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를 부르심 (1600)
카라바조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바로크 시대에
이탈리아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빛과 어두움의 화가다.
1600년경 로마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성당인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그에게 <성 마태오를 부르심>을 비롯하여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와 천사>를 주문했다.
그는 <성 마태오의 순교>를 먼저 시작하다가 중간에 중단하고
<성 마태오를 부르심>을 그렸다.
그는 <성 마태오를 부르심>을 그리면서 자신의 원래 화풍으로 과감히 돌아갔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기가 살고 있던 일상의 이야기로
서슴없이 전환시켜 대형제단화를 그린 것이다.
그가 그린 <마태오를 부르심>은 마태오복음 9장 9절을 바탕으로 그렸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그분을 따랐다.
그런데 그가 그린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는 장면은 우리의 상상과 사뭇 다르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을 위엄 있게 그리지도 않았다.
그가 그린 덩치 큰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돈을 세지도 않았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벌이고 있는 선술집의 어수선한 도박판에 앉아있다.
또 그들의 옷은 당시 로마 시민의 복장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카라바조를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만들었다.
그는 뻔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아라.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를까?
예수님은 자기의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예술적 재능을 묻어든 채,
선술집에서 도박판에 휩쓸려 다니는 죄인인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가 바로 카라바조요, 그가 바로 마태오다.
돈밖에 모르는 나,
방탕과 폭력을 일삼는 나,
삶의 목적도 없이 흥청망청 살아가는 나에게 그분이 찾아오신 것이다.
마치 감옥과 같은 곳에서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배경은 열려진 창문으로 인해 창살이 있는 어두운 감옥 같다.
죄인 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은 빛과 함께 등장한다.
구원의 빛이 도박판에도 임하는 것이다.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이 죄인 마태오에게 쏟아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빛줄기를 따라 구원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이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창조>에 나오는
아담의 손을 닮지 않았는가?
이로써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제2의 아담’이라는 신학적 통찰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세상에 이루어졌고
구원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이 아담의 손을 닮았다면,
베드로의 손은 하느님의 손을 닮지 않았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마태오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마태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음으로서
그리스도의 대변자가 되고 하느님의 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몸을 가리고 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죄인을 부르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부르심은 쉽고 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발은 맨발이다.
맨발은 가난과 겸손을 의미한다.
교회의 부르심은 안정되게 잘 살던 사람에게 맨발의 고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부르심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반응은 무반응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젊은이는 열심히 동전을 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곁에 있는 노인은 젊은이가 돈을 잘 세고 있는지 안경 너머로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르심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두 번째 반응은 관심은 보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 가까이 있는 젊은이는 다리를 벌린 채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는 있으나 왼손은 칼집에 가 있다.
예수님과 권력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 있는 젊은이는 마태오에게 어깨를 기댄 채
놀란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서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은 보이지만
권력과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세 번째 반응은 마태오의 반응이다.
그는 구원의 빛을 듬뿍 받았다.
그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눈을 마주친 순간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입니까, 저를 부르십니까?”
그렇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성찰해야한다.
자기의 모습을 성찰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