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윤 가옥(丁相潤家屋)
종 목 : 민속문화제자료 제119호(전북)
명 칭 : 정상윤 가옥
지정일 : 1984년 04월 01일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82(서원길 8)

정상윤 가옥 안채
창원정씨종가 지척에 있는 정상윤 가옥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마을소개 및 찿아오는 길은 일전에 소개한 창원정씨종가 편을 참고 하시길 바라면서
생략하고자 한다 정상윤가옥(丁相潤家屋)은 전북 장수군 산서면에 있는 조선후기의
한국전통 건축물과 아주 흡사하다 정상윤 가옥은 사랑대청 상량문 써놓은 것을 보면
文宣王誕降二千四百八十九年(공자 탄생 2489년)이라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해석하면
1938년도에 지어진 집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부 건축되었는데 개화기보다 훨씬 후대에
지어진 집이다 그럼에도 언뜻 보면 조선시대 전통한옥과 다를바 없어 보일만큼 시대변화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집이다.
불교용어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말이있다 세상 모든 것은 같은 모습이 아니고 늘 변화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도 제행무상의 뜻처럼 늘 변화한다 20세기 초에는 서구문물의 급격한
유입 그리고 일제강점 등으로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하였고 이런 이유로 주택의 변화도 빨랐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도 지역적으로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었다 서구 문화 유입이
바로 이루어진 서울이나 인천처럼 빠른 변화를 보이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시골은 변화하는
정도의 차이가 많았다 다시말해서 지방은 서구문명을 즉각적으로 받지않고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상윤 가옥은 그만큼 보수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성은
조선후기 지어진 인근에 있는 창원정씨 종가와 비교하여 보면 확연히 알수있다 다만
정상윤가옥을 지을때 정씨종가의 위상을 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있다 종가 대문은
솟을대문 이지만 이 가옥의 대문은 평대문이다 사랑채 규모도 누마루가 있기는 하지만
네 칸으로 다섯 칸인 종가보다 작다 작은것 까지도 베려하는 효행으로 보여진다.

정상윤 가옥 사랑채(永春軒)
●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제일먼저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다 안채 정면에 丁 자로 배치되어 있고
“영춘헌”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영춘헌은 언제나 푸르른 봄을 간직하다 라는 뜻이라 한다
홑처마에 팔작지붕 이다 기둥은 정면은 두리기둥 측면은 모두 각기둥으로 되어있다
사랑채는 천정위에 다락방이 있다.
● 중문
이 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예전에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벼락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다 중문 옆에는 평소 편하게 다니기 위한 쪽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옛날에는 안채 안쪽에 나무로 만든 가리개가 있어 사람들이 안채를 바로 들여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조선시대 유교사상 영향을 받아 안채를 밖에서 보이지 않게
설계하여 만들었음을 알수있다.
● 행랑채
중문 옆으로 붙어 있는곳이 행랑채이다 초가집으로 되어있고 이곳에 청지기
또는 머슴들이 살았을 것이라 추청한다.
● 안 채
안채는 남향에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 이고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측면은 모두 각기둥으로 되어있다 천장위에 다락을 설치 하였고 환풍을
위에 앞. 뒷면에 빛살창을 넣었다 예전에는 부엌이 건물의 서쪽 뒤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건물의 맨 왼쪽 방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안채 뒤쪽에는 정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1938년에 집을 지었으나 동시대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고 구시대의 생활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전문가 블러그에 정상윤 가옥에 대한 논평을 있는 그대로 소개 하고자 한다
다락을 만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청한다 천장위에 다락을 들이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20세기 들어와 점점 확대 되었다고 한다
1908년 지어진 전주의 학인당도 그렇고 근처에 임실에 있는 이웅재 가옥(1909년)의 안채도
적극적으로 다락을 들였다 한다 이런 현상은 재산이 증가되고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면서 곳간외에 물품을 직접 관리해야할 수납공간이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이런 수납공간 다락방이 만들어지면서 건물이 높아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과거 한옥의
다소곳한 느낌과는 달리 웅장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적응이 덜되어서 전체적으로
집이 세련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대 건축의 특징이다
우선 층고가 높아지면 처마가 조금 더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서까래 부재가 도리만큼
커져 둔중(鈍重)해지기 때문에 처마만 높이고 말았다 그렇다보니 안주인의 말씀대로 비가 툇마루
안쪽까지 들이치는 기능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다음은 창문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방 위쪽에 만든 다락의 환기와 채광을 위해 창문을
설치하다보니 예전 한옥보다는 창문이 많아지게 되었다 창문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과 같은
세살창 등으로 처리할 경우 심심한 입면이 되고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문양의
창을 설치하고 문자를 새겨 넣은 나무벽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요소가 많아지다 보니 집전체가
세련 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이 집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부분은 안채 부엌이다 부엌은 안채 맨 왼쪽 한 칸인데
앞쪽 한 칸과 뒤쪽 한 칸의 바닥 높이가 다르게 꾸며졌다 아궁이가 있고 불을 이용한 조리가
이루어지는 부엌은 낮게 되어있고 상차림을 하는 부엌은 음식을 차려 바로 안방으로 내어
올 수 있도록 안방과 같은 높이로 되어있다 안방 옆의 부엌은 지금은 현대식 주방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안주인의 말씀으로는 현재 주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구도 예전에 있던 찬장
위치에 그대로 설치한 것이며 창문도 예전 위치 그대로라고 한다 과거 가구위치나 창문위치가
현재 개념에도 맞을만큼 부엌은 당시로는 최신 개념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집은 장식성이 강한 집이다 19세기까지 한옥들은 규범에 묶여 집을 치장 하는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에는 이러한 규제에서 풀려나면서 이전과는 달리 장식이 많아지게
된다 그런 추세에 이 집도 쫓아가고 있었다 안채나 사랑채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으며 주춧돌도
공을 들여 만든 반구형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누마루의 계자난간의 모서리 부분도 직교로
처리하지 않고 사선으로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처음 본 재치 있는 처리이다
또한 마루 끝도 앞에서 보았을 때 마루 앞부분이 두껍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랫부분을
빗면으로 쳐내었다 외에도 안채와 사랑채를 그리고 사랑마당을 구분하는 담도 석재로 만 쌓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 기와로 문양을 넣어 장식성을 높였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집에 공을 많이
들이고 매우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지만 전체적으로 장식 과잉이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
집이다 우선 가장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중문이다 중문 지붕을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지붕을 크게 만들려다보니 밑에 가구가 번다(煩多)해져서 경쾌 하면서도 세련된
맛이 없다는 것이 흠이다 또한 지붕처마 곡선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다는 것이 흠이다
이 집을 만들었던 목수가 재주는 뛰어나지만 전체를 보는 눈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사랑채 누마루이다 사랑채는 주변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게
지었다 전체적인 집터가 뒷산에서 조금 떨어져 평지에 세웠기 때문에 집이 전체적으로 낮아
보일수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랑채 기단을 높여 우뚝 서게 하였다 그것 덕분에 담 밖
풍광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누마루는 한자 더 높여 놓았으니 밖에 풍광을 충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마당 귀퉁이에는 연못까지 조성하여 이곳에
앉으면 흥이 절로 나올만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오랜동안 봄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담은 당호(堂號)인 영춘헌(永春軒)이 어울리는 누마루이다.
지금 이 집은 안채 뒤쪽의 광채와 대문간 옆에 있는 헛간채가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지어진지 76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보수 한 부분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안주인의 말로는 자기 나이보다 두 살 많은 집이라고 한다 집이 나이가 먹지 않았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집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보존되어야 할 집이다
- 건축가 한국사람 - (이름 밝히지 않음)

이가옥의 주인인 정상윤(丁相潤)씨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특히 한학에 깊은 조회가 있었다고
한다 남원시 농지개량조합 이사를 엮임 한바 있으며 뜻한바 있어서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되었다 제1대 장수군의회 의원 및 제 2기 장수군의회
의장을 지낸바 있으며 재직기간은 1991년4/15~1995년6/30일 까지이다
세월이 흘러서 아쉽게도 몇 년전에 작고 하시어 고인이 되었다
현재는 정상윤씨 부인이 홀로 이 가옥을 지키며 관리하고 계신다 안주인 마져 돌아가시면 이곳도
곧 쇠락할 것 같다 후손 누구도 이 집에 들어와 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안주인의 증언이다
지금도 집 관리가 버겁다고 한다 이 가옥이 잘 보존 되도록 관계 당국에서의 더 많은 배려가
절실한 시점이다 작은 관심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아쉬움으로 발길 돌린다.

정상윤 가옥 배치도
장수군에는 4개의 전통가옥이 문화재에 등록 되어있다 4군데 모두 답사를 마치면서 느낀바가
많다 장수의 전통가옥은 문중에서 관리하는 곳도 있으며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답사전에 몰랐던 우리전통 한옥에 대해서 답사를 하면서 많은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지금껏 무지로 살아왔던 내가 부끄럽다 그러나 뒤늦게라도 배우게 되어서
다행이고 행복하다 위 4군데 관련된 분들게 진심을 감사를 드린다 혹시나 문화재 등록을
거부하고 자신의 소유다고 하여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하길 거부했다면 결국 전통 가옥들은
사라질 수 밖에 운명이다 보전, 발전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이를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함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고가 절실하다는 결론을 내리수 있다.
참고로 전라북도 고택 가입대상 26곳 가운데 17곳이 현재 가입에 동의했다
전라북도 고택협의회 의하면 관리 대상지는 아래와 같다.
전주 → 학인당
군산 → 채원병 가옥
익산 → 조해영 가옥, 김안균 가옥
정읍 → 김동수 가옥
남원 → 몽심재
김제 → 이석정 생가, 남강정사, 오영순 가옥
고창 → 황이재 생가, 김정회 고가
부안 → 김상만 가옥
임실 → 이웅재 고가
장수 → 정상윤 가옥, 장재영 가옥, 권희문 가옥, 창원정씨 종가.
이상 17곳이 가입에 동의 했다고 밝혔다 기회가 주어지면 전국은 아니라도 전라북도 17곳을
모두 돌아볼 예정이다 끝으로 한옥은 왜 5백년을 유지하고 현대 주택은 고작 30년~40년 밖에
유지를 못할까 아마도 가꾸지 않아서 그럴까 한옥의 장점은 백년대계를 내다보고 건립한다
한옥은 지금도 후손들이 살면서 계속 보수 관리하고 문화재청, 지방단체에서 힘을 보태고
후손들은 사명을 다해서 고택을 지키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결론은 우리것이 좋은 것이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