의 도래에 대한 경고를 설교했다. 개신교 메노나이트 교단의 유명한 평화신학자 외더. 그가 죽자마자 수십년간 강제적 성폭력에 시달려온 수백명 여신도들의 폭로가 쏟아졌다. 대체 그 자가 말했던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다시 말한다. 평화는 선이 아니다. 평화는 연약하고 가여운 우리 인간들에게 몹시 매력적인 어떤 상태일 뿐이다. 평화는 평화일 뿐이다. 만일 평화를 도덕적 '선'이라고 단언한다면, 기실 '죽음’이야말로 최고 선의 상태다. 더는 고통도 희열도 없는 항구적 안정 상태 아닌가. 스올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평화로운 상태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반대로 말한다. 역사가 ‘아(我)’와 ‘피아(彼我)’의 싸움이라고 했다. 완연한 평화야말로 존재가 역동을 잃고 가장 절망적 상태로 추락한 지경이라는 말이다. 새장 안의 새는 평화롭다. 돼지우리 안에서 사육장 바깥을 궁금해하지 않는 살 오른 돼지는 평화로운 가축이다. 그러나 그런건 사는게 아니다. 그런건 ‘사육’ 당하는거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가축의 평화도 썩 나빠보이지 않을테지만.
내가 아는 어느 노 목회자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은퇴 설교에서 ‘불의한 평화를 경계하라’고 말하였다. 당시 예배당 청년 중 하나였던 이십대의 나는 그 말에 멀뚱멀뚱했다. ‘누가 보수적인 목사 아니랄까봐 전쟁친화적 말씀을 다 하시네.’하고 혀를 찼다. 아마 그 자리 청년들은 대게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알 것 같다. 무감각한 평화론이야말로 때로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정의를 붕괴시키며 ‘아무래도 고통만 없는 상태면 다 좋아’를 외칠 수 있는 최고의 환각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김정은 앞에서 하트 뿅뿅하는 저 어린 친구들이 한번이라도 불의한 평화를 경계하라는 설교를 들었다면, 죄책이 들어 저런 짓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노 목회자께서 경계하시던 도덕적 붕괴상을 매일같이 목도하는 중이다.
3. 샬롬, 팍스, 영구평화론
기독교의 평화 ‘샬롬shalom’과 ‘팍스pax’는 다르다. 팍스는 정치인들의 협상과 결의, 협잡으로 가꿔가는 평화다. 팍스pax는 거래적 평화다. 번영을 위해 세속 세계의 존재들은 도덕도 돈도 신념도 팔아치운다. 세계 제일의 철학자로 추앙받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노년에 불후의 저작 ‘영구평화론(永久平和論)’에서 경제적 거래가 증진될수록 평화가 증진된다는 특유의 사상을 설명한 바 있다. 멋진 아이디어다. 나도 참 좋은 이상(理想)이라고 생각한다. 맥도날드가 들어간 나라끼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어떤 우스개처럼, 경제적 교류가 깊어지면 항구적(恒久的) 평화에 근접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독교도의 샬롬은 꽉 막힌 소리를 한다. ‘불의한 평화’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샬롬을 위해 때로 비타협적인 용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성서에서는 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한다. ‘악에게 지지 말라’고도 말한다.
요 근래 ‘김정은이 귀엽다’, ‘사랑스럽다’는 식의 젊은이들 특유의 거침없는 풍조들. 나는 비애를 느낀다. ‘어른들은 왜 저들을 바르게 계몽하지 않는가’ 탄식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른들도 애들과 똑같이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신(高神)의 신학자, 목사들은 과연 다른가. 신학저널 ‘개혁정론’에서는 정상회담의 협정 내용도 모르는데 무작정 ‘협정체결을 위해 기도하자’며 이 외교게임에 예쁜 종교적 면사포를 씌워주는 사설이 떡하고 올랐다. 야당 정치인들의 협조를 당부하는 대목에서는 이게 시사잡지 편집장 글인지 신학자의 글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다. 내가 열정적인 구독자였더래면 정식으로 에디터에게 항의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세속의 일은 평신도의 몫’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귓볼에도 닿지 않을 것이다. 누굴 탓할까. 우리네 평신도가 자기네 세속의 삶에 무심하고 제멋대로 사니, 대신 속화(俗化)된 목회자들이 평신도들을 대신해 현실의 플레이어로 참전하는 것이다. 목회자들 탓할 것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세상에 어른이 없다. 속화된 평화론이 신자의 정신에까지 몸살꽃을 피운다. 입으로는 샬롬, 샬롬하는데 가만보면 온 몸으로 팍스의 평화를 예찬하고 있다.
3. 젊은 독재자는 왜 한국 대통령을 만나러 왔는가.
젊은 독재자는 왜 한국 대통령을 만나러 왔는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 제법 있는 것 같아서이다. 왜 왔느냐고.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역사상 최대의 경제제재 때문에 기름도 바닥나고 금융자산도 모조리 동결되어 궁지에 몰린 북한 우두머리가 급히 한국에 손을 내민 것. 그것 뿐이다. 그런데 이걸 마치 어떤 독재자의 고뇌에 찬 도덕적 결단의 결과인 것처럼 대중매체가 반복해 이야기하니, 심지어 이 글을 쓰는 나조차 혼동이 올 정도다.
묻고 싶다. 한국 사람들 ‘죽어버리라’고 민간인 사는 연평도에 포탄 쏟아붓던 사내가 갑자기 귀엽고 통통한 어린이방송 캐릭터라도 되었는가. 자기 형을 독극물로 죽이고 고모부는 고문해 처형하고 뭇 젊은 여인들을 모조리 징집해 성적으로 유린하는 어떤 군주가 갑작스레 따듯하고 유머러스한 평화의 파트너로 진화라도 했는가.
세계의 숨은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른 내밀한 세계의 작동원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공부도 필요하다. 소위 역사의 간지(奸智), 조물주의 간지다. 즉자적이고 직관에 능한 요새 세대에게 이런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평화는 좋은거 아니야?’, ‘전쟁은 나쁜거잖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우리 머리 희끗희끗한 어른들까지 정치인들의 평화론과 퍼포먼스에 감격하는 모습 앞에서는 거의 절망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 모든게 대체 누구 탓인가.
4. 세상엔 싸워서라도 지켜야할 비타협적 가치도 있다.
1차 세계 대전은 그야말로 끔찍한 전쟁이었다. ‘참호전’이라고 불리는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지루한 억겁의 살육이 유럽대륙 전체에 있었다. 승전한 영국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합리적이고 냉철한 지성을 겸비한 인종들이었으나, 이 지독한 참호전에 그들은 그야말로 질릴 대로 질렸다. 영국인은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선거구호로 내건 소위 비둘기파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이라는 총리를 선출하였다. 백년이 지난 지금껏 가장 수치스러운 총리로 남은 바로 그 체임벌린이다. 마침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호전적이고 이미 곳곳에서 살육을 벌이는 과격분자 정치인이 독재정치를 시작 중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잡아먹었고 프랑스와의 분쟁지역에 군을 진군시켰으며 이웃 체코와 폴란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중부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은 설마설마하면서도 혹시 모를 침공을 두렵게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의 기운은 이십년만에 다시 찾아왔다. 독일은 당시 패전국으로서 아직 나라 재건을 다 못하였음에도 곳곳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히틀러는 눈치 채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등 자유국가들이 겁먹고 지쳐있었음을. 만일 이 때라도 체임벌린과 자유진영의 국가들이 힘을 모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히틀러를 끌어내릴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전쟁의 공포에 무릎 꿇었다. 아니, 정확히는 전쟁에 신물이 난 영국인들이 평화를 목말라 했다. 국민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결국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유명한 ‘뮌헨회담’이다. 둘은 협상장에서 자유진영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 넘길테니 더 이상은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조한다. 히틀러는 체코만 먹어치우면 더는 전쟁공포를 조장하지 않겠다고 체임벌린을 속였다.
회담 후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 귀국장에서 기자들과 지지자에 둘러쌓인 체임벌린은 흥분감에 들떠있었다. 그는 흰 종이 한 장을 펄럭거렸다. ‘국민여러분. 이 협정문을 보십시오. 히틀러 총통이 더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전쟁은 없습니다.’ 유명한 장면이다. 체임벌린이 죽는 그 날까지 지우고 싶었던 기록사진일 것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히틀러를 ‘평화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 총명하고 건실한 영국인이 ‘도덕적 판단’은 커녕, 정상적 사고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무서워서다. 전쟁이 지긋지긋해서다. 싸이렌 소리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던거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예찬해마지 않던 그 ‘평화의 사도’는 몇년 후 600만의 무고한 유대인을 불살라 하늘에 흠향(歆饗)했다.
뮌헨 회담 이후의 스토리는 우리 모두가 잘 안다. 전쟁의 두려움과 평화의 기대로 총기를 완전히 잃은 자유주의 국가들은 히틀러가 전쟁준비를 할 시간만 벌어주었다. 그들은 회담 2년 후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전쟁이 두려워서 물러서기만 하다가 더 큰 전쟁을 불러왔다는 아이러니. 폴란드와 동유럽의 죄없는 아슈케나지 유태인 600만명이 속수무책으로 학살을 당했다. 유명한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폴란드 유태인들은 독일이 진군해온 전날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포도주를 먹고 떡을 떼었다. 독일의 거짓말쟁이 정치인과 다정히 앉아 평화를 협정한 어떤 영국 정치인, 그리고 그의 열광적 지지자 때문에 결국 아우슈비츠 소각장에서 검은 잿더미가 불꽃 틈새로 쉼없이 피어올랐다.
영국의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개신교도들만이라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죽지 않았어도 될 600만명이었다. 그 박수와 환호를 유태인 600만의 생명과 맞바꾸었던 영국의 신자(信者)들은 반드시 엄혹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들은 20세기의 역사 위에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소각장의 시체 태우는 냄새를 흠향한 대중들이다.
5. 지금,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가 평화를 박수친다. 박수치지 않는 자는 비뚤어진 인간이거나 호전적(好戰的)인 인간으로 딱지가 붙는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여론의 쏠림이 극심하다. 이런 나라에서 소위 ‘평화의 회담’에 관하여 문제제기를 하고 의혹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묻고 싶다. 이건 정말 박수칠 일이 확실한가. 우리가 평화가 온다며 환호할 때 누군가는 그 박수소리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었을 생명을 잃었을 수 있다. 우리가 북한 정치인과 악수하고 박수치는 지금도 북한 백성들이 등에 줄줄이 쇠꼬챙이가 꽂혀서 꼬치처럼 꿰어져 잡혀가고 있다. 지난 반세기 있었던 일이고, 이 체제를 바꿀 힘이 있는 우리가 평화에 눈이 멀어 타협해버리면, 앞으로 또 반세기는 계속 있게될 일이다. 그렇다면 이 피의 댓가는 평화에 심취해, ‘평화, 새로운 시작’하며 노래하던 우리 자신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북한을 바꿀 힘을 주셨다. 부여받은 모든 힘은 책임이 뒤따른다. 우리가 이 힘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청구서가 날아들 것이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세계의 순리다.
한국인들은 이미 ‘실질적’ 평화시대를 살면서, 서류 상의 평화를 사인하는 것에 대해 감격이라며 눈물 흘린다. 그 덕분에 이제 북한은 정상국가가 되고, 북한정부의 끔찍한 만행은 정상적 통치행위로 인정을 받으며, 그곳을 목숨 걸고 도망치는 백성들은 좋게 좋게 달래서 되돌려 보내야할 이탈자가 될 것이다. 김정은과 어떻게든 좋게 좋게 잘 지내보려는 우리나라가 과연 북한을 엑소더스한 백성들을 받기는 할까.
우리가 북한 정치인과 사이좋게 지내면, 결국 북한 백성을 해방하길 포기하는 뜻이 될 수 있다. 마치 구원을 목말라하던 유대인들을 포기한 체임벌린처럼. 도덕적 죄책만 버리면 우린 꽤나 산뜻하게 평화의 달콤함을 향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으로 우리 한국인들은 지금 그 달콤함에 완연히 젖어있다. 어떤 한국의 국회의원은 탈북자 대학생을 보고는 면전에서 ‘배신자 XX’라고 욕한 바 있다. ‘김정은, 김정일을 배신하지 말고 계속 수탈당할 것이지 왜 이 나라에 기어들어왔느냐’는 말이다. 당대 우리 사회 엘리트 리더들의 사고방식에 관해 곰곰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젊은 탈북자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한국도 사정이 좋지 않아 많은 청춘들이 희망을 찾아 선진국으로 이민을 떠난다’고 말해주었다. 그를 위로하고자 한 말이다. 그러자 그는 ‘아니. 아무리 힘들다고 어찌 조국을 버립네까?’라고 말했다. 어라. 엉뚱했다.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의 청년이 자유를 목말라하며 정작 제 나라를 탈출했던 것이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다 떠밀려 기절한 채 뭍에서 발견되었다. 얼마나 자기 나라가 지옥 같았으면 그 신념가가 조국을 버렸을까. 지금 이 순간도 이런 가여운 백성들이 수십만명, 수백만명 탈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리고 이 극악한 전제국가의 보스와 우리는 지금 평화의 꽃향기를 함께 맡고 있다.
나는 북한 당국의 제일 목표가 탈출하는 배신자들을 자유국가에서 받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임을 익히 알고 있다. 개성에 연락사무소가 설립되고, 조용필씨가 남북을 오가며 노래 부르고, 친근하게 양국 수뇌가 포도주를 기울이며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김정은과 그의 수하들은 가장 많은 탈북자를 수용하는 우리나라에 여러 경로로 압력을 가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예전처럼 순조롭게 북한 사람을 탈출시켜 보호할 수 있을까. 아니, 솔직히 ‘괜히 문제되게 하지 말고 그냥 탈북자 안 받으면 안될까?’ 하는 속마음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시대의 양심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충분히 살릴 수 있던 사람이 우리의 환호와 박수소리에 묻혀서 등에 쇠꼬챙이가 꿰여 죽어간다면, 그 책임은 박수친 우리네 군중들이 져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최종적 책임자는 ‘민(民)’에 있다.
현 순간, 우리 나라의 여론은 익히 잘 아실 것이다. 평화에 흠뻑 취하고, 김정은을 귀엽다고 말하고, ‘통통한 수령님에게 하트를 쏩니다’며 젊은 친구들이 수십만건 Sns를 떠드는 시대. 과연 ‘교회를 앞장세워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보지 못했다. 목사님은 참으로 옳은 설교를 하셨지만, 당신께서는 허수아비를 비판하고 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악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악인들이다. 우리 사는 세계는 십자군전쟁 벌이던 12세기 유럽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 시대에는 평화에 갈급해, 도덕적 판단도, 인간을 향한 긍휼도, 용기와 결단도 단념해버리거나 유보한 ‘평화 근본주의자’들이 넘쳐난다. 북한에서 여인들이 성적 유린을 당하고, 공개처형을 당해 시체가 한달간 저잣거리에 썩어가고, 기독교도들이 복음성가 usb를 휴대했다는 이유로 즉결처형을 당하던 말던, ‘그 죄악의 보스에게 하트 뿅뿅’을 하는 한국인들은 내 주변에도 바다와 같이 넓고 많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도덕적 몰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괜찮다’고 말하고 유도하며, 그것에서 정치적 이문을 취하려는, 진짜 심판받아야 할 ‘세력’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오늘도 만나고 왔다. 자. 그렇다면 당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는 대체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 무엇을 비판해야 진짜 고독한 선지자적 설교인가. 교인들께 묻고 싶다. 혹시 교회를 앞장세워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을 주변에서 단 한명이라도 만나보셨는가. 도리어 나는 교회를 앞장세워 평화를 거래하자며 부추기는 세력의 면면에 대해 밤새워 이야기할 수 있다.
7. 세상에는 타협 못할 가치도 있다
평화를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고뇌하던 처칠 총리라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히틀러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용기있게 ‘불의한 평화’에 굴복하길 거부할 수 있었던 처칠은 의인이다. 인생에는 때로 협상할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비타협적 가치도 있다. 그 가치를 위해서 인간은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자. 우리가 지금 현학적이고 흥으로 가득찬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 옳은가.
폭력 혁명을 꿈꾸던 막시스트(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실패하고 난 1960년대, 유명한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네오막시스트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그들의 새로운 비전을 주창했다. ‘우리는 이제 폭력으로 혁명하지 않는다. 세대에서 세대로, 서서히 사람들을 잠식시켜 혁명하겠다’. 그는 마르크스와 스탈린 식의 ‘무기를 이용한 혁명’을 단념했다. 대신 대중들을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력화시켜 현대사회의 인간들을 ‘피갈음’시켜가갔다는 소프트한 전략을 선언했다. 이제 이들은 도덕을 억지라고 비난한다. 윤리를 진부하고 낡았다고 희화화한다. 용기를 폭력이라고 욕한다. 호르크하이머의 이상(理想)은 최소한 이 나라에서만큼은 완연히 실현되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 이 글을 읽는 기독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이 땅의 목회자들마저도 잘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나 혼자라도 당부하고 싶다. 청년 여러분. '불의한 평화'를 경계하십시다. ‘샬롬’은 흔한 인사말이 아니라 우리가 아프게 결단하며 때로 비타협적으로 싸워가며 이끌어내어야 하는 평화랍니다.
도덕적 인간은 싸워야 할 때 싸운다. 그러나 우리는 싸움을 주저한다. 도리어 도덕적 싸움을 부도덕한 것이라며 이죽거리며 역설적으로 비난한다. 사회적 선과 악이 제멋대로 혼재된 대중사회의 한 단면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말했다. ‘대중의 변덕과 망각을 보고 그들이 종종 히틀러 또는 스탈린 숭배와 동일시되는 전체주의 환상에서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참일 수도 있다.’
전두환씨가 설렁탕을 대접했다고 그 원한을 잊은 사람은 없는 걸로 아는데, 김정은이 사주지도 않은 평양냉면을 스스로 줄지어 사먹으면서 반성하지도 않은 죄를 용서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 도리어 스스로 살인자의 팬이 되는 죄악된 청년들이 차고 넘친다. 현직 교사가 김정은에게 하트뿅뿅을 한다. 교회 청년들이 김정은과 우리 대통령의 손잡은 사진을 보며 감동을 느낀다. 나는 히틀러와 다정히 악수하는 체임벌린이 면전에 있었다면 침을 뱆고 싶다. 다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생각이 두려운 것이다. 얼마전 이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한 탈북자는, 그가 운영하는 평양냉면집이 린치를 당했다.
젊은이 여러분. 완전한 비핵화. 처음듣는 설레이는 말이신가. 아니다. 지긋지긋하게 협정하고 몇년 지나면 또 아무렇지 않게 대포쏘고 어뢰쏘고 목함지뢰 터뜨리며 무력화되곤 했던 희망찬 구호다. 젊은 친구들은 마치 처음 들어보는 평화의 소식인 줄 알 것이다. 어른들이 정확히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다. 이 순진무구한 젊은이들이야말로 평화로 정치적 장사를 벌이려는 ‘세력’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 마오의 홍위병(紅衛兵). 그 특징은 모두 어린 친구들이라는 점이다. 어리고 세상을 잘 모르는 청년들이야말로 손쉽게 ‘대중독재’(한양대 김지현 교수) 시대의 뗄감으로 쓰임받기 적합하다.
하나 분명히 하자. 평화는 달콤하고 돈이 되고 가장 완연한 행복을 인간에게 끼친다.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성욕을 말하는 것, 건강의 가치를 말하는 것, 자연보호를 말하는 것만큼 당위적이고 뻔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고상한 평화마저 때로는 거부해야 할 만큼 우리 삶에는 비타협적인 영역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통해 각자의 윤리를 증명받는다. 모든 선택은 댓가를 치루는 일이다.
북한 정부는 현재 궁지에 몰릴대로 몰려있다. 몇 달도 버티기 힘들만큼 석유 사정이 나쁘다. 권력자의 해외 자산은 모조리 동결되어 있다. 북한 권부와 거래하는 은행들은 즉각 제재를 받는다. 소위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이다. 이 모두가 미국 주도의 강력한 제재와 응징 때문이다. 북한 정부의 힘이 빠질대로 빠지자 김정은 정부의 마수(魔手)가 백성들에게 뻗치지 않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적으로 장마당이 들어서고 활력이 돈다. 원시적 의미의 시장경제가 다시 싹트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다시 북한 정부에 돈을 대어주고, 평화와 화해협력을 명분으로 많은 금전적 이득을 준다면, 이들은 자유와 도덕으로의 길을 다시 단념하고 종래의 ‘내부폭력’ 노선으로 회귀하게 된다. 폭력적 정부 입장에서는 한숨 돌리고 나면, 일단 가장 먼저 꺾어놓아야 하는 것이 ‘자유’이고 ‘선택’이며 ‘개인’이고 ‘시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한 거래’를 시작하면, 자신에 대해, 개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주의적 독재자로서는 가장 두려운 상황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불편한 북한 내부 뉴스만 우리 눈에 안띄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하는 신자가 있다면, 소위 ‘화해협력’은 몹시 근사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누린 평화와 번영에 대해 하나님은 정의의 저울을 대실 것이다.
우리는 북한의 백성을 해방시킬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권력자와 사이좋은 오누이가 될 것인가.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와 자유사회에는 힘이 있고, 그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무엇을 진짜 정의라고 광야에서 외칠 것인가.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무엇이 길이라고 까막눈이 대중들에게 말할 것인가.
8. 나가며: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끝으로 시 한편을 소개한다. 탈북시인 장진성씨가 쓴 시다. 자유아시아방송 RFA에서 소개된 작품이다. 시가 증언하는 비극의 최종 책임자에게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하트뿅뿅을 하고 있다. 현직 윤리교사들이 ‘귀엽다’, ‘사랑스럽다’고 예찬을 한다. 나는 지금 이 시대의 도덕률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주시라. 가슴이 있는 사람은 느껴주시라. 인간의 뇌수(腦髓)를 가진 자는 생각하여 주시라.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장진성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원으로
밀가루 빵 사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붙임 1. 박연미씨 세계 청년리더 대회 연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고 또 무엇이든 쉽게 선택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편이라 이런 일들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는 정도이지만, 집사님의 이번 글은 그냥 지나가기가 미안할 정도로 정성과 진심이 느껴져 부족하나마 한줄 올립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김씨 일가와 북한 지도자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벤트를 계기로 김정은 개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일부 사람들에대해 저도 동의하기 어렵고, 특히 고통받는 북한의 주민들의 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야 한다는 집사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재 상황에서 개인들이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집사님의 글과 같은 진정성 있는 의견들이 개진 되는 것이 정치인들이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겠지요. 역사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정치적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함께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읽으시면 알겠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몇가지 직간접의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정리하고 이 문제에 관해 기독신자들께 입장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고심끝에 장문의 글을 썼습니다.
평소 흠모하는 담임목사님의 설교내용에 관한 나름의 문제제기도 실었습니다. 쉽지 않았으나 삶과 세상을 대하는 신자의 근본적 태도에 대한 숙고의 글이므로 너그러이 이해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면 위로는 평화와 번영에의 낙관이 그득하지만, 그 아래로 인간들의 영혼을 남루하게 하는 갖가지 윤리적 혼란이 편만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 어른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지난 주일의 설교를 들으면서, 때가 때이니만큼 작금의 시국과 상황을 따로 떼어놓고서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막는 교회, 전쟁을 막는 복음, 전쟁을 막는 그리스도는 다분히 원론적이었고,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기대하면서 동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솔직히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성도들이 물어올까봐 조금 긴장도 했었습니다.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린치를 당하여 질고의 역사를 살아온 나같은 기성세대 그리고 한국교회의 거반은 지금의 시간에 혼이 쏙 빠져있습니다. 숨어있는 것을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러난 것도 예상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일 아침 예배 전 모임의 설교나눔에서 이를 짧게 나눌려고 합니다.
그리고 배집사의 글로써 양육모임에서 질펀하고 찐하게 나누어볼 생각입니다.^^
수요예배 시간에 한 시간정도 주일예배 설교말씀에 대한 나눔이 있었는데 참석하셨으면 좋으셨겠어요.
평화가 모든 갈등을 덮고 그냥 good mood만 조성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예수님도 성전에 가셔서 장사판을 뒤엎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일날 목사님과 이 문제에 대해 나눔하는 시간을 따로 가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정말 가슴뛰는 시간이 될 듯 한데, 어버이주일을 맞기도 했고 제 동생이 넷째를 갖게 되어, 토요일은 장인어른 장모님, 주일날은 진해에서 부모님과 동생내외와 더불어 예배드리기로 했습니다. 논하셨던 이야기 꼭 그 다음 주에라도 교인들 통해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글만 써놓고 애프터서비스(?)를 나몰라라 하여 송구합니다 ;;;;;
13일 주일에 목사님과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죠^^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이 긴 글 읽어주시고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ㅜ
교회 안에서 정치에 대한 견해는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정치적 정체성을 뛰어 넘기에 한 믿음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성경과 해명되어 선포된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를 몰아가심에 잠잠히 맡기며....
우리가 평화를 선택하면 평화가 진정 가능한지를 잘 새기면서,
오직 주님만이 '평화'이시고 '화평'이심을 더욱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배샘의 장문의 글을 대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철없이 하트뿅뿅 날리거나 김정은이 철이 들었을거라 기대는 전혀 안했지만
문정권이 심판자로가 아닌 중재자로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로써는
글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혼란스럽기는 하네요 ^^;;ㅠ
주일에 온생명 지식인의 박장로님께 더 여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글을 길게 써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쉽게 도식화해 쓰면 안될테지만 비유로 한번 써보겠사오니, 논의하실 때 다소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세종대왕에 이어 이 글도 참 생각할 것이 많네요.
오래간만에 공부 많이 합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한 송구합니다. 사실 무척 도발적으로 느끼실 수 있는 글인데 이렇게 깊이 공감해주시고 진지하게 반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도 좋게 봐주시고 끄덕거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젊은 사람이 좀 유연하고 자유분방한 경향이 있고 나이든 사람은 딱딱하고 규범적인 경향이 있는데, 저같은 젊은 축의 교인이 이런 깡마르고 보수적인 주장을 하는게 좀 낯서실 것 같습니다. 본문에 썼지만 요새 개인적으로 독특한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좀 힐난을 받더라도 세상의 통념에 반대하고, 원칙적이고 깡마른, 좀 급진적인 목소리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여 맘을 굳게 먹고 글 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