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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4편,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사모함
요절 : 7절,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강론
설교자가 본문을 택했을 때 우선적으로 굳게 붙잡아야 할 점은 성령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소홀하거나 망각하게 되면 설교는 중심을 잃고 헤매게 되고, 성도들은 많은 말씀을 들었으나 무엇을 들었는지 요점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84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84편은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일종의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4절과 8절에 “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분기점으로 84편의 구조(構造)는 도표에 표시한 대로 1-4절, 5-8절, 9-12절, 3단원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니까 3절로 된 찬송가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좀 더 관찰해보면 각 단원마다 “복이 있나이다”한 “복”(福)이 있습니다.
㉠ 첫째 단원에서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4)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 둘째 단원에서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5)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 그리고 셋째 단원에서는 “주께 의지하는 자”(12)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형제는 3가지 “복” 중 어느 “복”이 84편의 중심주제로 여겨지십니까? 다시 말하면 형제는 3가지 복 중에서 어느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4)한 첫째 복을 받기를 사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점이 7절에 나타나는데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사모함”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만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84편의 중심주제는 “주의 집에 사는 자”에 있고 비결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온의 대로”(大路)가 “마음”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 대답할 수가 있습니까? 84편은 이점을 결론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依支)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는 것, “마음의 시온의 대로”가 있게 되는 것이 자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할 것밖에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3가지 복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이를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야 하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기 위해서는 주를 의지함으로만이 가능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84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와 해답인 것입니다.
84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고 탄원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모하며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를 표면적으로 보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얼마나 사모했으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衰弱)함이여”라고 말하겠습니까? 시편 119:131절에서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진술합니다. 형제도 이처럼 쇠약(지쳐서)해지도록 기도한 적이 있겠지요.
이점에서 통찰력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2절에서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고 말씀하고, 5절에서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대명사와 같은 모세까지도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고 말씀합니다.
할례를 “마음”에 행해야 하듯이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84편을 통해서 말씀하려는 중심 주제도 모형으로 주어진 예루살렘에 있는 육적인 성전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이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를 말씀하려는데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의 절체절명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2)하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4)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행위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한 나아가기를 갈망하지만 나아갈 수 없는 문제(問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해답”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해답(解答)이 “시온의 대로”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그러니까 84편을 기록할 당시는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고 “시온의 대로”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하며 탄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셨겠지요. “첫 장막”이란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출 25:8-9), 즉 설계도대로 지으라 하신 “성막”(聖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막”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은 죄로 말미암아 휘장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휘장”이 누구의 무엇으로 말미암아 언제 열려졌습니까? 복음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점을 히브리서 10:20절은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첫째는, 막혔던 휘장을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열어 놓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하십니다.
두 번째 요점은 “새로운 살 길이요”한 “길”이 개통(開通)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찌하여 “새로운” 길이라 하는가? 구약시대에는 없던 길이기 때문이요, 어찌하여 “살 길”이라 하는가? 생명으로 인도한 길이기에 “살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증언하고, 사도 바울은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3:18)고 증언합니다.
이제 형제에게 묻고 싶습니다. 구약교회에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일과, 신약교회에 휘장을 가르셔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 일 중 어느 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말씀만으로 가능해졌으나 휘장을 열어주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1500년간이나 막혔던 휘장이 열리고 길이 개통이 되자 제1차로 들어가신 분이 누구시며, 어디로 들어가셨는지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9:2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즉 주님이 제1차로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한 것도 땅에 있는 성소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국교회 성도들 마음에, 우리교회 성도들 마음에,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가 하고 자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성경은 어찌하여 그냥 “길”이라 하지 않고 “시온”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말씀할까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첫째로 시온에 가야만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6)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고, 둘째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14:7)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냥 “시온의 길”이라 하지 않고 “대로(大路)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할까요? 이점에서 옛날 옛적 우리 조상들이 살던 시절에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에 “길”이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사막과 같은 황무지에 길이 생기기까지 세월이 얼마나 걸렸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 번 지나가고 두 번 지나가고--몇 번이나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오솔길이 생겼을까요? 그 오솔길에 태풍이 한 번 지나가면 길은 순식간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를 보로 가던 박달재 고개 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개통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참으면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는가? 시험의 바람이 불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또다시 애타게 권면하는 오솔길이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가 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게 되는가 하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무슨 말씀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십시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6)한 “눈물 골짜기”입니다. 시편 23: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진술합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하시고, 사도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눈물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게 될 각오를 해야 되는데 이럴 경우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없는 자는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107:4-5)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주소가 아닌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대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희미한 “소로”(小路)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마음에 확고부동한 “시온의 대로”가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비결도 분명합니다. “내가 길이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히 10:20) 십자가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라고 복음을 “십자가의 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단언합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그들은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6)고 말씀합니다. “샘, 이른 비, 복을 채워 주나이다”등은 모두가 때를 따라 위로부터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고 확신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고 있는 23편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로 시작하여 결론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를 목적지로 삼고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에도 시온의 대로가 있겠지요. 때를 따라 도우시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기를” 사모하십시다. 이 나아감이 이 땅에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주님 오시는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저 하늘 황금길 나 올라 갈 때에
시온 성 언덕 위에서 시온 성 언덕 위에서
수많은 천사들 날 인도하리라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249장)
첫댓글 매번 댓글을 달던 우리 드보라는 어디 가셨나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