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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마음, 무한의 우주
부산에 내려가기 전날, 큰 바람이 불었다. 숲에서도 마을에서도 일제히 나뭇잎들이 떨어졌다. 늘 다니는 가래나무 숲에서는 커다란 파도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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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큰스님께서 법공양 해주신 <화엄경 강설 8권>은 화장장엄세계가 시작되는 부분인데
그 서문에 “무한의 마음 위에 무한의 우주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라고 나와 있다.
이 부분을 공부할 때 ‘그림을 잘 그리는 분이 꼭 다시 그림으로 그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화장세계지도>가 한 장의 종이에 선명하게 인쇄되고 곱게 접혀져서 책 첫장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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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에 내려오신 스님은 법공양실로 가셔서 “장사 잘한다. 벌써 이렇게 많이 가져갔어? 박스떼기네?” 하시면서 “그래 잘한다.”하고 자원봉사 하는 보살님들을 칭찬하셨다.
큰스님께서 이번 가을에 대만 법고산사에 가서 직접 받아오신 <108자재어>는 표지 색깔이며, 크기, 종이의 질도 처음 받았을 때와 똑같이 해서 벌써 만권을 찍어서 법공양중이라고 하셨다.
“한국사람에게 한국어 책을 준비하고,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법공양 하는 거야. 얼마나 고마워.”하셨다. 손에 딱 쥐어지는 작은 책 한권을 받고 이렇게 돌아와 벌써 만 권을 퍼트리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자, 아주아주 오래 전 중국 서안의 대안탑 안을 빙글빙글 걸어서 올라갔던 것, 투루판으로 가기위해 사막의 길을 차로 지나며 차갑게 얼어붙은 화염산을 내다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더 정확히는 현장스님이 구해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대안탑,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하며 그 때 억지로 느껴보고 싶던 마음이 이제와 저절로 갑자기 찾아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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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스님이 밭에서 직접 기르시고 수확하신 고구마를 5킬로그램씩 32박스를 준비해서 가져오셨다며 법공양실에 들어오셨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주려고 가져오셨다고 하자 큰스님께서 좋아하시며 바퀴달린 밀대를 가리키셨다.
“구르마로 옮기라고. 책 옮기기 쉽게 저걸 내가 직접 가게에 가서 샀어.” 하셨다.
바퀴가 달린 밀대를 이용하자 고구마 박스가 순식간에 옮겨져서 법공양실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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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로 오신 스님들이 계셨다.
“오늘 회원하나 들어왔습니다.통도사 자비원 교육기관 담당하는 스님입니다.”
“그래? 잘했어.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야지.” 하셨다.
또 해인사 원당암에 계신 거사님이 스님들을 모시고 왔는데 큰스님은
“스님 수염이 아주 근사하네. 난 목도리를 했는가 했지 하하하”
하셨다. 혜암스님을 시봉했다고 하는 스님은 지금은 종단을 바꾸었다고 하셨다.
큰스님은 “좋은 세상 자유롭게 살아야지. 오늘 마침 잘 오셨네. 공부 잘하세요.” 하셨다.
비구니스님 한 분이 가까운 곳에 사시는 비구니 스님을 모시고 왔는데
“얼마전에 스님께서 팔관회 때 음식얘기를 하셨는데 귀에 쏙 들어오더랍니다.” 하셨다.
“신기한 일이네. 여기 오면 포교거리 많이 준비해 갈 수 있어. 사경집도 많고 하니까. 갖다가 신도들에게 주세요. 얼마나 좋은 법공양인지 몰라.”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화엄경 강의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8권 (화장세계품1), 책을 가지고 점안식을 하겠다. 늘 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천천히 크게 서문을 읽는 것으로써 점안식을 대신한다.
서문
허공이 대각(大覺) 가운데서 생기게 된 것이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난 듯하고
작은 먼지같이 무수한 유루(有漏) 국토들[은하]이
모두 허공을 의지하여 생겼도다.
물거품이 소멸하면 허공도 본래 없거늘
하물며 다시 삼유(三有)가 있겠는가?
空生大覺中
공생대각중 여해일구발
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유루미진국 개의공소생
有漏微塵國 皆依空所生
구멸공본무 황부제삼유
漚滅空本無 況復諸三有
『능엄경』
예컨대 무한한 허공이 작은 물거품이라면 인간의 깨달은 마음은 태평양 바다입니다.
그 물거품이라는 무한한 허공에 다시 또 무수한 우주가 있는데 그중 어느 변두리에 우리가 사는 작은 우주가 있습니다. 그 작은 우주 안에 미세먼지만한 은하계들이 있고, 다시 또 미세먼지보다 몇 억분의 1만큼이나 작은 태양계 안에 우리들의 지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6척단구 나는 무엇인가? 인허진(隣虛塵)인가? 우주의 작은 세포인가?
보현보살은 2천 6백여년 전에 허블우주망원경이나 보이저와 같은 우주탐사선도 없이 수억만 광년의 거리를 순식간에 왕래하여 거대 우주인 화장세계를 낱낱이 확인하면서 모두 거리를 재고 생긴 모습들을 살펴 가며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각(大覺)이라는 지혜의 눈과 대각이라는 우주선을 이용하여 무한한 우주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것의 기록이 화장장엄세계입니다. 21세기까지 발달한 천체물리학도 아직은 살펴보지 못한 우주론입니다. 깨닫지 못한 인간의 지혜는 언제쯤이나 보현보살의 우주 이론에 이르게 될는지요.
무한의 마음 위에 무한의 우주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눈을 이 작은 모래알만한 지구에서 지구 전체에 있는 모래 수보다도 수억만 배나 많은 화장장엄세계로 돌려서 무한의 우주 밖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화장장엄세계품을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화엄경을 읽는 우리들의 마음이 무한으로 확대되는 길입니다.
2014년 5월 19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우리가 화장세계 또는 화장장엄세계라는 말을 잘 쓰고 있는데 그 근거가 이 화장세계품이다.
이미 화장세계품을 공부할 때 보았던 내용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한두 번 읽고 한두 번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그 내용이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도 화엄경과 인연 맺은 지가 50년이 넘었다. 탄허스님의 화엄경 출판을 준비하면서 화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10번 가까이 읽었고, 원고를 탈고하고 교열할 때 서로 바꿔가면서 한문을 보고 한글을 보면서 다 같이 읽었다. 또 출판 과정에서 그 교정을 7번, 8번 읽었다. 또 내가 화엄경으로 한문교재를 내고, 한글 교재를 내면서도 화엄경을 통으로 여러 번 읽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화엄경의 10분의 1이나 이해할까, 10분의 1도 채 이해를 못하고, 설명을 해도 10분의 1도 채 설명을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세세생생 화엄경 공부는 두고두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천착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불교는 이웃 종교들처럼 그 경전이 단순하게 한 두 권 정도가 아니다. 공부할 거리가 무한히 많다. 그것은 불교의 큰 장점이고 공부하는 우리에게 유익한 점이다.
불교는 위대한 종교이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 속에 담긴 참다운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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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들에게 <화엄경강설8권>, <염화실지>와 아울러서 <108자재어>라는 성엄법사의 책을 한 권씩 공양올렸다. 성엄법사는 몇 년 전에 열반하셨는데 대만에서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큰스님이시다. 이 스님은 일본에 가서 유학을 하고 다시 미국에 가서 유학을 하셨다. 미국에서 포교를 많이 하다가 대만으로 돌아오셔서 법고산사(法鼓山寺)라고 하는 승려들의 교육을 위주로 하는 절을 지었다. 법고산사는 절이지만 절이 그대로 학교이고 교육기관이다.
내가 이번에 그곳을 방문했더니 성엄스님의 법문을 한글로 정리한 책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성엄스님 법문의 영문판은 말할 것도 없이 많고 한국 사람들이 오면 한국사람들에게까지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서 일부러 한국어로 이렇게 찍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포교를 한다.
내가 이것을 만나고는 얼마나 환희심이 났는지 모른다. 몇 구절을 읽자마자 ‘얼른 돌아가서 법공양 해야되겠다’고 생각했다. 뒤에 판권을 보니 ‘108자재어 유통, 재판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고, ‘재판시 저작권을 존중하여 내용을 수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도 해놓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 책의 원본 그대로 표지 색깔이며 책 크기, 종이도 똑같이 해서 법공양을 준비했다.
우리들은 부처님 말씀이 귀한 줄을 잘 모른다. 너무 흔하게 대해서 희소성이 떨어져서 그런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금은 금이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다. 진리의 가르침은 진리의 가르침이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동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전법의 자세가 중요하다. 사실 한국불교는 전법포교가 너무 부족하다. 인연이나 기회를 만났을 때 법을 보급 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얼마 전에 범어사에서 팔관재계를 설했는데 팔관계의 진짜 깊은 이야기는 별 감동이 없었는지 그날 내가 설법도중에 말한 음식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았다면서 오늘 이 자리에 처음 공부하러 오신 스님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그물을 많이 치면 치는 대로 좋은 것이다. 간혹 ‘법공양 책을 공짜로 주면 안읽는다’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나는 감동 받는 거니까 가져가서 잘 읽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천 개 만 개 그물을 쳐놓고는 고기 한 마리만 건져도 된다고 생각해야 된다.
말끝마다 다 감동하고 말끝마다 전부 깨닫고 말끝마다 전부 견성 성불을 다 하면 그것 또한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런 이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히 무한정 법공양을 하는 것이다.
무한정 하다보면 음식이야기에도 감동해서 공부하러 온 사람이 있다.
<108자재어>를 많이 준비를 해놓았으니 스님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셔서 쓰시기 바란다.
법공양실에 내려가보니 벌써 택배를 부쳐달라고 준비하신 분들도 있다.
늘 그렇게 택배로 가져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그런 것은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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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자재어>는 손에 착 잡히게 만들어진 작은 책인데 읽을 때 마다 감동을 받는다. 나는 어디서든 손닿는 대로 읽으려고 침상 머리맡에도 두고 다른 곳에도 두고 해서 두 권을 두고 읽고 있다. 우리가 인연이나 연기 이야기를 잘하는데 이 스님은 그것을 ‘성공의 삼박자는: 인연에 순응하여, 인연을 파악하고, 인연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정리를 해놓았다.
미국에서도 공부한 스님이라서인지 인연에 대해 현대적으로 잘 해석해 놓았다.
인연을 만나면 일단 인연을 따르고 자기가 왜 이런 인연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고 인연을 창조해야 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이 인생을 성공한 사람이다.
수백억 수천억 재산가가 된 것이 성공이 아니다. 절을 네 개 다섯 개 심지어 열 개까지 운영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인연의 이치를 가슴깊이 새기고 그 인연에 순응하고 또 자기 인연을 잘 파악하고 자기 인연을 창조하고 거기에서 몸에 밴 행동이 옆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그 하나만 우리가 제대로 전해줘도 불교를 50프로 안다고 할 수가 있고 제대로 인생을 산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런 글을 내가 읽어보고는 ‘야 정말 정리 잘했구나. 인연, 인연 하지만 요렇게 깔끔하게 간단하게 감동적으로 정리를 잘했구나.’하고 느꼈다.
그런 글귀 뿐만 아니라 108자재어 작은 책자안에는 구구절절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다.
제목은 108자재어지만 108구절이 네 번이나 들어있으니까 그 양도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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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법회에서 대만 증엄스님의 자재공덕회 이야기를 수십 번도 더 하였다. 그런데 누가 전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보았지, 직접 가서 본 적은 없었다. 이 번에 ‘죽기전에 가서 봐야겠다, 확인해야겠다’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만순례 여행에 따라가서 자재공덕회 상황을 보고는 정말 감동했다.
대만 불교에서 우리가 또 배울 점은 잘하는 것을 전부 기록과 전시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있는 점이다. 대가를 바라서도 아니고 상(相)을 내려고 그렇게 전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이런 일들을 했다고 하는 것을 ‘알린다’는 것에 뜻이 있다. 그 과정의 기록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따라서 할 사람은 따라서 하고, 배울 사람은 배우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하면 된다.
증엄스님의 자재공덕회에서 재난으로 성전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지어줬다고 하는 이야기도 여러 번 내가 했고, ‘그것이 바로 불교다’라고도 했는데, 가서 모형으로 전시된 마을도를 보니까, 교회도 세워놓고 집도 세워놓고 학교도 세워놓은 것을 몇월 며칠 날짜까지 세심하게 붙여서 모형으로 전시를 해 놓았다. 한 일을 기록하고 알려서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나도 차(茶)를 좀 사려고 돈을 준비해 갔었는데 그 자재공덕회 전시를 보고는 차값을 다 줘버리고 왔다.
차와 골동품이 유명한 잉꺼 거리에 갔는데도 처음 보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재공덕회에 가서 그야 말로 한 방망이 얻어맞은 사람처럼 감동을 해서 차나 골동품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그런 것이 산교육이다. 여러 스님들도 작은 사찰을 운영하더라도 그 사찰의 역사, 그 사찰이 그동안 해온 일들을 기록하고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전시실 같은 것을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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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재공덕회 견학에 비한다면 법고산사에서 받은 <108자재어>같은 법공양은 부수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을 받자마자 ‘한국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준비해 놓고 있는가’ 하고 감동을 해서 돌아오자마자 출판사에 연락해서 바로 이 책을 복사한 것이다. 불교 밖의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대접한다고 하는 것을 불교계 안에서 탓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열심히 사회를 위해서 잘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자연히 세상 사람이 불교도들을 돕게 되어 있다.
대만에서는 불교인들, 스님들이 사회에 그렇게 잘 하니까 사회에서도 사찰에서 무얼 한다고 하면 두 손들고 와서 서로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九 中
夜摩宮中偈讚品 第二十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또는 야마천궁게찬품은 내가 옛날부터 좋아한 품이다. 이번에 강의를 하면서 두 번 세 번 다시 보다 보니 ‘야마궁중게찬품이 참 좋은 내용이다’하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화엄경의 사구게도 이 야마궁중게찬품 안에 들어있다.
실제로 나는 이 내용들이 너무 좋아서 한 페이지라도 넘어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이지만 9페이지 위의 승림보살 이야기를 한 번 더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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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그 때
승림보살(勝林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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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맹하월(譬如孟夏月)에: 비유하자면 한여름에
공정무운에(空淨無雲曀)하면: 하늘도 깨끗하고 아무런 운에가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인데
혁일양광휘(赫日揚光輝)하야 : 아주 뜨거운 태양이 밝은 빛을 드날리고 있어서
시방미불충(十方靡不充)이로다: 온 시방세계에 그 햇빛이 가득하지 아니한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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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광무한량(其光無限量)하니 : 그 빛은 한량이 없어서
무유능측지(無有能測知)라: 그 누구도 측량해서 알 길이 없다.
유목사상연(有目斯尙然)이어든 : 눈이 있는 사람도 오히려 측량할 길이 없는데
하황맹명자(何况盲冥者)아: 눈 어두운 사람이 어찌 그 햇빛을 알 수 있겠느냐.
시력이 1.5, 1.0, 1.2가 되는 젊고 밝은 눈도 사실은 그 햇빛의 양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는데 눈 어두운 봉사가 그 햇빛의 양이 얼마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태양, 태양하지만 밤인지 낮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태양 빛을 어찌 이야기 하겠느냐.
*
제불역여시(諸佛亦如是)하사 :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공덕무변제(功德無邊際)하시니: 그 공덕, 불법의 공덕은 끝이 없다.
불법에 있어서 신도는 아마추어고 승려들은 프로라고 나는 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프로가 불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가 하면 사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 안된다.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끝이 없어서
불가사의겁(不可思議劫)에 :가히 사유할 수 없는 겁에
막능분별지(莫能分別知)로다: 분별해서 능히 다 알 수가 없다.
불법의 한량없는 능력과 공덕과 위대한 진리의 내용은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서 이 불법에 몰입해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만사 제쳐놓고 불법을 공부해야 된다. 그렇게 해도 불법을 제대로 알까 말까다.
화엄경 설법을 위해서 나는 항상 앞서 공부한 것도 연결을 해서 다시 보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은 천 번 만 번 이야기해도 괜찮겠구나’싶어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이지만 오늘 다시 중언부언 하였다.
4, 無畏林菩薩의 讚歎
(1) 所信境界
爾時에 無畏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如來廣大身이 究竟於法界실새
不離於此座하고 而遍一切處로다
그때 무외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여래의 넓고 크신 몸
끝없는 법계에 가득하매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온갖 곳에 두루 하도다
*
무외림보살(無畏林菩薩)의 찬탄(讚歎) : 무외림(無畏林)보살의 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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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경계(所信境界):믿을 바의 경계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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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무외림보살(無畏林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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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광대신(如來廣大身)이: 여래의 광대한 몸이.
여래라고 하면 2600년 전에 열반에 드신 역사적인 부처님을 포함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참나, 또는 참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불교는 전부 임제스님의 법을 이은 임제가풍이기 때문에 임제스님이 말한 무위진인, 차별없는 참사람을 이야기 한다. 이 ‘참사람’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할 때 무엇이 차별이 없는가? 여러분은 지금 이 말을 듣는데 무슨 조건으로 듣는가?
스님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가, 속인이라고 하는 조건, 남자라고 하는 조건, 여자라고 하는 조건, 젊었다거나, 늙었다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가?
아무리 멍청이라도 듣는 당체에는 차별이 없다.
듣는다는 그 당체는 승속 남녀 노소 등등 어떤 차별도 없다.
‘내가 무엇으로 듣지?’ 할 때 그 차별이 없이 듣는 이가 참나다.
차별 없는 참사람이 있기 때문에 차별 없는 참사람의 그 능력으로 듣는 것이다.
그 참사람,그 자리, 그 당체는 부처님과도 차별이 없다.
그러니까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한다. 이는 말은 그 당체를 두고 하는 소리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거의 그 부처님이다. 아무런 차별된 현상을 빌리지 않고 뭔가 역력하게 듣는 사실, 살아있는 부처, 차별없는 참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로 아는 부처님은 현상적인 이야기만 했기 때문에 대승불교 특히 화엄경 같은 데서는 크게 해당이 안된다. 다만 간혹 한 번씩 인용을 할 뿐이다. 이러한 여래광대신은
구경어법계(究竟於法界)실새: 법계에 가득하다.
불리어차좌(不離於此座)하고: 그러면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경전에서 보리좌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앉은 이 자리가 보리좌다. 보리가 앉은 자리이니 보리좌인 것이다. 단 조건은 어디를 가서 앉아도 우리가 앉은 자리는 보리좌라고 하는 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변일체처(而遍一切處)로다: 일체처에 두루하더라.
(2) 聞信利益
若聞如是法하고 恭敬信樂者는
永離三惡道의 一切諸苦難이로다
設往諸世界의 無量不可數라도
專心欲聽聞 如來自在力하나니
如是諸佛法이 是無上菩提일새
假使欲暫聞이라도 無有能得者로다
若有於過去에 信如是佛法이면
已成兩足尊하야 而作世間燈이로다
若有當得聞 如來自在力하고
聞已能生信이면 彼亦當成佛이로다
若有於現在에 能信此佛法이면
亦當成正覺하야 說法無所畏로다
無量無數劫에 此法甚難値니
若有得聞者는 當知本願力이로다
若有能受持 如是諸佛法하고
持已廣宣說이면 此人當成佛이어든
况復勤精進하야 堅固心不捨아
當知如是人은 決定成菩提로다
만일 이러한 법을 듣고
공경하여 믿고 좋아하는 이는
세 가지 나쁜 갈래와
모든 고난을 길이 여의리
한량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모든 세계에 두루 다니더라도
여래의 자재하신 힘을
지극한 정성으로 들으려 하라
이러한 부처님 법들은
참으로 위없는 보리니
설사 잠깐만 듣고자 하여도
능히 들을 이 없느니라
지난 세상에 누구나
이런 부처님 법을 믿는 이는
이미 양족존(兩足尊)을 이루어
세간의 등불되었느니라
만일 오는 세상에라도
여래의 자재한 힘을 듣고
듣고 나서 신심을 얻는 이 있으면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라
만일 지금 세상에서도
이런 부처님 법을 믿으면
마땅히 정각을 이루고
법을 말하기 두렵지 않으리라
한량없고 수없는 겁 동안에
이 법은 만나기 어려운 것이니
만일 들은 이 있다면
본래의 원력인 줄 알아라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누구나 능히 받아 지니고
또 다른 이에게 널리 말하면
이 사람 마땅히 부처 이루리니
하물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견고한 마음 버리지 않으면
이러한 사람은 결정코
보리를 성취할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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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이익(聞信利益): 들어서 믿는 이익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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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문여시법(若聞如是法)하고: 만약 이와 같은 법을. 위에서 설명한 것들을 말한다.
모두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바로 이러한 도리를 듣고 있는 여래의 법신, 우리의 법신은 광대하다고 하는 이 법을 듣고
공경신락자(恭敬信樂者)는: 그러한 이치를 공경하고 믿고 즐기는 사람들은.
한국불교의 전통에서는 제일 가까운 표현이 차별없는 참사람이다.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로 불교 설명을 거의 다했다. 이것은 임제스님의 깃발 중에 제일 가는 깃발이고, 임제스님의 그 다음 깃발은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든지 부처님이라고 하든지, 참마음이라고 하든 그러한 이치를 공경하고 믿고 즐기는 사람들은
영리삼악도(永離三惡道)의: 삼악도의
일체제고난(一切諸苦難)이로다: 일체 모든 고난을 영원히 떠난다. 무위진인, 여래의 광대한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고 하는 이 사실 하나만 제대로 맛보면 삼악도는 영원히 떠난다. 그것을 알면 삼악도에 가도 간 것이 아니다.
스님들이 형무소에 법문을 하러 간다. 죄를 지은 사람들과 같이 공양도 하고 법문도 하고 위로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문을 하러 갔을 뿐이다. 교화를 하러 간 스님은 교도소에 가도 죄인이 아니다. 죄인이 형을 다 살지 않고 교도소를 탈출했다면 자기 집에 와 있어도 교도소 보다 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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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제세계(設往諸世界)의: 모든 세계의
무량불가수(無量不可數)라도: 한량없는 숫자. 그런 세계에 설사 간다 하더라도
전심욕청문(專心欲聽聞): 오로지 하는 마음으로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하나니: 여래의 자재한 힘을 듣게 된다.
차별 없는 참사람, 하나만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
여시제불법(如是諸佛法)이: 이와 같은 모든 불법은
시무상보리(是無上菩提)일새: 무상보리다. 가장 높은 보리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깨달음이다. 그것을 여래라고 해서 깨닫든지, 참마음이라고 해서 깨닫든지, 참사람이라고 해서 깨닫든지, 참나, 진아라고 해서 깨닫든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다.
가사욕잠문(假使欲暫聞)이라도: 가사 잠깐만 듣고자 하더라도
무유능득자(無有能得者)로다: 능히 얻을 자가 없다. 쉽게 얻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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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어과거(若有於過去)에: 만약 과거에
신여시불법(信如是佛法)이면: 이와 같은 불법을 듣고자 하면
이성양족존(已成兩足尊)하야: 이미 양족존이 되었다. 지금 설명한 그 이치를 아는 사람, 과거에 그 이치를 믿은 사람은 이미 양족존이 되어서
이작세간등(而作世間燈)이로다: 세간의 등불이 되었다. 그사람은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는 것이다.
등불도 누구나 다 같은 등불이 아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서 과보의 몸, 보신, 수행에 의한 몸이 다 다르다.똑같이 신도를 가르쳐도 열 명 앉혀놓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스무 명 앉혀놓고 가르치는 사람, 백 명, 이백 명, 천 명을 앉혀놓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자랑거리가 아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 얼마나 질 높게 정법에 맞는 불교를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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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당득문(若有當得聞): 만약 어떤 이가 당래에. 당래는 미래라는 말이다.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하고: 여래의 자재한 힘을
문이능생신(聞已能生信)이면: 듣고 나서 능히 믿음을 낸다고 하면
피역당성불(彼亦當成佛)이로다 :그도 또한 마땅히 성불할 것이다. 당래에 성불할 것이다.
이렇게 과거, 미래를 이야기 했고 다음은 현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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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어현재(若有於現在)에: 만약 어떤 사람이 현재에
능신차불법(能信此佛法)이면:능히 이러한 불법을 믿게 되면
역당성정각(亦當成正覺)하야: 또한 마땅히 정각을 이루어서
설법무소외(說法無所畏)로다: 설법하는데 두려울 바가 없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법이 자기 소신이 되면 자기 목을 열 번 내놓더라도 ‘이것은 내가 불법에서 깨달은 바다. 부처님이 와서 따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것이 불법이다’ 라고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법을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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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무수겁(無量無數劫)에: 한량없는 겁에
차법심난치(此法甚難値)니: 이 법 만나기 매우 어렵다. 여러 수 천, 수 만 번을 듣고 생각해도 그것이 마음에 얼마나 와 닿느냐, 내 가슴을 얼마나 움직이느냐고 하는 것이 또 중요하다. 무량무수겁에 이 법을 만나기 매우 어려우니
약유득문자(若有得聞者)는: 만약 어떤 이가 얻어 듣는 사람이 있다면
당지본원력(當知本願力)이로다: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본래의 원력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과거로부터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이 알고 싶습니다’고 하는 원력이 쌓이고 쌓여서 이러한 이치인 무위진인, 차별없는 참사람의 도리를 납득하게 된다.
우리가 늘 독송하는 천수경을 외울 때 개경게가 나오는데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까지는 누구나 다 한다.
그 다음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여래의 진실한 뜻 알아지이다’ 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말이다. 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이 알고 싶다고 하는 그 마음은 오래전부터, 출가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의 본래 원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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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유능수지(若有能受持): 만약 어떤 사람이
여시제불법(如是諸佛法)하고: 이와 같은 모든 불법들을 능히 받아서
지이광선설(持已廣宣說)이면: 가지고 나서 널리 설명할 것 같으면
차인당성불(此人當成佛)이어든: 이 사람은 마땅히 성불하게 된다.
불법은 팔만 사천가지나 되는 법인데 그 중에 제일 중심이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은 무위진인이다. 여기서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의 이치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육바라밀, 십바라밀, 십선, 사무량심 사섭법 또 인의예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전해주는 것이다.
세 가지 보시(布施)라고 해서 법시(法施)와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를 전한다. 가르침을 전하고 재물도 전할 수 있으면 전하고 편안함도 전하는 것이다. 흔히 무재칠시라고 해서 재물이 들지 않는 일곱가지 보시도 있다. 전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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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부근정진(况復勤精進)하야: 하물며 다시 부지런히 정진해서
견고심불사(堅固心不捨)아: 견고한 마음이 버리지 않는 것이겠는가.
당지여시인(當知如是人)은: 마땅히 알아라. 이와 같은 사람은
결정성보리(決定成菩提)로다: 결정코 보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구절이 마음에 탁 와 닿아서 눈이 번쩍 뜨이고 깨달음이 손에 잡힐 듯이 된다면 더 말할 것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진은 경전을 보고 또 보고 사유하는 일, 신심을 견고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날 눈이 확 뜨이는 날도 있을 것이다.
5, 慚愧林菩薩의 讚歎
(1) 說法難思
爾時에 慚愧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若人得聞是 希有自在法이면
能生歡喜心하야 疾除疑惑網이로다
一切知見人이 自說如是言하사대
如來無不知실새 是故難思議로다
無有從無智하야 而生於智慧니
世間常暗冥일새 是故無能生이로다
그때 참괴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희유하고 자재한 법을 듣고
능히 기쁜 마음을 내면
모두 의심을 빨리 없애리
일체를 알고 보는 사람
스스로 이렇게 말하되
여래는 모르는 것이 없다 하나니
그러기에 헤아릴 수 없느니라
지혜 없는 데서는
지혜가 날 수 없으니
세간은 항상 어둔 것이매
지혜를 낼 수 없느니라
*
참괴림보살(慚愧林菩薩)의 찬탄(讚歎): 참괴림(慙愧林)보살의 찬탄
*
참괴림보살은 부끄러워 하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
설법난사(說法難思):설법의 어려움을 밝히다
*
이시(爾時)에
참괴림보살(慚愧林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약인득문시(若人得聞是) : 만약에 어떤 사람이
희유자재법(希有自在法)이면: 희유하고도 자재한 법을 들으면. 우리 눈 앞에 있고, 우리의 손에 잡혀 있는 화엄경이 제일 이해하기가 쉬우므로 간단하게 화엄경이라고 하자. 이 자재법을 듣고
능생환희심(能生歡喜心)하야 : 능히 환희심을 내면
질제의혹망(疾除疑惑網)이로다: 빨리 의혹의 그물을 제거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야마궁중게찬품의 게송만이라도 자꾸 읽고 생각하고 이리 저리 따져보고 그동안 배우고 알았던 불법을 전부 가져다 천착해 보고 설명해 보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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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지견인(一切知見人)이 : 일체를 보고 듣고 아는 사람은
자설여시언(自說如是言)하사대: 스스로 이와 같은 말을 한다.
희유하고 자재한 법을 듣게 되면 마음에 환희심이 나서 의혹이 다 사라지게 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을 듣게 되면
여래무불지(如來無不知)실새: 여래가 알지 못한 바가 없을새. 내가 다 안다는 말이다.
시고난사의(是故難思議)로다 : 시고로 이 도리는 참으로 사유하기 어렵다.
이것은 사실 내가 나를 아는 일이다. 나는 본래 영지불매(靈知不昧)한 존재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마음에서 신령스럽게 알아서 어둡지 않은 존재이고 그런 능력이 있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바로 그 존재다. 그것이 제일 중심이고, 제일 무거운 것이고, 근본이다. 어찌 보면 전부다. 그 위에 어린아이들이 크레용을 잡고 마음대로 환칠하듯이 이리저리 환칠해 놓은 것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차별된 현상이다.
뒤에 보면 ‘비여공화사(譬如工畵師)’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 화가와 같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이 야마궁중게찬품안에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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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유종무지(無有從無智)하야: 무지로 쫓아서
이생어지혜(而生於智慧)니: 지혜를 냄이 있지 아니하니, 무지에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세간상암명(世間常暗冥)일새: 세간은 항상 어둠일새
시고무능생(是故無能生)이로다: 능히 지혜를 내지를 못한다.
우리말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자꾸 듣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이 어찌하여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수많은 법문을 펼쳐놓았겠는가, 삼장법사들은 왜 그것을 애써 가져와서 번역을 하려고 했겠는가? 교통이라고 할 것도 없는 누구 한사람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그 먼 서역 삼만리를 걸어서 걸어서 부처님 경전을 싣고 왔겠는가?
가르쳐 주려고 한 것이다. 몽매한 중생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이다.
무지로 부터 지혜를 내는 것이 아니다. 돼지가 어느날 문득 깨닫고, 소가 어느날 문득 깨닫고 하는 도리는 없다. 간혹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편으로써, 설화로써 이야기를 지은 것이지 이치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고, 뭔가 배우고 듣고 알려고 하고 하다못해 신문조각이라도 자꾸 들여다 보면서 알려고 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긴다. 차별없는 참사람이 우리 속에 다 있기 때문에 결국은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2) 譬喩
如色及非色이 此二不爲一인달하야
智無智亦然하야 其體各殊異로다
如相與無相과 生死及涅槃이
分別各不同인달하야 智無智如是로다
世界始成立에 無有敗壞相하니
智無智亦然하야 二相非一時로다
如菩薩初心이 不與後心俱인달하야
智無智亦然하야 二心不同時로다
譬如諸識身이 各各無和合인달하야
智無智如是하야 究竟無和合이로다
如阿伽陀藥이 能滅一切毒인달하야
有智亦如是하야 能滅於無智로다
빛과 빛 아닌 것
이 둘이 하나될 수 없나니
지혜와 무지(無智)도 그러하여
그 자체 각각 다르고
모양 있는 것 모양 없는 것
나고 죽는 것과 열반도
차별하여 각각 다르니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고
세계가 처음 생길 적에는
파괴되는 모양 없나니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여
두 모양이 한 때가 아니네
보살의 처음 마음은
나중 마음과 함께하지 않나니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여
두 마음이 동시(同時)아니고
말하자면 모든 식(識)과 몸이
각각 화합하지 않나니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여
끝까지 화합이 없고
마치 '아가타'약이
온갖 독을 멸함과 같이
지혜도 그와 같아서
무지를 능히 멸하느니라
*
비유(譬喩): 법과 비유를 해석하다
*
여색급비색(如色及非色)이: 색과 비색 물질과 물질 아닌 것
차이불위일(此二不爲一)인달하야: 이 두가지는 하나가 아니다. 물질과 물질 아닌 것이 하나가 아니듯이
지무지역연(智無智亦然)하야: 지혜와 지혜없음도 또한 그러해서
기체각수이(其體各殊異)로다: 지혜로운 체와 무지한 체가 각각 다르다.
당연히 다르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그 입장만 가지고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 차별없는 참사람을 회복하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 6바라밀을 닦아야 되고 열심히 정진해야 된다.선정과 지혜를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차별 없는 참사람이 빛을 발휘한다.
*
여상여무상(如相與無相)과: 형상 있는 것과 형상 없는 것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이: 생사와 열반이
분별각부동(分別各不同)인달하야:분별하면 각각 같지 않듯이.
절대세계에 있어서는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다. 생사와 열반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계에서는 생사는 생사이고 열반은 열반이다. 분별해서 각각 다른 것과 같이
지무지여시(智無智如是)로다: 지혜와 지혜없음도 또한 이와 같다.
이리저리 귓전으로 불법을 몇 마디 들은 사람들은 ‘다 그게 그거지’하면서 더이상 알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 젊고 건강한 좋은 인재들인데도 정진을 안하니까 게으름을 피우고 세속적인 것에 팔려서 이 좋은 보물을 두고 눈여겨보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세계시성립(世界始成立)에 : 세계가 처음 성립함에
무유패괴상(無有敗壞相)하니: 무너지는 모습이 없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데 무슨 죽음이 있고, 거기에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이 있겠는가. 나중에 나이들고 7, 80은 되어야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이 있다. 세계가 비로소 막 성립하는 데도 무너지는 모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무지역연(智無智亦然)하야: 지혜와 무지도 또한 그러해서
이상비일시(二相非一時)로다 :두 가지 모습이 일시가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지혜 없는 사람은 지혜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무위진인의 세계에서야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다.그런데 그런 소리도 배워서 하는 소리다.
처음부터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임제록을 보고 ‘이게 맞는 말인가’ 따져보고 사유하고, 다른 조사스님들의 법문과도 비교하고 경전의 말씀과 비교해서 그것이 나의 소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가나오나 무위진인, 무위진인을 말하는 것이지 그냥 처음부터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와 무지의 두 가지 모양은 절대 다르다.
그러므로 스님들은 인연되는 신도님들에게 열심히 가르쳐야 된다. 인연만 되면 무조건 불법을 가르쳐야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분들은 얼마나 가르칠 재료가 많고 소재가 많은가. 지와 무지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일년은 실컷 써먹을 수가 있다.
*
여보살초심(如菩薩初心)이: 예컨대 보살의 초심이
불여후심구(不與後心俱)인달하야: 뒷마음으로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도 있고 열반경에는 ‘발심필경이불별(發心畢竟二不別)’이라고 해서 발심과 마지막에 성불하는 것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는 말도 있다. 초심과 정각은 그 마음이 그 마음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렇지만 발심공덕품을 이야기 할 때는 또한 첫마음인 발심이 어렵다는 말도 몇 번 하였다.
여기는 보살도 초심과 후심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지무지역연(智無智亦然)하야 : 지와 무지도 역연하야
이심부동시(二心不同時)로다 : 두가지 마음이 동시가 아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에 꼭 새겨야 된다. 지혜있는 사람과 지혜 없는 사람,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다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하였다. 오천년 역사에서 경험한 대로 나온 소리다.
지와 무지도 또한 그러해서 이 마음이 같은 것이 아니다.
현대 문명은 또 얼마나 빨리 진화하고 발전하는지 쫓아가기가 힘이 든다. 그래도 쫓아가야한다. 스마트폰도 사서 만져보고 잘 활용하면 그 안에 우리가 공부한 것도 다 들어있고, 신도님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한 것도 다 있고, 천하 명사들의 강의가 다 들어 있다.
앉아서 손가락만 몇 번 누르면 된다.
중국어가 필요하면 중국어,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온갖 어학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런 것을 사용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이다.
지와 무지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컴퓨터를 잘 하는 사람에게 ‘인터넷이 새로 생긴 건데 이것을 아는 것하고 모르는 것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고 물어 본적이 있다.
그랬더니 ‘맹인과 눈뜬 사람의 차이와 같다’ ‘글을 아는 사람과 글을 모르는 사람과 차이가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터넷은 21세기의 최대의 발명품이고 최고의 발명품이다.
최소한도 우리가 그것은 쫓아갈 줄 알아야 된다.
아무리 수행, 수행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오늘은 오늘의 공기를 마셔야 한다.
신라적 공기를 마시려고 해봐야 신라적 공기가 어디 있겠는가. 다 오늘의 공기다.
중 승(僧)자만 머리에 떠올려도 그런 것은 다 알 수가 있다.
중 승자는 사람 인(人) 변에 일찍 증(曾)자를 쓴다. 보통 세상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비여제식신(譬如諸識身)이: 모든 식과 인식. 안이비설신의 할 때 식 그리고 몸뚱이 이것이
각각무화합(各各無和合)인달하야: 각각 화합하지 않듯이
지무지여시(智無智如是)하야 : 지와 무지도 여시하야
구경무화합(究竟無和合)이로다: 구경에 화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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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가타약(如阿伽陀藥)이 : 아가타는 인도에 있는 신비의 약이다. 아가타약이
능멸일체독(能滅一切毒)인달하야: 능히 일체 독을 다 소멸하듯이 이 약만 먹으면 어떤 병도 다 고친다.
유지역여시(有智亦如是)하야 : 지혜 있는 것은 또한 이 아가타약과 같아서
능멸어무지(能滅於無智)로다: 무지를 다 소멸한다.
지혜는 아가타 약과 같이 무지를 다 치료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세도 높고 여러 가지 일들도 바쁘고 먼 거리에 사시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달에 한 번씩 와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지혜가 하나씩 하나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축적이 되어 갈 것이다.
내가 ‘콩나물 법문’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상당히 유명해진 이야기인데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아직 모르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콩나물을 안 키워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콩나물을 키울 때는 물을 하루에 몇 번씩 준다. 그런데 그 물은 번번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 버린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가고 열흘이 가면 콩나물이 자라나서 먹을 때가 된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빠져 나가서 ‘오늘 무슨 공부를 했더라?’‘화엄경 공부했던가, 법화경 공부했던가’ 심지어 그런 것까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설사 그렇더라도, 졸면서 들어도 우리가 공부한 것은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 잠재의식인 제8식까지 다 들어가서 저장이 된다.
콩나물에 물을 부을 때 물은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
법문 들은 것이 다 새나가도 우리의 영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쑥쑥 자란다.
그래서 어디에 가서 한 사람을 대하든 두 사람을 대하든 여러 사람, 백 사람을 대하든 내가 문득 그들을 위해서 설법하려고 하면 미처 자기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 튀어나온다. 어디에서 있던 말들인가? 다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졸면서 들었던 말들이 급할 때 튀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들은 것과 저렇게 들은 것들이 끼워맞춰져서 또 새로운 설명이 거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3) 結
如來無有上이시며 亦無與等者라
一切無能比일새 是故難値遇로다
여래는 위가 없고
같을 이도 없으며
온갖 것이 짝할 이 없나니
그래서 만나기 어렵느니라
*
결(結): 부처님의 덕을 맺어 말하다
*
여래무유상(如來無有上)이시며: 여래는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고
역무여등자(亦無與等者)라: 또한 더불어 같을 이도 없다. 무위진인이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다. 이것은 법당에 있는 부처를 두고 한 소리가 아니다. 석굴암부처님은 조각이 잘 되어 있다고 해서 석굴암 부처님을 보고 한 소리도 아니다. 2600년 전에 열반하신 세존 석가모니를 두고 한 소리도 아니다. 지금 살아있는 부처가 중요한 것이다.
일체무능비(一切無能比)일새 :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가 없다. 차별이 없으며 홀로 독존하기 때문이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이다. 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아무런 차별이 없다.
나라고 하는 그 당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 당체를 아무리 어떤 존재인지 찾으려고 해도 그 형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과도 똑같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다 있다.
천지(天地)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고 만물(萬物)은 여아일체(與我一體)라고 했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고 천지 만물은 전부 나와 한 몸이다.
그런 도리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전부 그런 도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
‘지금 내가 무슨 조건으로 이 말을 듣고 있는가? 말을 듣고 있는 그 당체는 무엇인가?’ 잠깐 몇 초라도 반조를 해보면 그 도리를 금방 알 수 있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이고 전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여래무유상이며 역무여등자며 일체무능비라 일체 능히 비교할 이가 없을새
시고난치우(是故難値遇)로다 : 그런 까닭에 만나기 어렵다.
‘주인공아 내 말을 들어라’‘주인공아’하고 스스로 불러놓고 ‘예’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일이 절집안에 대반사다. ‘주인공아’‘예’‘정신차려라’‘예’ 하고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이 수행자의 일상사이기는 하지만 난치우다. 그것이 사실 가슴에 탁 와 닿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 멀리 있어서 무슨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건 같으면야 오히려 만나기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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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감축드립니다...!!!
무위진인....^*^
거룩하신님들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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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世生生 공부해야 할 華嚴經~~ 너무 좋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혜명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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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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