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8 황희정승 기념관을 가다
자유인은 국교동창생 친구들과 희망산수회에서 주관한 황희정승기념관을 관광 하다.
☛황희정승기념관 위치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85번길3
☛관광코스 : 황희정승기념관-판문점(JSA)-도라산통일전망대-임진각
☛익산출발시간 : 7:00 모현동사무소 신일관광버스 승차
☛익산도착시간 : 21:30 도착
☛황희정승(호 방촌)
황희(黃喜,1363 ∼1452)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으로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그뒤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6조의 판서를 거쳐 세종대에는 18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때 황희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과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세종대의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너그러운 성품과 소신 있는 행동, 청빈한 생활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그의 청빈에 관하여는 몇가지 이설도 있지만. 1452년 90살에 서거하여 세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다.
이곳 '황희선생유적지'에는 방촌기념관 이외에 그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방촌영당'과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던 '반구정'이 있다.
1392년 공양왕과 정몽주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던 황희 선생도 고려가 망하자 다른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 하여 '두문불출'하였다.
동료 선비들의 설득으로 태조 이성계의 청을 받아 들여 두문동을 나올때 그를 떠나 보내며 아쉬움을 표현한 정건천의 시조.
君登靑雲去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고
子望靑山歸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
雲山從此別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淚濕碧羅衣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 구려
황희 선생은 1416년 세자(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고 14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가 이해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진행됨과 아울러 상왕(上王: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으로 소환되고,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아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 선생의 인물됨을 알아 보고 그를 발탁하여 18년간이나 영의정 자리를 맡겨 태평성대를 누리고 황희 정승으로 하여금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받게 하였다.
벌써 물러날 나이 지났건만 벼슬은 그만두지 않고
도당에서 밥만 먹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조용한 여가보아 임금께 여쭈어서
휘날리는 백발로 저 청산이나 대하게 해 주게나.
이 시는 도승지 金公 墩에게 보낸 시라고 한다.
물러 날 때를 스스로 알고 처신하는 것 역시 공직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벌써 물러날 나이 지났건만 벼슬은 그만두지 않고 도당에서 밥만 먹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조용한 여가보아 임금께 여쭈어서 휘날리는 백발로 저 청산이나 대하게 해 주게나.
이 시는 도승지 金公 墩에게 보낸 시라고 한다.
물러 날 때를 스스로 알고 처신하는 것 역시 공직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들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청렴할 렴(廉)자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이 시는 조선조 최고의 명 재상이자 청백리였던 방촌 황희 정승이 남긴 시.
황희정승과 같이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대사간이었던 안성(安省)의 병환이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문병을 갔는데 안타깝게도 안공은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고 한다. 황희정승이 운명중인 안공의 손을 잡고 영결인사를 한다음 이 글귀를 써 주었고 이 시는 안씨의 가승(家乘,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가계를 기록한 책)에 있다고 한다.
위의 시는 모든 공직자들이 꼭 보고 가슴에 깊이 깊이 새겨야 할 선현의 가르침이다. 위의 글귀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황희선생유적지' 방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황희(黃喜)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세종 연간(世宗年間)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긴 명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종(文宗) 2년(145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세조(世祖) 원년(1455)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반구정(伴鷗亭), 앙지대(仰止臺), 경모재(景慕齋)와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의 일이다.
<출처 : 문화재청, 파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