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趙)씨 姓의 유래
본래 趙氏 姓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중국 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후예라는 설이 많이 전해집니다.
金나라의 침략으로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그들에게 납치된후 고종이 남경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했으나 북방에 처져있는 황족들은 금나라의 박해를 부지할수 없어 황해를 거쳐 고려에 亡命하게되어 고려땅 여러지방에 정착한 趙姓은 지명을 따라 貫鄕을 삼고 점차 그수가 불어나자 여러갈래로 분파되어 관향과 시조가 발상한 뒤 수백년후에 족보가 편찬되어 이로 인해서 그원조를 알수 없게 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우리나라의 趙姓은 원래는 모두 같은 혈통이라 생각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조씨성(趙氏姓)은 원래 중국사람으로 중국에서 동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 세거하게 되었다고, 각종 문헌 및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조씨성의 본관이 정 하여진 때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 광종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통일하고, 관료제 개편 및 지방 행정구역을 조정 하였을 무렵, 통치수단으로, 각 지방 유력호족 들의 세거지 및 고려통일 공신들에게 대부분 각지역별 행정구역을 기준하여, 본관을 분정(나눔)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씨성의 원류는 하나이나, 살고있는 세거지를 기준으로 나누다 보니 本貫을 달리 하였던 것이며, 각 지역의 조씨성을 가진 가문들은 지정한 본관을 기준으로, 흥망성쇠를 달리한 것 뿐입니다.
趙氏 姓의 본관 !
강서(江西) 강진(康津) 경주(慶州) 김제(金堤) 남해(南海) 밀양(密陽) 백천(白川) 순창(淳昌) 양주(陽州) 옥천(玉川) 임천(林川) 주천(酒泉) 직산(稷山) 진보(眞寶)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풍양(豊壤) 하동(河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흥양(興陽)
조(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55,56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7위이다. 본관은 문헌에 20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56본이며, 이 중에서 시조와 계대를 알 수 있는 본관은 풍양(豊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배천(白川)·함안(咸安)·순창(淳昌)·횡성(橫城)·평양(平壤)·김제(金堤)·직산(稷山)·옥천(玉川) 등 20본이다. 조(趙)씨는 본관별로 시조와 유래가 다르고, 분적된 본관이 없기 때문에 동원동근(同源同根)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현종 때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는 관례가 있다.[1] 한편,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서로 본관이 혼동되어 기록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2] 인구는 한양 조씨(31.2%)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함안 조씨(26.3%), 풍양 조씨(12.6%), 배천 조씨(6.7%), 옥천 조씨(5.1%), 평양 조씨(4.2%) 순이다.
직산 조씨(稷山 趙氏)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 개국공신으로 전한다. 2000년 인구는 3,387명이다.
풍양 조씨(豊壤 趙氏) 시조 조맹(趙孟)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로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천마산 동굴에 은둔하여 농사를 짓던 사람이라고 한다. 시조 이후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를 각각 1세조로 하는 3계파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이다. 2000년 인구는 113,798명이다.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 조익(趙翌)은 평장사(平章事) 조첨(趙瞻)의 아들로 965년(광종 9)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광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후손인 조영인(趙永仁)이 1201년 문하시중에 올랐다.[3]2000년 인구는 5,337명이다.
배천 조씨(白川 趙氏) 시조 조지린(趙之遴)이 고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 知銀臺事)로 임명되었고, 1011년(현종 2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4] 2015년 인구는 75,978명이다.
순창 조씨(淳昌 趙氏)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 때 순창호장(淳昌戶長)을 지냈다. 그의 5세손인 조인평(趙仁平)이 1177년(명종 7)에 망이·망소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금오위낭장(金吾衛郎將),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17,923명이다.
함안 조씨(咸安 趙氏) 시조 조정(趙鼎)은 고려 대장군 원윤(元尹)이다. 2015년 인구는 282,890명이다.
임천 조씨(林川 趙氏)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본명은 조수강(趙守康)이고 송 태조 조광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 조광의(趙匡義)가 황위를 찬탈한 이후 고려로 도망쳐 와서 임천(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11,040명이다.
평양 조씨(平壤 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 때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하였다. 2000년 인구는 41,047명이다.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順昌)의 마한시대 지명이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양주 조씨(楊州 趙氏)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후기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00년 인구는 23,942명이다.
김제 조씨(金堤 趙氏)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조연벽(趙連壁)은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蒙古)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부장(副將) 김윤후(金允侯)와 함께 처인성(處仁城: 현 경기도 용인)에서 몽고군을 소탕한 공(功)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벽성(碧城 : 김제의 옛 이름) 군(君)에 봉해지고 좌정승(左政丞)에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연벽(連璧)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김제(金堤)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독자 조휘(趙暉)의 후손들이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계승했다. 고려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5][6] 후손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漢陽)으로 이거하여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는 307,746명이다.
영흥 조씨(永興 趙氏)는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던 가문으로 조인재(趙麟才)의 증손 조영무(趙英茂)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영무의 아들 조서(趙叙)는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가 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사간원예의(司諫院禮議)·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7]
신창 조씨(新昌 趙氏) 시조 조영규(趙英珪)는 조선 개국공신이다. 이방원을 도와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위키백과 참고===
조(趙)씨는 총 68개의 本貫에 인구는 2000년 기준 984,913명입니다. 조씨의 본관별 종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명)-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한다. 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삼았다.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명)- 시조 조정(趙鼎)은 중국 후당(後唐) 사람으로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 대장군에 올랐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했다.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옛 함안군과 칠원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이다.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명)-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왕건이 그를 찾았을 당시 나이가 70세였다. 이때부터 신라 정벌의 길에 나섰다. 그 뒤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이다.
▲배천조씨(白川趙氏.66,155명)- 시조 조지린(趙之린)은 송나라 태조(조광윤)의 맏아들인 조덕소(위왕)의 셋째 아들이다. 979년(고려 경종 4년)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황해도 배천(白川.땅이름은 백천이 아닌 배천으로 발음한다)군 도태리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고려 덕종과 정종 때 벼슬을 지낸 후 백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배천으로 했다. 배천(白川)은 황해도 남동부에 위치한 연백군(延白郡)의 옛 지명이다.
▲옥천조씨(玉川趙氏, 순창.49,847명)-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 중엽에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증손 조원길(趙元吉)이 공양왕 때 일등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옥천(순창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했다. 집성촌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를 비롯하여 13개 리에 걸쳐있다. 이 중에서도 주암면 주암리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곡성군 삼기면 양촌리,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곡성군 곡성면 동산리 등도 집성촌이다. 옥천(玉川)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명)-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과 의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고려 때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송나라 상장군이 되었다. 그의 5세손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충숙왕의 왕비가 된 후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때 충렬왕의 명에 따라 본관을 상원(詳原)에서 평양으로 바꾸었다.
▲양주조씨(楊州趙氏. 23,942명)-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호장,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35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집성촌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전북 김제군 청하면 관상리 등이다. 양주(楊州)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순창조씨(淳昌趙氏, 17,923명)- 시조 조자장(趙子張)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본관을 순창으로 한 것은 고려 때 대장군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 7년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랑장(金吾衛 郞將)에 오르고 대장군이 되었다.
▲김제조씨(金堤趙氏 50,000명 추산)-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을 지냈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벽성(김제의 옛 이름)군(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2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임천조씨(林川趙氏.11,040명)-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유의 손자인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979년 위왕(魏王)이 화를 당하자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천혁(天赫)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을 대파하여 가림백(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임천으로 했다. 집성촌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수촌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충남 논산군 양촌면 석서리, 충남 대덕군 기성면, 충남 서산군 음암면 탑곡리, 충북 중원군 이류면 문조리,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충북 괴산군 소수면,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전북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 전북 임실군 관촌면 등이다. 임천(林川)은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이었다. 1914년 부여군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