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해먹는 좋아하는 비빕밥이 있습니다. 순두부를 넣고 김치를 썰어 놓고, 고추장하고, 들기름을 넣고 비벼서 먹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저는 그렇게 밥을 먹기 위해서 순두를 하나 샀습니다. 산 순두를 데워야 합니다. 어떻게 데울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비닐 봉지 통째로 넣고 데울까, 아니면 비닐 봉지를 뱃겨 내고 데울까? 어떻게 데우는 것이 정답입니까?
저는 고민을 많이 하다가, 이런 일이 고민하지 않으면 세상에 고민할 일이 있나요? 비닐 봉지를 배겨서 데우기로 했습니다. 냄비를 넣고 조심스럽게 봉지를 위 부분을 잘랐습니다. 가위를 대는 순간 힌 물들이 죽 흘렀습니다. 그리고 순두부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상했잖아, 어떻게 이런 것을 팔어” 씩씩 있었습니다. 갑자기 먹을 밥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봉지를 건저서 버리려고 보는 순간 이상 했습니다. 그림이 이상했습니다. 그림에 임산부가 잘라서 입에 대고 마시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순두부가 아니라 순 우유(였던 것입니다.
다 나이 먹어서 그렇습니다. 나이 먹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막말을......,
나이 감이 덜어집니다. 감으로 살지말고 잘 보고 움직이며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를 아십니까? 우물 안에서만 살다 보니 다른 세상은 있는지 모르고 자기가 본 그것만이 모두 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요. 자기 주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독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라든지, 내가 알 고 있는 아주 작은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라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이 말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부류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삶의 실수의 한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우물은 무엇입니까? 없습니까? 아닙니다.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러분의 자기 독선입니다. 우리는 순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것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 삶을 기준으로,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배운 것, 내가 느낀 것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같이 나누겠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지라
사도 바울은 지금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그러는 가운데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고 그 속에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음을 봅니다. 9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10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에 이미 익숙해 있습니다. 익숙해 졌있다는 것은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동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행하는 그런 일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처음입니다.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입을 다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들이 가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열어 두어야 합니다.
신들이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을 사람들이 했다고 하면 이것은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신의 개념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알고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 있으면, 새로운 일이 있으면 모른다고 하고, 새로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배우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대충 이야하지요. 이 일을 보면 분명 신이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이 땅에 내려왔다고 단정합니다. 11절입니다. 같이 봅니다.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그리고도 자신의 생각대로 이렇게 합니다. 12절입니다.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 하면서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에서 신으로 격상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고 자신도 사람이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14절,15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매개로 인하여 일어난 일을 내가 행동한 일에 대하여 찬사가 일어날 때에 우리는 입 다물고 쉽습니다. 그리고 그 찬사 속에 파 묻혀 지내고 싶습니다.
내 손을 통하여, 나의 행동을 통하여, 내가 투자한 시간을 통하여, 내가 헌금한 것을 통하여 무엇인가 나타난다 내가 한 것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요즘 조금한 일의 성취를 가지고 세상을 요란하게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이 행한 아주 작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열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이룬 사람처럼......., 세상에서 나 같은 사람 없는 것처럼......, 그렇게 힘쓰며 살아가지요.
혹시 내 손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무엇인가 작은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그것에 사람들의 칭찬이나, 격려나 함성이나, 영웅으로 회자 된다면 더욱 처절하게 우리의 마음을 찢으며, 더욱 겸손히 하나님이 하셨음을 나타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향하여, 세상을 외쳐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한 건하고 영웅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나 같은 사람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잘 모르는 그들은 나를 칭찬하고, 나를 찬양하고, 나를 위대한 사람의 반열에 올려놓지만, 알고 있는 우리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조용히 눈 감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에 기초해서, 경험한 것에 기초해서 살아갑니다.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지금 루스드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문화가 만들어 낸 신화를 자신의 종교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15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여러분들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합니까? 이런 일은 헛된 일입니다. 잘 못된 일입니다. 버리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던 삶의 방법들, 우리 인생의 개똥철학들, 혹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삶과 정 반대의 것들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잘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버리십시오. 버리십시오. 내 관점을 버리십시오. 내 생각을 버리십시오. 내 경험을 버리십시오. 내 전통을 버리십시오. 이런 것들을 몸부침 치셔야 합니다. 꿈 속에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에 휘 감겨드는 꿈을 꾸실 것입니다.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꼭 잡고 놓지 않는 꿈을 꿉니다. 도망가야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몸부림을 칩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떨쳐 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익숙한 것이지에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의 우물을 깨치고 나오십시오. 더 높아지기 전에, 아주 갖히기 전에......,
지금의 여러분의 생각에서 나오십시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
세상의 모든 것은 만든 사람이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고 사용할 수있습니다. 그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 온다는 것은 이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우리를 만드신 그 분 앞에 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듣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서 우리는 스스로 가두고 있던 내 자신의 우물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갑니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어떤 일을 볼 때마다 뛰어 나오는 내 삶의 방법들......, 버리십시오. 거기서 나오는 방법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진정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시겠죠?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하사
그러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선한 일을 하십니다. 17절입니다.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삶의 결실로 만족하십니까? 기쁨을 누리십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세상의 원리를 바로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으로 나오십시오. 진리가 여러분의 눈을 열어 내가 가야할, 판단해야할 진리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