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멘소레! 오키나와 역사기행
동양의 하와이, 아름다운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현이다. 규슈에서 대만으로 이어진 활 모양의 ‘류큐제도'라고 하는 161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류큐제도에 해당하는 오키나와현은 크게 나눠 보면 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117개 섬, 미야코지마를 중심으로 하는 미야코 지역12개 섬, 이시가키지마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32개 섬 등 세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상당히 넓고 광대한 해역이 이에 해당된다. 오키나와현에서 가장 큰 섬은 오키나와 본섬으로 현의 총면적 중에 52%에 해당되며 현민 145만 명 중 대략 90%가 이곳에 살고 있다. 면적으로 보면 제주도와 비슷하지만 제주 인구가 66만 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오키나와의 인구 밀도는 매우 높다. 현청은 오키나와 본섬의 남부에 위치하는 '나하시'로 32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다.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넘실대는 파도와 따스한 미소를 간직한 친절한 사람들, 그래서 오키나와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은 오키나와에 대해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유명 연예인들의 고향이자 아름답고 이국적인 휴양지로서 장수의 고장이라는 평화롭고 자연 친화적인 힐링의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치열한 지상전이 전개되다가 전후에는 냉전의 후방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예외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비극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다. 하나의 공간에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가 동시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아름다운 땅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잊혀진 유구왕국
오키나와의 사정을 조망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지금은 잊혀진 것처럼 보이지만 15세기 전반부터 19세기 후반에이르기까지 중화질서 하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비무장의 섬’, ‘평화의 섬’으로서 독특한 정체성을 간직하며 동아시아의 바다와 땅, 다양한 물류와 사람의 교류를 매개해 온 유구왕국(일본에서는 '류큐왕국'이라고 부른다)과 만난다.
유구왕국이 성립하기 전 이곳에서는 기존의 호족 세력들이 패권을 다투어 오다 14세기에 이르러 북부, 중부 남부의 세 개의 세력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이 시대를 삽산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다 1429년에 세 개의 세력을 통일하면서 통일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구왕국이었다. 유구왕국이 등장해서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중계 거점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는 시점은 중화질서의 중심에 있던 명나라가 영락제(1402-1424년)등의 통치를 거치며 <영락대전>을 완성한 시기이자,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고 정화(1371-1434년)의 대원정(1405-1433년)을 추진하는 등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또한 조선에서는 세종의 치세(1418-1450년)가 펼쳐지던 시기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편 해양 국가 일본에서는 남북조의 대립이 종결되고 아시카가 가문이 중심이 된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전개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물류, 정보, 인간 교류를 매개하는 해상왕국이자 중계 거점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유구왕국의 기개를 반영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잘 집약해서 보여 주는 것이 1458년 나하시의 슈리성에 걸린 '만국진량(萬國津梁), 세상의 여러 나라를 잇는 가교의 종'이다. 그 종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이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구국은 남해의 이름난 지역으로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과 일본과 보차와 순치관계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다. 유구국은 이 두 나라 간의 낙원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유구왕국은 15세기부터19세기까지 류큐제도에 450여 년간 존재하면서 비무장을 표방하고 풍부한 예술과 문화적 전통을 축적해 온 평화의 나라였다.
평화의 섬에 흐르는 우치난추의 눈물
유구왕국의 수난은 동아시아의 전환기가 도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왔다.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해금(海禁)정책을 철폐하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에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유구왕국은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6세기 말 해양세력 일본의 조선 침략이 실패하면서 1609년 사쓰마번 지금의 규슈지역 남단 가고시마현 이 침공해 들어오자, 유구왕국은 중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이른바 '양속兩屬체제’ 외교 노선을 취하며 왕조 국가의 명맥을 유지한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 해양의 중계 지점에 위치하던 유구왕국은19세기 서세동점의 쓰나미가 밀려들던 1879년에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표방하던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이를 일본에서는 '류큐처분'이라고 부른다. 메이지 정부는 동아시아의 가장 약한 고리인 유구왕국을 시작으로 거대한 전환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작업에 들어간다. 이로써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유구(류큐)’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유구왕국은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둔갑해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어)’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간 것이다.
일본제국이 가까운 이웃 국가들을 삼키는 이른바 '근린 제국주의’의길로 나아가면서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되었던 유구왕국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또다시 전쟁의 사지(死地)로 내몰린다. 1945년 4월1일부터 6월 23일까지 오키나와현의 주민들은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철의 폭풍'이라고 부르는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는가 하면, 일본군으로부터는 이른바 '옥쇄' 혹은 '집단자결'과 같은 비극적 상황으로 떠밀려야 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한 생지옥의 체험이었다. 오키나와 전투 전사자 21만 명 가운데, 오키나와의 민간인 사망자는 13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다. 일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개번 맥코맥 교수는 “오늘날 오키나와인은 전쟁을 증오하고 미군이건 일본의 자위대이건 군대를 불신하며 도쿄나 워싱턴의 '국방'이라는 의제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데, 그 근저에는 무엇보다도 오키나와전의 경험과 기억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전의 충격과 공포를 대면하지 않고 현대 오키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우치들이 공통으로 지닌 아픈 기억에서 기인한다.
2차 세계대전과 제국 일본의 지배가 종식된 이후 글로벌한 차원에서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질서가 빠르게 형성되고 동아시아 지역이 팽팽한 긴장관계에 놓이면서 미군 점령군 휘하에 놓인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에게 다시 희생양으로ㅍ제시했다. 그리고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한다. 이제 오키나와현은 절묘한 지정학적인 위상으로 말미암아 미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미국의 직접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는 '평화헌법'을 가진 일본의 품으로 마침내'복귀'하지만, 오키나와현에 주둔한 미군기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해당하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주둔하는 주일미군기지의 약 74%에 이르는 부담을 안고 가는 상황이 줄곧 지속되는것이다. 과거 '비무장의 나라는 이제 '냉전의 섬'으로 변신해서 미일안보동맹을 지탱하는 '기지(基地)의 섬'으로 변신했다. 노벨문학상을 받고 일본의 평화운동에 헌신해 온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오키나와의 형국을 가리켜 “오키나와가 일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오키나와에속한다”라고 질타한 것은 이런 일본과 오키나와의 뒤틀린 역사의 부조리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슈리성의 화재
2019년 11월 1일, 느닷없이 오키나와 본섬 나하시에 위치한 슈리성이 전소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오키나와 시민들은 유구왕국의 궁궐인 슈리성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수개월 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마(火魔)에 휩싸인 상황을 연상시켰다. 슈리성의 시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구/오키나와가 굴곡진 사연을 겪을 때마다 슈리성은 그 한복판에서 수난의 시절을 겪어야 했다.
슈리성은 동서 약 400미터, 남북 약 200미터 규모로 내곽과 외곽으로 구성된다. 특유의 전통적인 구스쿠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심부로 향하는 경로에 9개의 문이 있다. 그중에서도 ‘수례지방(守禮之邦, 예를 지키는 나라)’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슈레이몬(守門)은 일본 화폐의 도안으로 사용되는 등 유구국/오키나와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슈리성은 170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15년에 재건된 바 있다.하지만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1879년에 유구왕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유구국왕은 도쿄로 이주했고, 슈리성은 일본 육군의 주둔지와 각종 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육군이 슈리성 지하에 사령부를 설치한 탓에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다시 잿더미만 남았다.
전후 미군정기에는 슈리성터가 류큐대학 캠퍼스로 사용되었으며,1992년에 오키나와 복귀 20주년을 기념하여 슈리성의 주요 건물이 1715년 모습으로 다시 재건될 수 있었다. 유네스코는 슈리성의 성곽 일대가 중국과 일본의 축성문화를 독특한 방식으로 융합하고 있음을 인정해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슈리성이 이번 화마를 견뎌내지 못하고 전소되고 만 것이다.
평화와 상생을 염원하는 우치난추의 꿈
오키나와에서는 어디를 가나 친절한 미소를 지닌 사람들이 '멘소레’(상대를 환영하고 반겨 주는 오키나와 인사말)라고 인사하며 말을 건네온다. 사자 모양을 한 수호신이자 오키나와의 마스코트로 유명한 암수한 쌍의 '시샤'는 우치난추를 닮아 표정이 아주 다양하고 익살스럽다.
그럼에도 오키나와에는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뭔가 다른 특별한 아픔이 곳곳에 서려 있다. 일본이 전후 '평화헌법'을 내세우며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때 오키나와는 일본의 부담을 온 어깨에 걸머진 채 지금에 이르렀다. 미군의 해금된 기밀문서에서 베트남 전쟁 시에 오키나와에 핵병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2009년 9월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서 기세 좋게 등장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260여 일 만에 낙마한 것도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하려다 미국의 반대에 직면했던 것이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 후텐마 기지의 현 외 이전을 둘러싼 갈등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시아가 갈등과 대결 국면으로 갈수록 틈새에 끼어 있는 '기지의 섬' 오키나와는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오키나와 본섬의 남단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 전투 종결 50년이 되던 해인 1995년에 조성되었다. 길게 늘어선 ‘평화의 주춧돌’에는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24만 명 이상의 명단이 국적을 불문하고 빼곡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해안 쪽으로 탁 트인 광장의 중심에는 '평화의 불'이라는 모뉴먼트가 존재한다. 평화의불은 오키나와 전투 최초의 미군 상륙지인 아카시마에서 채취한 불과 피폭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나눠 받은 불을 합쳐 지금껏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거기에는 전쟁의 참혹한 비극을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와 비극의 땅 오키나와가 온 세계에 평화와 상생의 소중함을 멈추지 않고 발신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