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 일본 아케노(明野) 육군비행갑종학교 졸업 1945 일본 패망 후 사이공 경비대장, 46년 5월 귀국 1949 초대 공군사관학교장 및 초대 공군 참모총장 1957 국방부 장관 1981 국정자문위원,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1987 국무총리
● 김정렬의 두 가지 신화
초대 공군 참모총장이자 제5공화국 마지막 국무총리. 이러한 김정렬에게는 두 가지 '신화'가 뒤따른다. 그 하나는 공군 창설의 어버이라는 것이다. 일본군 항공 대위를 지낸 김정렬은 귀국 후 미군정청의 강요성 권유에 의해 1948년 4월 1일 보병학교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였다. 그후 육군 항공대의 발족에 따라 근무대장, 비행부대장, 육군 항공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미국과 한국 육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군 독립에 진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9년 10월 1일 경비행기 22대로 한국공군이 탄생되면서 김정렬은 대령 계급장을 달고 초대 공군 참모총장에 기용된다. 문자 그대로 공군을 창건한 공군 창설의 어버이인 그에게 보라매 군번 1번(50001번)이 부여되었다. 두 번째 신화는 4․19혁명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정렬이 군의 총책임자로서 시위 대중에 대한 발포 명령을 반대하고 군이 정치 사병화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화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지지 않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화려한 신화 뒤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는 어둠이 그것이다.
● 대를 이은 일본 육사 출신
김정렬의 집안은 5대째 무관이 계속 이어온 광주 김씨의 명문으로 이른바 양반 가문이며, 큰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일본 육사를 나왔다. 큰아버지 김기원(金基元)은 일본 육사 15기 출신이다. 1902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한 15기생 8명(일명 8형제파)은 구한말의 육사 유학생들 가운데 가장 축복받은 행운아에 속했다. 일본 육사 졸업 후 동경 근위사단에 배속되어 견습사관 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부대를 따라 종군하게 되었다.
본국 정부로부터 관전장료(觀戰將校)라는 '영예로운' 호칭까지 얻은 이들이 서울에 돌아오자 장안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일본군 관전장교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가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이미 일본군의 절대적인 비호 아래 그들이 장차 크게 출세할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더욱이 근위사단장이던 하세가와(長谷川) 중장이 그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한국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오자 그들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양위를 강압한 일제는 마침내 군대 해산을 강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러서는 육사 출신자들은 왕공족부무관(王公族附武官)을 하거나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평화군대'인 조선보병대 대원이 되었다. 물론 노백린(盧伯麟), 유동열(柳東說), 이갑(李甲) 등의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사 출신자 모두가 친일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조선보병대에 배속되어 일제의 총독통치에 안주하는 길을 택했다. 조선보병대의 한국인 장교들 가운데 일본 육사 출신자들은 일본 군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진급했는데, 김기원은 조선군 중좌에까지 진급하여 공병대장을 지냈다.
한국 국군의 예비역 준장인 김정렬의 부친 김준원(金俊元)은 일본 육사 26기 출신이다. 1909년 대한제국의 군부가 친위부로 개칭됨과 동시에, 1896년 개교한 사관양성소인 무관학교가 폐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통감부 사이에는 사관 양성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기로 합의를 보고, 무관학교 폐교 당시의 1, 2학년 학생들 가운데 수재들을 국비생으로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학생 선발을 위한 소양시험이 실시되어 학도들은 한 사람씩 일본군 장교 앞에 불려가 면접을 받았다.
2학년 재학생들 가운데 십여 명이 이 시험에 통과했는데 이들이 바로 육사 26기인 것이다. 당시 학도들 가운데는 이를 기피하여 고의로 선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일본에 도착, 동경중앙유년학교(1920년 육사 예과로 개편) 예과 과정을 밟고 있을 때 대한제국은 일제에 합병되었다. 어쨌든 제26기생 13명은 1912년 5월 학교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으로 전국 각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김준원은 시고쿠(四國) 섬의 젠쓰지(善湧寺)로 발령받았다. 이후 이들은 다시 육사에 진학하여 18개월간 군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한편 1937년에는 일제의 도발에 의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같은 해 8월 일본 육사의 기구 자체에 큰 변화가 있었다. 육사 예과가 분리독립하여 육군예과사관학교(일명 振武臺)가 되었으며, 육사 본과는 육군사관학교(일명 相武臺)로 개편되었다. 또한 항공병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사관후보생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육군항공사관학교(일명 修武臺)가 육사에서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김정렬은 1937년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입학, 1940년 54기로 육군항공사관학교 전투기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41년 12월에 발발한 태평양전쟁 초기에 항공(전투)중위로 필리핀 공략작전에 참가한 그는 대만 남부기지에서 출격하여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후 그는 1943년 일본 아케노(明野) 육군비행갑종학교 졸업 후 동기생들 가운데 처음으로 전투기 비행중대장에 발탁되었다. 1944년 9월 최신예의 비연(飛燕) 전대장으로 김정렬은 스마트라, 자바, 팔렘방 등지에서 방공(防空) 근무를 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용감한' 전투조종사 김정렬. 그는 과연 누구를 위해, 그리고 누구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것일까?
종전 직전 김정렬은 아케노 육군비행갑종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도중 프놈펜에서 종전을 맞이하였다. 항공대위로 일본 패망을 맞은 그는 직후 사이공 경비대장으로 변신하여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김정렬은 이용문(李龍文, 일본육사 제50기)을 도와 조선 출신의 군인 군속 위안부 등 1,100명(여성 330명 포함)을 모아 집단생활을 시키다가 1946년 5월 일본 구축함 요쓰키(宵月)에 이들을 싣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일제의 패망 직후 경비대장으로 변신하여 치안유지와 조선인 집단생활 임무를 수행했다는 김정렬. 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혹시 전쟁 직후의 혼란 상황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망자(亡者)는 말이 없다지만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
● 박정희의 '형님'
한국공군 창설의 산파로서 공군 참모총장을 두 번이나 지낸 김정렬은 1957년 군복을 벗은 후 곧바로 국방장관으로 기용되었다. 국방장관 재임 당시 김정렬과 일본 육사 3기 후배인 박정희 사이에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1956년 박정희는 육군대학에 입교한 후 의기소침하여 과음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육군대학에 들어온 것은 5사단장에 복무하던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로 여러 부하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인책성 인사조치 때문이었다. 더구나 박정희로서는 소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여서 설화(雪禍) 사고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957년 박정희는 육군대학을 졸업하게 됐으며 곧 진급심사가 있었다. 진급심사위원회에서는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나와 그대로 통과되었는데, 이때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郭永周)가 박정희의 사상 문제, 여자 관계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을 때 김정렬이 등장한다. 당시의 일을 이종찬(李鐘贊)은 이렇게 회고한다.
1957년 진급을 앞두고 박정희 장군의 소장 진급이 곽영주 경무관의 제동으로 누락된 것을 뒤늦게 알고 경무대로 올라가 그를 만났다. 그에게 누락된 이유를 물었더니 "박 장군의 경력을 보고 그의 사상이 의심스러워서 리스트에서 뺀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래서 나(김정렬)는 "그 문제라면 이미 클리어된 것 아니냐"며 점잖게 다시 리스트에 올려주도록 부탁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당신은 각하의 경호책임을 맡고 있을 뿐인데 무슨 근거로 군 인사에 개입하느냐"고 일갈했는데 이 고함 소리를 화장실에서 나오던 이 박사가 듣고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게 됐다. 내가 사실을 발설하게 되면 난처하게 될 것임을 알아차린 곽영주가 나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속삭이는 목소리로 "알겠소, 알겠소"하고 사정해서 나도 "각하, 아무 일도 아닙니다"하고 얼버무린 일이 있다(《참군인 이종찬 장군》, 221~222쪽).
김정렬과 곽영주의 부닥뜨림이 있은 직후 박정희의 진급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처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정렬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6월 요직인 1군 참모장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박정희는 더욱 자연스럽게 한 달 반 먼저 태어난 김정렬을 '형님'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 7년간 공민권을 제한당한 국방장관
예편과 동시에 국방장관에 취임한 김정렬은 1960년 4․19혁명 직후까지 자리를 지켰다. 1959년 3월부터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 조정환(曺正煥) 외무장관, 송인상 재무장관, 홍진기(洪璡基) 법무장관, 김일환(金一煥) 교통장관, 곽의영 체신장관 등이 6인위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부정 선거책을 협의하였는데, 나중에 조정환 외무장관이 사임하자 김정렬이 6인위에 참가하여 3․15 부정선거에 일조를 하게 된다. 국방장관으로서, 그리고 국무위원으로서 부정 선거 모의에 자리를 함께 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치욕이었다고 한다. 훗날 김정렬은 이렇게 회고한다.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때 이 나라를 다스릴 분은 독립운동의 거인인 이 박사 외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개헌을 찬성했습니다. 물론 사사오입이라는 수학의 논리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1957년 국방장관에 임명된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비록 이 박사의 건강이 나쁘지만, 그 양반이 돌아가시면 정권이 순조롭게 이양될 것으로 막연히 보고, 3․15선거에서도 그 분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4․19학생 데모로 이 박사는 하야를 하게 됐고, 그후 부정선거 문제 때문에 저는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습니다(《참군인 이종찬 장군》, 220쪽).
당시 군이 부정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은 사단 또는 현지 특무부대와 경찰 정보기관이 관여한 것이지 지휘 계통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참작되어서인지 아무튼 김정렬은 선거 당시 유엔총회 대표로 외유중이던 조정환 외무장관과 함께 부정선거 관련 국무위원 구속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김정렬은 1960년 말에 공포 시행된 '반민주 행위자공민권제한법'의 '3․15 당시의 국무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등은 자동 케이스로 7년간 공민권을 제한한다'는 규정의 적용 대상이 되었다.
한편 그는 경무대 앞에 밀어닥친 시위군중의 분노로 대통령의 안위가 고비에 이르렀을 그 순간에도 계엄군에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고 이승만의 하야를 정중하게 진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왔지만 그 한 사람보다는 나라의 운명이나 군에 대한 국민의 신망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국방장관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정치군인'거부한 장군들」, 『월간조선』, 1977년 8월호). 정말 그러했는가? 1980년 9월 『경향신문』에서 연재한 『비화 제2공화국』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
대학교수단의 데모가 있은 다음날인 1960년 4월 26일 아침 대통령 집무실에서는 김정렬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눈물을 보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한 그의 어깨를 껴안으며 이승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그만두면 사람이 안 다치겠지?“ '생각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는 김정렬의 어깨를 흔들며 이승만이 재차 묻자 그때서야 입을 다문 채 김정렬은 고개만 끄덕였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김정렬은 이승만의 하야를 정중하게 진언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스스로 하야하기로 마음을 굳힌 데 대해 단지 소극적인 동조의 뜻만을 표시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개인적인 총애보다 나라의 운명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다면 더 적극적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라는 그의 술회에서도 김정렬의 당시 상황에 대한 판단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 5공 독재의 마지막 국무총리
'피를 묻히고' 등장한 전두환(全斗煥)은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마자, 곧장 모든 형태의 저항을 불법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부터 마련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준비해 온 새 헌법을 10월 27일 제정․공포하게 되는데, 이 5공 헌법 부칙에 의거하여 악명높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제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악, '언론기본법'과 '노동관계법'의 개악 등, 국가보위입법회의의 반역사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 국민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5공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를 수호할 수 있는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5공 출범과 관련하여 김정렬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제5공화국 출범 때 일선에 계신 분들과는 별다른 친교가 없고 선후배 관계로 지낼 뿐입니다. 다만 제5공화국 헌법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대통령께서 의장으로 계시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4년간 일했습니다(『경향신문』, 1987년 7월 14일자).
이러한 김정렬의 술회처럼 그는 5공 출범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와 5공 독재의 인연은 헌법위원으로 5공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참가하면서 비롯되었다. 즉 김정렬은 전두환 정권의 출범 때부터 간접적으로 5공 독재의 법적 틀을 확립하는 데 그 나름의 공헌을 한 것이었다.
한편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규하(崔奎夏) 대통령의 하야에도 김정렬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일각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의 출범을 계기로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모든 일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주관아래 처리되었다. 각부 장관 앞으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 육군중장'이라는 명의로 공한이 내려가고 모든 장관은 전두환에게 정례적으로 업무를 보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규하의 실각과 하야는 이미 시간 문제였다. 마침내 10980년 8월1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최규하 스스로 낭독한 하야 성명이 나왔다.
민주 국가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규하의 대통령직 사임이 자신의 말처럼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 숱한 의혹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명 발표 1주일 전 김정렬의 청와대 방문이다. 여기서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는 최규하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정렬이 전두환 세력의 하야 압력을 전달해 주는 밀사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 속에, 의혹의 눈총을 받고 있는 대목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본의의 술회와는 달리 김정렬은 5공 체제가 수립된 직후 헌법위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5공 독재로 넘어가는 격변의 시기에도 밀사로서 전두환의 권력 확립에 기초를 다지는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후 김정렬은 국정자문회의 위원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내다가, 1987년 7월 국무총리에 기용된다.
정부는 앞으로 제반 민주화 조치를 차질없이 실천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특히 앞으로 예정된 정치일정에 따라 선거관리를 비롯한 모든 일을 엄정하게 집행해 나가야겠다.
이것이 1987년 7월 14일 김정렬 내각이 정식 출범하는 취임식에서 김정렬 국무총리서리가 던진 일성이다. 그리고 다음날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민주화라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것은 한꺼번에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국민들 사이에는 얼마간의 위화감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 이를 동화시키고 국민이 화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중앙일보』, 1987년 7월 14일자). 김 총리서리는 내각의 당면과제로 선거 등 민주화 일정의 엄정 집행과 국민화합을 내걸은 것이다.
7․13개각은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선거 관리를 위한 중립내각의 구성을 주장한 같은 날에 단행되었다. "사심없이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겠다"는 김정렬 총리서리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일반적인 반응은 한마디로 민주화 추진과는 거리가 먼 내각이라는 것이었다. 즉 새 인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 내각의 진용과 역대 독재정권에서 봉사한 노회(老獪)한 총리를 가지고 과연 제대로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정렬 내각의 출범에 대해 민주당은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결의문을 채택, "김정렬 국무총리서리는 3․15 부정선거 당시의 국방장관으로서 부정선거의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시점에 그를 국무총리서리로 임명한 것은 현 정권이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을 획책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중앙일보』, 1987년 7월 15일자).
선거국면에서 거국중립내각 구성의 문제는 6․29선언 직후 김대중(金大中)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며, 운동진영에서 본격적인 투쟁내용으로 실천된 것은 10월 이후 집회와 서명, 농성 투쟁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운동진영의 주요 관심의 초점이 대통령 후보 문제에 맞춰졌기 때문에 힘있는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어쨌든 당시 김정렬 내각에 대한 운동진영의 반대는 '거국내각쟁취투쟁'으로 나타났다.
… 우리 민중이 요구한 직선제는 군사독재가 실권을 틀어쥐고 부정․협잡선거를 통해 독재의 재집권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민중은 민주체제하에서의 직선제를 통해서 민중이 바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민주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 거국중립내각의 수립은 현재의 암울한 정세를 돌파할 수 있는 관건적 요체이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이 직선제를 허용하고서도 그들이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칼자루를 쥔 부정․협잡선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지금 시기 우리 구국운동이 전개해 나가야 할 거족적이고도 비타협적인 반독재투쟁은 바로 거국내각 수립투쟁이다(《단결과 전진》 1, 7~8쪽).
김정렬 내각이 과연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 전반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되어 나타났다. 취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8월 27일 국민화합을 그토록 강조한 김 총리가 '좌경용공 세력 척결을 위한 담화문'을 발표, "우리 사회에 엄연히 실재하는 급진 좌경세력은 이제 본격적인 체제전복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민주화를 내세우면서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좌경세력을 우리 사회로부터 추방하지 않는 한 이 땅에 진정한 정치 발전은 이룩할 수 없다"고 좌경세력에 대한 권력의 강경 대응책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생존권적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일어났던 노사분규에 대해서도 국가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노사분규가 " '노동자해방' '노동민주화'를 외치는 충격적인 주장과 구호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과격 폭력 혼란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면서, "특히 노사분규사업장을 투쟁거점으로 삼아 체제 전복을 꾀하는 좌경세력의 불순 책동은 각별히 경계해야 할 사태변화“라고 주장한 것이다. 김 총리의 담화문 발표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구속 사태와 폭력적인 쟁의 진압이 잇따르면서, 9월 말에 들어 구속노동자 수는 5백 명을 넘어섰고 부상자는 2만 3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정렬의 주장과는 달리 1987년 7~9월의 노동자대투쟁은 실상 개발독재체제하에서 억눌리고 수탈당해온 노동 대중의 생존권적 최소 요구가 6월항쟁의 대중적 열기에 힘입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예외적인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노동쟁의는 사전에 준비되거나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쟁의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공유되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소외 대중의 자연발생적 진출이자 대중적 폭발이었던 것이다. 결국 김정렬의 발표는 기층(基層) 대중 및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과 제도권 야당의 끈을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차단하기 위한 음모의 일환으로 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동안 5공 독재에 맞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민주세력의 도덕성을 훼손시키기 위한 탄압의 전주였던 것이다. 노동자 등 소외 대중의 권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사분규에 대한 강경탄압과 민주세력에 대한 반공 논리의 적용은 민주화 국면을 경색 국면으로 이끌었다.
● 노태우의 '화려한 변신'에 공헌한 김정렬 내각
"일단 어려운 중책을 맡은 이상 4천만 국민 앞에 명예를 걸고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역사의 명예를 걸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르겠다" "평생 협잡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던 김정렬. 그는 진정으로 공정선거를 치르기 위해 노력했는가? 선거 결과에 대해 국민운동본부와 민주당, 평민당은 이구동성으로 12․16 선거를 '금권과 관권 폭력이 난무하는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했다.
실제로 13대 대선에서는 숱한 부정선거 사례들이 속출했다. 선거전이 시작되자마자 김정렬 내각은 야당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을 암암리에 유포시켰고, 특히 TV 등 언론매체를 통하여 후보들의 이미지를 조작했으며, 영․호남 유세장 폭력을 공공연히 방영하여 지역감정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도 부정선거가 진행되었는데, 투표과정에서 드러난 릴레이투표(노태우난에 기표된 투표용지를 건네주고 이를 투표함에 넣게 한 대신 발부받은 백지 투표용지를 돈으로 바꿔주는 방법), 대리투표(여러 장의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본인 모르게 투표하는 방법), 이중․유령투표(사망, 여행, 이사 등으로 당사자가 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용지를 교부하여 다른 사람이 대신 투표하는 방법), 참관인과 감시인 그리고 야권 성향의 유권자에 대한 폭력, 부재자투표의 공개 투표화 등과, 개표과정에서의 샌드위치표(다른 후보의 백 장 단위 표묶음에 맨 위장과 아래장만 노태우표로 바꿔치기 하여 노태우표로 발표하는 방법), 투표함 바꿔치기 및 탈취 부정 투표함 등이 그것이다(《12월 16일 대통령선거 부정사례 모음》, 《12․16부정선거 현장과 증언》, 《우리는 결코 부정선거에 굴복할 수 없다-12․16부정․조작 선거의 진상》참조).
한편 선거 직후 가장 치열한 부정선거 규탄 투쟁이 일어난 곳은 구로구청이었다. 구로구청 농성은 구청 마당에서 봉인되지 않은 투표함이 사과상자, 빵상자에 은폐된 채 몰래 반출되려던 것이 발각되고, 구청 3층에서 방금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붓뚜껑 60개와 새 인주 70개, 백지투표 용지 1천5백 매가 발견됨에 따라 시작되었다. 그러나 폭력을 앞세운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구로구청 농성은 막을 내렸고,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부정선거 규탄 및 선거무효화 투쟁은 국민들의 패배의식과 야권과 운동진영의 분열, 그리고 정권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안정이냐 혼란이냐'의 의제화된 양자택일을 강요한 '보통 사람' 노태우는 야권의 '목숨을 건 적전분열' 및 김정렬 내각의 적극 지원에 힘입어 여유있게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김정렬은 12․12쿠데타와 1980년 광주학살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노태우의 '화려한 변신'에 공헌한 것이었다.
●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했는가?
역대 장군들 가운데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손꼽힌 김정렬은 군부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4․19혁명 당시 발포명령의 거부와 1987년 정관용 내무장관의 위수령 발동 건의 거절 등은 그 대표적인 예로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면 5․16군부 쿠데타의 주역들이 만든 공화당 초대 당의장과 3공에서의 주미 대사, 그리고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12․12쿠데타와 1980년 광주에 뿌리를 둔 5공 독재에 참여한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에 걸친 쿠데타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쿠데타 후의 독재 정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행위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생활신조인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에서, 혹 김정렬은 하늘의 뜻을 독재정권에의 참여라고 해석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