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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김 만 선
8·15 직후 고국 조선으로 돌아오려 했던 원식은 그런 지 석 달 만에야 기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 동안이라고 기차가 영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얼른 신경(新京)서 뜨지 못한 첫째의 이유는 안동(安東)까지의 도중 불한당들의 성화로 대개는 알몸으로 안동에 내리게 된다는 소문이 겁났고, 둘째로는 생각만 해도 찝찝한 젊은 여자들이 자칫하면 ‘욕’을 당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위에 또 한 가지 이유는 신경에 거주하던 피난민들은 하얼빈 방면서 내리밀리는 정말 피난민들 때문에 좀처럼 기차에 오를 기회를 못 가졌었다는 데 있었다.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원식은 남들같이 지화나 듬뿍 지고 올 처지는 처음부터 아니었으니까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몰켜섰다 기차가 폼에 들어서면 왁작 달겨든다는 불한당도 겁만 낼 것은 없었고, 나이 삼십밖에 안 된 그의 아내이기는 하나 인물이 고운 것도 아닌데다 아이들, 젖먹이 알라 셋이나 거느리었으니 욕을 보게 된다면 그야말로 딴시람들이 볼 것 같이도 생각되어 그 점도 과히 염려한 바는 아니었으되, 좌우간 이러구러한 풍문과 함께 말할 수 없이 비좁다는 차로 긴 여행을 해야 한다는 데 그만 남들같이 그런대로 떠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원식도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불기 없는 다다밋방 들창 앞유리가 얼음으로 허옇게 되는 것을 보고서는 당황하였다. 어떤 큰 힘이 있어 피난민들을 알뜰히 보호해 주지 못하는데다 생활수단조차 잃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강도보다도 추위가 겁났다. 좀 지체는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늑장을 부리려던 것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그래서 군대 수송으로 배차(配車)에 곤란이 많다는 소련 당국을 겨우 움직이어 부랴부랴 떠나게 된 것이다.
한 칸의 정원 팔십 명인 찻간에 피난민들이라서 백오십 명씩 타려던 것이 아이들은 수효에 넣지도 않고 이백 명씩이나 올라탔다. 세간살이는 팔아 없앤 사람은 팔아 없애고, 폭동이 일어났을 때 목숨들만 살아나온 사람들은 그런대로 다들 홀가분하게 탔을 것 같으나 그래도 짐들은 여느 여행을 할 때보다는 듬뿍 한짐씩 지고 나선 까닭으로 찻간은 여지없이 수라장이었다. 칸칸마다 ‘반장’이 있어 좌석을 정리해 보려 했으나 어느 옆으로 짐짝 하나, 사람 한 사람 비켜 설 틈이 없으니 반장의 노력은 괜한 수작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기차가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치 조선 땅이 가까워지니까― 압록강을 건넜을 때에는 무슨 목적이었든 간 이제는 그 강을 다시 건너가야 할 처지니까 잠시라도 쉬지 말고 기차는 달려 주기만 하면 된다.
만주서 살지 말란 사람은 없었다. 중국 사람들은,
“한국도 이젠 독립했죠. 우리나라하군 옛날부터 형제국이었으니까 앞으로도 형제같이 지냅시다.”
했고,
‘만주의 벼농살 위해서도 조선 사람은 만주에서 살어야 한다.’
고 어떤 소련 장교가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만주서 그대로 살아 나갈 자신을 잃었고 생활이 불안해만 갔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에서보다도 법이 멀고 집단생활이 아닌 촌에서 더 심한 까닭으로 만주 땅과 몇십 년씩 씨름을 했던 농사꾼들이 대부분 피난민 열차에 몸을 실어 압록강을 다시금 건넜고 앞으로도 수없이 건널 것이다.
낮에 피난민들을 실은 열차는 밤중에 신경역에서 떠났다. 그리고 천천히 달리었다. 정거장에서마다 정거를 하고 어떤 때는 캄캄한 들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지체를 한다. 차 안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그런 때마다 밖의 기색을 조용히 엿듣고 있다. 기차가 달리면 또다시 찻속이 떠들썩해졌다.
신경을 떠나면 도중 제일 위험하다는 공주령(公主嶺), 사평(四平)을 지나고 봉천(奉天)을 뒤로 멀리 하도록 별일이 없었다. 소문대로 따지면 앞으로 궁원(宮原)이란 역 하나만을 지나 노면 안동까지 마음을 놀수가 있을 것이다. 신경서부터 조선 사람들로 된 보안대원(保安隊員)이 이십 명이나 따라 이천여 명의 피난민들을 호송하고 있기는 하나 무기는 단 몇 사람밖에 그것도 비밀히 지니고 있는 때문에 수백 명의 불한당패들이 달겨들면 큰 걱정거리일 게요, 간혹 국군이 비적(匪賊)화한 패들과 맞닥뜨리기나 하면 큰 낭패일 터이므로, 무슨 일이 적게라도 생겨야 할 정거장에서 무사할 때 그들은 그것을 보안대원의 덕택이라기보다 재수가 좋다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다행하게 여겼다.
전 같으면 안동까지라도 하룻밤이면 당도하던 기차가 온 사흘을 걸려 궁원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는 그런데 또 온 한낮 동안을 명하니 폼 밖에 기차가 머물렀다. 제일 시끄럽다는 역에서 가장 오래도록 지체를 해노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말라고 피난민들은 찻속 탁한 공기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며 해종일 시달렸다. 약탈꾼들은 한 사람도 비치지 않았다. 딴 역에서 같으면 먹을 것을 팔러 오는 장사치로 혼잡할 그런 광경조차 영 볼 수가 없었다.
해가 넘어간 지도 오랜 때 원식은 열 살 난 맏놈을 무릎 위에다 앉히고 꼬박꼬박 졸다가 떠들썩한 떼웃음에 눈을 뗬다. 찻간에는 아무 일 없는데 그의 바로 뒷좌석에서 밖을 내다보며 야단들이다. 그는 아픈 다리도 펴볼 겸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에는 웬 젊은 소련 군인 한 사람이 서서 웃음이 얼굴에 가득 찼는데 그 말소리를 듣고 원식도 귀가 번쩍 뜨였다.
“당신 아버지 있소. 난 있소. 우리 아버진 조선 사람요. 그래 내 이름은 박용수요.”
하고 그 소련병은 그 악의 없고 다정한 얼굴에다 씽긋 웃어 보이더니,
“당신 내 아들이오. 아니, 참 난 장갈 안 갔으니깐 아들 없소.”
그만 머리를 긁적긁적하고 한번 웃음판이 되었다.
“당신 몇 살이오?”
“당신 조선말 어디서 뱄소?”
이런 질문이 저만침서 동시에 나왔다.
“나 열아흡 살이오. 조선말은 아버지한테 배웠소. 우리 어머니는 러시아 사람이오.”
박용수란 소련병의 모습은 어디로 보나, 신경서도 원식이가 흔히 보아 오던 이지적(理智的)은 아니라도 우리와 감정이 같을 것 같고 아무 때나 노상 싱글벙글 좋은 낯인 소련병과 조금도 다름없으면서 또 조선말을 제법 유창하게 씨부리는 꼴을 대하니 그에게로 달려가 악수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원식은 담배 한 갑을 박용수에게 전해달라고 뒷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여기저기서 또 담배, 사과, 위스키까지 한 병 창 밖으로 내밀었다. 박용수도 가만히는 안 있었다. 원식에게는 자기 담배를 내주고 딴사람에게는 주머니에다 손을 넣다 내줄 게 없던지 술을 준 사람에겐 또 딴사람에게서 받은 담배를 내주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던졌다. 소련병 박용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안녕히가십쇼.”
수없이 작별인사를 하고서는 뒤칸 쪽으로 사라졌는데 조금 있다가는 멀리서 또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원식의 피로는 한결 풀린 것 같았다. 신경서 서울을 생각하변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게 경성역 앞 광장에서 남대문통, 광화문통, 그리고 고작 종로 네거리밖의 그 거리의 이름과 함께 아롱거리질 않았었는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때부터는 조그만한 샛골목까지도 눈에 선하게 전개되었고, 생사조차 몰라 끼니 때마다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걱정이 많으실 아버님과 어머님의 환상도 신경서 그려 볼 때보다는 이마의 잔주름살까지 더 똑똑히 드러나, 비좁은 기찻간의 괴롬쯤 감지덕지하리라 했더니만 너무나 지루하고 갑갑스러 이제는 짜증까지 나올 지경으로 시달렸던 그의 신경은 박용수란 소련병의 출현으로 얼마간 생기를 찾은 것이었다. 그뿐만도 아니었다. 신경서 원식이 그가 목도한 바 일부 소련병의 행동 중에는 그것이 일부분에 한한 불량배의 행패라 할지라도 소련병만 눈에 뜨이면 경계부터 하게 되던 그러한 소련병에 대한 인상까지도 박용수를 본 때문에 다 지워졌고, 그러므로 안동까지 가는 동안 소련병을 경계하려던 그만치의 정신적인 부담도 앞으로는 가벼워질 것 같았다.
궁원서도 기차는 밤중에 출발했다. 볕 사고 없이 또 기차가 떠나니까 차 안 사람들의 낯은 원식이 그와 같이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러는데 문제는 예측 안 했던 조그마한 역에서 그것도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밤눈에 비치기는 조선의 삼방협(三防峽)과도 같이 으슥하고도 길이 험한 유가하(劉家河)란 산골 자그마한 역에서 기차는 또 장시간 지체하다 움직였다는 것이 앞으로 좀 끌어가는가 하면 그만치는 뒷걸음질을 치기를 몇 차례 거듭하더니 급기야는 다시 정거를 한 채 꼼짝도 안 했다.
“이거 무슨 일이 난 게로군?”
“도적 놈들이나 아닌가?”
이렇게 쏘곤덜거리며 원식의 찻간은 긴장하였다. 출입문 앞에 선 사람들은 반장의 지시로 앞칸에다 ‘어째서 섰는가’ 하는 전갈을 해놓고 전갈이 되돌아올 그 동안에라도 도둑이 뛰어들까 겁을 먹고 문단속을 굳게 하였다. 그때 밖에서는 권총 쏘는 요란한 소리가 서너 번 났다. 그 순간,
‘옳지, 도적이 나오면 이런 데서 나올 게지…….’
하고 원식은 남보다 속으로는 당황하였다. 도둑놈들도 사람인데 경계가 심한 것뿐만 아니라 제법 등불이 이곳 저곳에 환한 궁원 같은 큰역에서 약탈을 하려고 덤비지는 않을 것이며, 이러한 으슥한 곳에 잠복해 있다 습격하는 편이 결과로 봐선 훨씬 영리한 짓일 것 같은 생각을 원식은 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되돌아온 앞칸에서의 전갈은,
“왜놈이 기관찰 떼어 가지고 방금 달아났답니다!”
하는 것이었다.
“왜놈이라니 웬 왜놈요?”
촛불은 켜놓았으나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는 뒤편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그것까진 난 모르겠소.”
하고 전갈을 하면 문 앞 사람이 마주 언성을 높이어,
“어떤 놈은 무슨 어떤 놈야, 우리가 탄 기차를 끌고 오던 기관차의 기관수 말이겠지…….”
이렇게 핀잔을 주는 사람까지 나섰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왜놈은 달아난 게 아니라 이곳이 유명한 오르막이라서 기관차 하날 더 달러 두 정거장 앞인 계관산(鷄冠山)까지 간 것이랍니다!”
또 이런 전갈이 왔다. 그러나 좀처럼 기적 소리는 들려오질 않았다. 모두 갑갑해진 것만 아니고 ‘이놈들이 도둑놈들하고 짠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먹게 되어 드디어 반장을 본부까지 부내게 되었다. 그 뒤 원식의 차 속에서는,
“멕여야지, 먹자고 하는 놈을 멕이지 않으니깐 달아났지…….”
“멕이긴 그까진 놈들에게 뭘 멕인단 말요, 그깐 놈들은 당장 죽여버려야 해, 죽여 버려야.”
이렇게 두 패로 갈리어 시비가 많았다.
그러나 먹이고 어쩌고 간에 기관사를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기관사는 종시 나타나질 않았다.
단장이 탄 본부석에서는 역으로 교섭을 갔다는 전갈이 한 번 온 후 소식이 끊어졌고 반장조차 돌아오질 않는다. 이따금씩, 도둑의 범접을 미리 막으려 발사하는 듯한 보안대원의 총소리만이 암흑과 같은 산골짜기의 정적을 흔들어 놓았다.
두어 시간이나 지난 뒤 반장은 돌아왔다. 그의 말을 들으면 기관사 놈이 오르막이라 기관차 하날 응원 청하러 가야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나, 그놈이 처음부터 달아날 계획이 있던 것도 사실이어서 역으로 달려가 아직도 소련군 지휘 아래 역장질을 하는 왜놈마저 숨어 버리고 없어, 중국인인 역부를 앞세우고 역장놈을 찾으러 역 근방을 헤매다 붙들었더니, 자기는 겁이나 달아났던 것이고, 기관차 조는 아무 연락도 없이 기관사 마음대로 한 노릇이라 곧 계관산으로 전화를 걸겠니 해서 방금 연락중이니 반시간 동안만 참으라는 애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시간을 또 참았다.
그러나 이 반시간이 결국엔 세 시간이 되고 그 동안 역장은 전화에다 대고 ‘날 생으루 죽이려느냐’고 그의 동족에게 수없이 애걸하였다는 것이다.
8·15 이후 원식이 그가 본 일본인은 마음으로나 생활로나 하루 아침에 더러워진 일본인이었다. 나라만 망한 게 아니라 민족으로서도 망한 성싶어 일본인을 경멸해 온 터인데, 산중에다 이천여 명의 조선사람 피난민들을 내동댕이치고 도주한 기관사와 같은 그런 종류의 왜종을 가끔 발견할 때는 원식은 치를 떨었다. 피난민은 조선 사람만이 피난민인 게 아니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아, 산동(山東) 큘리 〔苦力〕 보다도 더 걸뱅이 같은 거적때기 한 잎씩을 끼고 다니는 그런 피난민들의 수용소의 넓은 마당에는 으레 조그마한 애총들이 날마다 늘어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끔 즐비한 광경을 보고, 또 이른 아침에 젊은 여자들이 자식의 무덤 앞에 꽃을 꽂아 놓고 합장하는 꼴을 발견할 때면 가슴이 찌르르했던 원식이었으나 여전 치를 떨었다.
전후 열 시간 만에 기차는 유가하에서 떴다. ‘그놈을 처리하자’고 달아났던 기관사 때문에 의론이 많았으나, 지금 무슨 일을 저질러 노면 점점 갈 일이 난감해지니까 기관사 하날 떠달고 온 게 구실이었건 말건 잠자코 있자 해서 기차는 순순히 달리게 되었다.
정말 별일 없이 그 후부터 기차는 느리게나마 계속해 달리었다. 그러나 차 안 사람들은 기진했다. 앉아서나 서서나 조는 판이 되고 어린애를 가진 사람들은 무릎마저 펴보지 못해 짜증이 심했다. 원식의 칸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딴 칸에서 하룻밤 사이에 어린애 셋이 죽었다고 해 원식은 겁이 더럭 났다. 죽은 원인이 홍역 아니면 파라티푸스이었다고 하니 전염될 성질의 병들이다.
안동까지는 멀지 않은 어떤 역에서 또 어린애 둘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만 오후 원식은 조그마한 철교 위를 달릴 때 몸빼를 입은 여자 하나가 강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 순간,
“여자가 자살했다!”
하고 버력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자, 또 뒤쪽 칸 출입문 앞에 섰던 청년 하나가 앞칸을 향해,
“거기서 자살한 여자는 없소?”
이렇게 차 속이 수선스러워졌다.
“제기랄, 기왕 자살을 하려거든 압록강 추렁추렁하는 깊숙한 물 속에나 빠질 게지…… 기껏 여기까지 와서 그래 모래밭으로 떨어져 만수 떼거지 같은 까마귀떼의 밥이 된담!”
누가 또 이렇게 큰 소리로 지껄였다. 앞칸에서 전갈이 왔다. 방금 강으로 떨어진 여자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죽은 애의 어머니인데 역시 파라티푸스로 앓다 자식의 뒤를 따라, 홀아비가 된 젊은 남편은 어찌할 줄 모르다가 창을 열고 내던졌다는 것이었다. 원식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남편 된 젊은 사나이를 측은히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 속으로는,
‘바보·…… 못난이…….’
하는 기실은 남편 된 젊은 사나이를 욕하는 게 아닌 울분을 느끼었다.
‘죽은 어린에는 어떻게 할 셈인가…….’
이런 생각을 뒤미처 한 원식은 문득 아내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할 젊은 아버지나 아닐까 하는 것도 연상하고 애를 셋이나 가진 원식은 몸서리치며, 그러나 잠시 주저하다 벌떡 일어나,
“그 칸에는 사람들도 없었단 말입니까.”
하고 입을 떼어, 죽은 딴 아이들의 경우와 같이 안동까지나 갔다 묻도록 하게 하자고 그러니까 그 사나이는 돈이 없어 그랬든 말든 얼마간씩이라도 돈을 모아 보자고 반장에게 제의를 했다. 그래서 걷힌 돈 이백 원을 반장이 전하러 가게 될 때, 그러나 원식은 빠졌다.
기차는 저녁때 안동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시간이 늦다는 이유로 하룻밤을 또 공연히 차 속에서 허비하고 이튿날 아침에야 단체는 해산되었다. 기차로 철교를 건너지 못하는 피난민들은 그러기 나룻배로 몰려 건너게 되었는데 몇 푼 안 되는 돈을 조선 은행권으로 역 앞에서 바꿔 본 원식은 휘청휘청한 결음으로 나루터로 곧장 나갔다. 신경서 출발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느라 석 달 동안이나 늑장이었던 그였으나 저 강만 건너면― 신의주(新義州)의 땅을 밟기만 하면 모든 걱정 시름이 단숨에 날아갈 성싶어, 남들은 수용소로 여관으로 찾아갈 때 원식은 몇몇 사람들과 강가에서 뱃사공을 찾았다.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딘 원식의 속은 편안했다. 신의주에서 서울까지 갈 일 또한 까마득했으되 덮어놓고 좋았다.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 족족 조선 사람이어서 마음이 놓였고, 길을 물을 때 좀 무뚝뚝한 태도에도 탄하고 싶진 않았다.
기차 관계로 신의주에서 또 뜻하지 못한 며칠을 원식은 묵었다. 그동안 그는 그리 맛없는 북선 막걸리나마 보기만 하면 마시었고, 안동서 받아 온다는 배갈도 마셨다. 그런데 다 같은 배갈이면서도 신의주에서 맛본 배갈에는 정이 떨어졌다. 진한 배갈 반되쯤은 마시는 그였으나 갑자기 구역이 나서 차라리 막걸리를 찾았다.
차표 때문에 매일 몇 차례씩 피난민 중에서도 환자만을 수용하는 공회당엘 들르는 동안 그래서 그의 마음은 노상 편치는 않았다. 날마다 수천 명씩 밀렸다 빠지는 피난민들 덕분으로 졸부자가 많이 났다는 신의주의 주민들이 성가스런 존재인 눈치였고, 공회당 마당에는 날마다 몇 개씩의 관이 누워 있어 그것을 볼 때마다 어서 기차를 타고 남행하고 싶었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 원식은 짐을 지고 역으로 나갔다. 먼동이 트기 전의 새벽 바람은 찼으나 차표를 탄 사람이나 못 탄 사람이나 잔뜩 모였다. 표를 가진 사람들은 잠잠히 줄을 지어 늘어섰고 표를 못 탄 축들은 물으니 덮어놓고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해서 어떻든지 먼저 역원의 눈을 속이려고 갈팡질팡이었다. 그런데 차는 여섯시 차가 열시에나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짜장 차는 늦게야 출발하려는지 해 가 다 가 역 앞뜰을 일본인 여인들이 십수 명 대비를 들고 쓰레질을 하게쯤 시간이 늦었건만 개찰을 안 했다. 원식은 신기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는 암만해도 행색이 수상한 몇 사람 앞에 선 중년 남자 두 사람에게 시선을 굴리곤 하였다.
그때였다. 누가 그의 앞에 바싹 다가서 허리를 굽신하며,
“선생님, 노비 좀 보태 주십쇼. 만주 전곽기(前廓旗)에서 피난 오는 도중 찻간에서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습슈니다. 경상도 대구까지 가야 할 텐데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동정 좀 해주십쇼.”
하며 또 굽신하였다.
“아, 그럼 찻간에서 죽은 아내를 내던진…….”
“네, 바로 저올시다. 선생님도 그 차에 타셨던가요.”
이렇게 바지저고리 바람인 젊은 사나이는 발식을 하였으되 원식은 더 묻지도 않고 지전 몇 장을 젊은이 손에 쥐어주었다. 젊은이는 앞 사람에게로 걸음을 옮겼으나 원식의 시선은 마냥 그의 뒤를 따랐다.
젊은 사나이는 원식이 그가 얼마 전부터 수상하게 보는 중년 남자 앞까지 더듬어 갔다. 그런데 그 중년 남자는 동정을 빌 사나이가 채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섰던 방향을 홱 돌려 동정을 빌려던 사나이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원식은 직감적으로 그 중년 남자에게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때 옆에 섰던 젊은 여자 하나가,
“저 일본 사람 같은 남자는 아깐 저기 서 있질 않았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이 말을 귀에 담은 원식은 그제서야 자신을 얻어 그는 장총을 둘러멘 보안대원이 선 개찰구 앞으로 빠져나갔다.
“피난민 가운데 왜놈이 섞 이었는데 그대로 둡니까.”
원식의 이 말을 들은 보안대원은,
“어디요, 어디?”
하고 대뜸 표정이 사나워졌다.
원식은 눈과 입만으로 수상한 중년 남자 두 사람을 가리켰다.
얼마 후 그 중년 남자 두 사람은 보안서로 이끌려 가고 원식은 개찰이 시작되어 다시 짐을 짊어졌다.
“당신두 그런 짓은 왜 해요.”
원식의 아내는 끌려가는 일본인이 불쌍해서인지, 아직까지도 일본인에게 억눌렸던 자국이 남아서인지 이렇게 남편의 행동을 핀잔 주자,
“그런 짓이라니? 저놈 두 놈이 빠지면 우리 피난민 중의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차를 탈 것을 생각해 봐! 고놈 그러구두 중간에 가서 새치길 했단 말야…….”
하고 되레 아내를 타박하는 원식도 기실은 생전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벌을 준 가슴의 설렘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압록강』, 동지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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