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꾼이다
거실 안 긴 의자와 벽 사이 좁은 공간에 숨죽이고 있는 낚시 가방, 가방 옆에 접혀 있는 낚시 의자도 몇 년째 숙면熟眠중이다. 오늘도 그것들을 보면서 맑은 호숫가에 낚싯대 드리우고 앉아 눈 가늘게 뜨고 어신魚信을 기다리는 꾼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는 꾼이다. 꾼은 낚시터에서보다 낚시 준비에 더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출조일出釣日이 정해지면 먼저 낚시채비를 점검한다. 끝대에 이상이 있는지, 줄의 매듭은 온전한지, 바늘과 목줄, 연추와 찌는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살림망에 구멍이 난 곳은 없는지를 꼼꼼히 점검하여 낚시터에서 낭패를 보는 일이 없도록 준비한다. 이상이 있거나 갖추어야 할 것이 발견될 때에는 미끼를 구하러 낚시가게에 갈 때 보완하기로 한다. 이 차근차근 채비를 점검하는 시간에 공을 들인다. 점검한 채비를 빠짐없이 챙겨 가방에 담아 놓고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을 즐긴다.
꾼들이 출조하는 시간은 새벽이다.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자리에 들지만 쉬 잠이 오지 않는다. 자야지, 자야지 하며 감은 눈앞에 펼쳐지는 잔잔한 수면, 깜박거리던 찌가 곱게 솟아오른다. 손잡이를 감싸고 있던 손이 잽싸게 대를 챈다. 활처럼 휘는 낚싯대를 타고 묵직한 꿈틀거림이 전해온다. 급기야 팔이 떨리고 조금씩 당겨지는 낚싯줄 끝에서 큼직한 붕어가 허연 배를 보이며 좌우로 요동친다. 월척이다! 월척의 꿈을 안고 잠이 든다.
낚시터에 도착하여 동녘 산 위 노을을 뚫고 뻗쳐오르는 햇살을 향해 낚싯줄을 친다. 한 칸 반, 두 칸, 두 칸 반 세 대를 차례로 쳐 찌 높이를 맞춘다. 그러고 나서 떡밥 재료를 꺼내 미끼 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짓이겨 덩어리를 만든다. 이것을 조금씩 떼어 엄지와 중지 사이에 놓고 비벼 콩알 크기의 떡밥을 만든다. 여남은 개 만들어 놓고 짧은 대부터 차례로 쌍바늘에 꿰어 줄을 친다.
한껏 기대를 갖고 찌를 응시한다. 잔잔한 수면에서 가물거리는 찌가 금세 곱게 솟아오를 듯싶은데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찰을 할 수는 없다. 이른 아침과 해거름 녘은 물고기들의 활성도가 가장 높은 때가 아니가.
수초 옆 찌에 깜박깜박 신호가 온다. 한참을 그러더니 다시 잠잠하다. 줄을 걷어 살피니 미끼는 간 곳이 없다. 이놈들이 신경전을 펼 모양이다. 그래 처음부터 물정 모르고 찌를 올리면 그 무슨 맹탕 맛이랴. 아무 낌새도 없던 다른 대들도 줄을 걷는다. 줄 끝에 매달린 하얀 바늘이 이제 막 산 위로 얼굴을 내민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콩알떡밥낚시는 꾼이 예민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줄을 치면 한 순간도 찌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찌가 깜박거릴 때에도, 아무런 신호가 없을 때에도 줄을 걷어 새 미끼를 끼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붕어란 놈들도 소행머리가 제 각각이어선지 어떤 놈은 도둑처럼 몰래 훔쳐 먹고, 어떤 놈은 미끼를 살살 굴려가며 핥아먹고, 어떤 놈은 거죽에서 한 입 베어 먹고는 달아나버린다. 꾼이 바라는 대로 바늘 채 덥석 무는 물정 모르는 놈은 흔치 않다.
해가 동산 위에 올라 잔물결이 선연할 무렵 드디어 입질을 받았다. 잽싸게 대를 채니 손바닥에 전해오는 꿈틀거림이 제법이다. 꾼의 꿈인 월척에는 훨씬 못 미치는 힘이다. 그러나 이 짜릿한 손맛을 즐긴다는 것만으로도 꾼의 가슴엔 파장이 인다. 한동안 이어지던 입질이 거짓말처럼 끊겼다. 붕어란 놈들 아침밥 먹는 시간이 지났지 싶다. 아침밥 대용으로 준비해온 팥빵을 꺼내 먹는다. 빵맛이 참 달다. 살림망에 갇힌 붕어들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맛있는 아침밥을 탐하다가 낚싯바늘에 걸린 놈들이다.
아침밥을 때웠으니 입질 없는 낚싯줄을 걷어 바늘을 받침대에 걸쳐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소화도 시킬 겸 저수지 주변을 산책할 요량이다. 걸으면서 보니 굽이마다 꾼들이 앉아 있다. 짧은 대 하나로 낚시의 맛을 찾고 있는 사람. 여남은 낚싯대를 둥글게 배치해 놓고 눈을 번득이는 사람, 대여섯 대 릴을 던져 놓은 채 버너에 냄비를 올려놓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 차림과 형색이 각양각색이다. 내 낚시 가방에는 릴이 없다. 릴은 어부의 소관이라 믿기 때문이다. 신경전 없이 건져 올린 붕어는 그것이 설령 월척이라 해도 꾼과는 상관이 없을 테니.
해거름 녘 입질을 기다렸으나 동풍이 불어선지 어신이 감감하다. 윗동네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채비를 걷는다. 살림망을 드니 대여섯 마리 중간치 붕어의 푸드득거리는 몸짓이 제법이다. 헛챔질이 태반이 듯 빈 살림망일 때도 허다한데 이 정도면 됐지 싶다.
콩알떡밥낚시로 일관하며 맑고 찬찬한 수면에 매료되어 지낸 40여년의 조력釣歷. 어느 때부턴가 저수지는 가축 오물에, 수로는 농약에 오염되어 갈 곳이 점차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낚시터가 약수터 찾기보다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내 몸이 물가에 나가는 일을 선뜻 허락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꾼이다. 거실에 낚시가방이 놓여 있는 한 나는 꾼이다.
첫댓글 선생님은 꾼이 맞으세요. 아직도 낚시의 재미를 잊지 못하시고 작품을 낚으시는 걸 보면요. 훌륭하신 꾼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