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견 서
(이애주 국회의원실에서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절 지원 관련 자료를 요청함에 따라 상담소에서 담당비서관과 통화 후 의견서를 작성하여 발송하였습니다.)
귀 의원실의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절 지원 관련 자료 요청에 대하여 본 상담소의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 중절 지원의 양상
본 상담소로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에 대해 상담 요청이 들어오면 우선 피해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내담자의 요구사항을 확인합니다. 임신 중절 지원을 요청할 경우 거주지가 상담소 인근 지역인지 확인한 후 면접 상담을 권유하고 진행합니다. 상담원과 내담자와의 1대1 면접 상담을 통해 피해 일시, 피해 내용, 가해자와의 관계 등 피해 당시 및 이후의 대응 상황과 임신 주수, 임신 파악 시기 및 방법 등 임신 진행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합니다.
임신 중절 지원 여부는 면접 상담을 진행한 상담원이 판단하기에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을 경우 대부분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며, 간혹 상담소 내부 논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피해자에게 경제적 능력과 지지적인 인적 자원이 있는 경우 피해자의 요구에 맞추어 성폭력 전담 의료 기관을 안내하고 상담사실 확인서 발급 등을 통해 임신 중절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합니다. 이 때 소요되는 의료비는 피해자 본인이 부담합니다.
피해자에게 경제적 능력과 지지적인 인적 자원이 없는 경우 성폭력 전담 의료 기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상담사실 확인서 발급 등을 통해 임신 중절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한 뒤 상담소에서 의료비를 지원합니다. 이때에도 피해자의 소득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일단 피해자가 의료비를 개인 지출한 뒤 상담소에서 예산 수령 시기에 사후 지원 하는 경우가 있고, 아예 상담소에서 의료 기관에 요청하여 우선 의료 조치를 시행한 뒤 상담소 예산 수령 시기에 상담소에서 의료 기관에 직접 사후 수납하는 경우로 나뉩니다.
의료비는 매 분기별 혹은 월별로 각 상담소에서 지자체에 신청한 액수를 근거로 하여 지자체에 배당된 예산에 따라 비율이 조정되어 지급되며, 때문에 내담자가 의료비 지원을 요청하는 시기에 맞추어 지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후 지원이 기본이며 수령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2-3개월 정도) 액수 자체도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2. 낙태 고발 사태 이후 성폭력 상담 현장에서 겪는 임신 중절 지원의 어려움
낙태 고발 사태로 인해 산부인과들이 임신 중절 수술에 대해 전반적으로 위축됨에 따라 합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강간 피해에 대한 임신 중절 역시 수술이 가능한 의료 기관을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여성가족부에서 성폭력 전담 의료 기관으로 지정한 병원들에서 조차 ① 병원장 개인 신념에 따라 중절 수술 지원은 하지 않는다거나 ② 임신의 초기 단계 (10주, 3개월 등 기준은 병원마다 천차만별)에 한해서만 중절 수술을 한다거나 ③ 법적 미성년자는 보호자의 동의와 동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등 각종 이유를 들어 중절 수술을 거부하는 사례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관련 법령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 기피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으며, 상담소의 문의 전화조차 경계하며 상담사실 확인서 발급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으니 경찰 신고 후 상담원과 형사 동행 하에 내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힘들게 임신 중절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더라도 이전에 비해 확연히 증가한 수술비도 만만치 않은 요소입니다. 강간에 의한 임신 중절은 낙태 고발 사태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보장되어 있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시류를 타고 금액이 많게는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장 수술이 급한 피해자와 상담 지원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비용 부담을 안고 중절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나마 몇 군데 되지 않는 전담 의료기관 중 피해자에게 접근이 용이한 병원을 연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정부에서 관리하는 원스톱 지원센터로 바로 연계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형사 고소가 접수되어 어느 정도 수사가 진행된 사건에 한하여 임신 중절 지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낙태 고발 사태 이후 성폭력 피해를 가장하여 임신 중절 지원을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원스톱 지원센터를 방문한 성폭력 피해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소를 꺼리고 있으니 원스톱 지원센터 대신 본 상담소에서 타 의료 기관에 요청하여 임신 중절 지원을 할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임신중절조치가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렇듯 갖은 이유로 인해 의료지원이 늦춰지는 것입니다. 임신 중절이 가능한 시기에 이미 어느 정도 고소 절차가 진행된 상태여야 한다는 조건은 어찌 보면 사건 직후의 빠른 대처가 이루어져야 성립 가능한 것이며 이럴 경우 사후 피임약 등의 의료적인 조치를 이미 취했을 가능성 역시 높아집니다. 결국 사건 직후 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못해서 임신 중절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해당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기관에서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내거는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 상담소에 지원되는 의료비 예산을 축소하고 대신 원스톱 지원센터 연계를 통한 의료 지원을 권장하고 있는 현 정부의 최근 정책 방향을 볼 때 과연
앞으로 성폭력 피해로 인해 임신 중절이 필요한 내담자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임신 중절 지원에 관한 본 상담소의 입장
현재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임신 중절 지원이 난항을 겪는 현상 밑바탕에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를 힐난하고 의심하는 사고방식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예방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피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후 조치를 취하고 피해자에게 필요한 자원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지원받을 만한 성폭력 피해자의 기준’을 재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기준을 ‘법’에 근거하여 법이 인정하는 성폭력만을 지원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폭력은 성폭력 가해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피해자가 감당해야하는 몫이 아니라는 원칙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관련 정책을 논하고 실행하는 주체들의 주된 관심사가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성폭력 피해를 예방하고 최소화하는 것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를 겪은 뒤 주위에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신고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구조적으로 인식해야합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알리기 어렵고 피해에 대한 적절한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은 피해자를 위축되게 만들고 소극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해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결부되어 낙태 사안을 개별 여성의 도덕성 문제로 몰아가는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임신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 여성에게 지우고서 그 과정에서 여성이 임신 중절을 선택했을 때 이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는 눈 감은 채 윤리의 잣대를 들어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와 제도가 공고한 이상, 낙태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에 대한 정책의 변화 없이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임신 중절 지원책 역시 계속해서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낙태 고발을 자행한
프로라이프 의사회 대변인은 당시 한 TV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강간으로 인한 임신 역시 낙태하지 말고 출산해야한다
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임신 중절 수술을 범죄화함으로써 의료기관의 수술 지원 거부나 위험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상황을 만들고, 이로 인해 피해자를 상담하는 상담소나 원스톱 지원센터에서는 우선 내담자를 의심을 갖고 대하게 하는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신 중절 지원에 대한 기준 설정은 자칫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에 악용될 소지가 있기에 우려됩니다. 다양한 상황과 맥락 하에 발생하는 성폭력 피해를 단일하게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사실상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중절에 대한 제반 규정에 그 어떤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없던 기준을 새롭게 만들어 적용하는 것은 결국 피해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덧씌우는 역할만 하게 될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지원을 요청하는 내담자에게 피해 내용을 파악하고 요구사항을 확인하는 것은 현재 성폭력 상담 지원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입니다.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그 밖에 어떤 기준이 더 필요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야기하는 것은 낙태 고발 사태로 인하여 임신 중절 수술에 대한 위축된 사회적 분위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란을 가중시키는 핵심에는 현실과 괴리된 정책과 법안이 존재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보다 원활한 임신 중절 지원을 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은 가이드라인 등의 기준 설정이 아니라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의 변화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수정입니다.
여성인권을 위해 힘쓰시는 귀 의원실에서 부디 여성의 현실을 반영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입안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첫댓글 내 자궁은 국가의 소유입니다. 저출산이 해결될 때까지 나의 성(sex)은 노예입니다.
상담소에 문의하는 피해자이면 뭘 더 물을 수 있겠습니까?? 전화를 건 용기까지 개인이 엄청난 고통을 동반 했을건데...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