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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늘은 무슨 빛이었길래 당신의 바람은 어디로 불었길래 당신의 별들은 무엇을 말했길래 당신의 시들이 이토록 숨을 쉬나요 밤새워 고통으로 새벽을 맞으며 그리움에 멍든 바람 고향으로 달려갈 때 당신은 먼 하늘 차디찬 냉기속에 당신의 숨결을 거두어야 했나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당신은 차라리 아름다운 영혼의 빛깔이어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왔던 당신은 차라리 차라리 아름다운 생명의 빛깔이어라 |
11시 20분 경 윤동주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로 이동했다.
대성중학교는 은진, 대성, 광명, 동흥, 명동, 정동 등 6개 학교를 통합하여 7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로 현재 용정제일중학교(龍井第一中學校)로 재학생이 3,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윤동주는 광명중학교 출신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교내 곳곳의 기념관에는 친필 서시와 많은 작품 등이 전시가 되어 있었다.
민족과 국가의 돌립을 위해 머언 이국 만리 북간도의 용정에는 1906년에 이상설(李相卨)이 동포들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 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특히 항일 민족 교육에 초점을 두었다고 해설사의 설명이다.
이후 서전서숙에서 시작된 많은 교육기관들이 생기겨 되었다는 해설가의 단아한 모습과 어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헌금봉투에 헌금을 넣어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고, 12시 20분 경 대성중학교를 나와 12시 30분 ‘청주 돌솥밥’식당에서 허기를 때우고 백두산 산행을 위해 이도백하(二道白河)로 향했다.
이동 도중, 용정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해란강(海蘭江)을 건너면서 저멀리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송정은 원래 한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정자(亭子)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1938년 일본인이 고춧가루를 뿌려 고사된 후, 그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도 살지를 못해 일송정 자리에 지금의 정자를 세우고, 그 옆에 1991년 용정시민정부에서 백두산에서 옮겨온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해란강은 해란들의 젖줄이며, 박경리선생의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한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창밖엔 비는 그쳤고, 일송정과 해란강을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선구자(先驅者) 한 구절을 흥얼거려 본다. 원래 가곡 선구자는“용정의 노래”였는데 후에 '선구자'로 바뀌었단다.
이일송정 푸우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하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서언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기입퍼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드얼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서언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기입퍼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기입퍼었나아.
1930년대는 일본군들이 최고로 악랄한 행위를 하던 살벌한 시기로 우리 가곡 先驅者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나라를 빼앗겨 암울하던 시대에 굶주리며 살을 에는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맞으며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하나로 외롭고 처절한 독립투쟁을 해오다 죽어간 이름 모를 독립군들에게, 살아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독립군들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先驅者의 가사가 주는 의미는 너무도 크나큰 용기와 자긍심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세정 벌과 평강 벌(두 평야는 쌀 곡창지대로 중국의 VVIP도 이곳에서 생산 된 쌀을 잡숬는데요)을 지나 백두산의 관문인 이도백하(二道白河)에 16시 반경에 도착했다.
이도백하(二度白河)
해발 800m에 위치한 백두산 아래 있는 작은 소도시이다. 백두산을 가려면 무조건 이 도시를 거쳐야 한다.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도 하고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도백하는 백하(白河)라는 이름이 더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두 백하(白河)라고 하는데 하천이 너무 많다보니, 순번을 부여해 一度, 二度, 三度.五道. 十九道 등으로 부른다. 백하는 이도백하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백두산의 모든 시내를 뜻하기도 한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며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약 1km)인 마을과 함께 백두산 관광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리 버스와 열차가 오갈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의 숙소나 식당이 많아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지프차를 빌리거나 관광버스를 탈 수도 있어서, 백두산 관광 성수기인 6~9월에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마을 곳곳에서 보이는 미인송(美人松)도 이도백하의 명물이다. 미인송은 우리나라의 적송(赤松)과 모습이 유사했는데 성장초기에는 곁가지가 많고 껍질이 검은 색을 띄지만 자라면서 곁가지가 자동적으로 탈락을 하고 껍질도 바알갛게 변해 곁가지 없이 아주 키가 큰 소나무라 미인송이라고 한다.
신달(信達)호텔에 짐을 풀고, 발 맛사지로 피로를 풀었다.
8월16일(목), 셋째 날
기상시간보다 30분 먼저 04시 정각에 일어났다.
바깥은 이른 시간답지 않게 많이 밝아 있었고, 새벽안개가 두꺼운 속살을 짙게 드리운 체, 이도백하의 모든 것을 감싸고 있었다.
04시 30분이 되자 많은 회원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이고 모두가 오늘의 날씨 걱정이다.
트레킹 조 41명은 날씨와 상관없이 일단 북파산문까지는 무조건 출발하기로 일정이 잡혀있어 04시30분에 기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오늘은 이도백하 지역에 비는 오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그래도 하루에도 102번 날씨가 변하는 것이 백두산 천지라며 날씨는 천지신명께 맡기란다.
간단하게 조식을 끝내고 06시 정각에 1호차로 출발준비를 마쳤다.
관광조의 배웅을 뒤로 하며, 트레킹조를 태운 버스는 어느듯 울창한 산림속을 달리고 있었고, 중천의 태양은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겁게 억누르고 있던 새벽의 짙은 안개가 그사이 어디론 사라졌는지 지금 눈앞의 날씨는 완연한 가을 날씨다.
모든 회원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웃음꽃이...
가이드 왈, 이렇게 좋은 날씨는 일년에 찾아보기 힘들다며 이런 날씨라면 무조건 천지를 구경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란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의 뜻 헤아려 주셔서 감사 감사드립니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중국쪽에서 남파,서파,북파가 있으며, 북한쪽에서 동파가 있다.
파(坡)는 중국말로 “언덕”이란 뜻이다.
50여분을 달려 07시 정각에 북파산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입구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크게 간판이 붙어 있었다.
입구주위는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고 산문입구 역시 지은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모습이 최근에 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입구는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대부분이 한국관광객과 중국관광객들이다.
중국관광객들의 경우, 어렵게 천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백두산은 명산으로 더욱이 천지를 보지 못할 경우엔 며칠씩 이곳에 머물기도 한단다.
왜? 우리의 백두산이 중국의 장백산인가?
우리의 조상들이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목숨걸고 지켰던 이 아름다운 백두산을 왜? 중국의 장백산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만감이 교차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 내가 따질 문제가 아니다.
어렵사리 자리를 만들어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산악가이드를 만나 트레킹에 대한 일정을 논의하고, 일단 트레킹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13시까지 다시 이곳에 도착하여 관광조와 조우하는 일정으로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왕복 5시간의 트레킹은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니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전문 산악인도 아닌 일반인인 우리 회원들의 체력문제가 걱정이 된다.
07시 10분 산문입구를 통과해서 다시 환경보호차로 폭포 주차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입장권을 받아드니 門票(문표)로 기재가 되어 있었고, 입장료는 125 이옌이다.
중국인은 이보다 많이 훨씬 싸다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동시 마다 환경보호차로 움직이는데 차비가 85이엔이다.
이곳 백두산은 환경보호차와 빵차를 이용하지 않고는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산문입구에서 소천지, 온천지대 일대에는 환경보호차가 움직이고, 천지구간은 10인승 빵차가 움직인단다.
환경보호차는 매연과 소음이 거의 없어서 붙여진 이름 같다.
산문입구를 들어와서도 북적이는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보호차를 탑승하기위해 30분을 기다리다가 07시 40분에 탑승을 해서, 07시55분에 소천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소천지 주차장으로 이동 중 멀리 비룡폭포(중국에서는 장백폭포 라 칭함)의 힘찬 물줄기를 잠시 볼 수가 있었다.
소천지 주차장에서 남해사람들을 만나다!
소천지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다시 폭포주차장으로 이동하기위해 환경보호차를 기다리는데 나이들이 지긋하게 보이는 몇몇 어르신들을 만났다.
“어디서 오셨냐?고 했더니 남해에서 오셨단다.
우리도 남해에서 왔다고 했더니 반가워하며 남해사람들이 참 잘 생겼단다.
남해고현면 이어리 주민들 18명이 어제 저녁 천문봉 정상에 올라 그곳에서 자고 아침에 천지 구경을 하고 지금 내려가는 중이란다.
어제 천지에서 별을 봤고 아침에 천지를 보았다니 우리도 천지를 보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가벼워 졌다.
어떤 배경이 있길래 천지 정상에서 1박을 하시다니? 부럽기도 하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인솔자이신 박ㅇㅇ씨가 인사를 한다.
이번에 출마하는 고향사람 잘 봐 달라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잠시의 만남을 뒤로하고 폭포주차장에 도착하여 08시20분부터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발아래로 천지에서 달문을 통해 비룡폭포를 거친 천지수(天池水)가 힘차게 흐르며 냉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들머리로 들어서자마자 녹색 자켓을 입은 미행자가 따라 붙었다.
순간 산악가이드가 긴장을 한다.
일단 소천지까지 올랐는데 그 미행자가 계속 따라 붙자 산악가이드는 소천지를 구경하려 온 것 처럼 잠시 머물다가 다시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소천지(小天池)!
작은 천지라는 뜻인 것 같다.백두산 정상의 천지가 천지로 불리고 이 조그마한 소가 소천지라고 부른다.
옆 표지석에는 은환호(銀環湖)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방으로 푸른 숲이 병풍처럼 에워 싸 있어서 물빛인지 숲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오면서 미행자를 따 돌리고 트레킹 코스가 아닌 산악가이드들만이 알고 있는 숲길을 들어섰다.
예전부터 종종 이 코스를 이용하는지 인적이 스치고 지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산나물과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완만한 숲길을 20분 정도 지나니 가파른 경사가 앞을 막는다.
자작나무의 군락지대를 지나 09시5분경 처음으로 단체휴식을 취했다.
저 멀리 눈 아래로 하얀 구름이 길게 띠를 만들고 누어 있었고, 그 아래의 자연은 모두 잠에 빠져 있는 양 움직임 없이 평온한 모습이다.
간단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이제부터는 눈 움직임이 빨라질 시간이다.
여기저기서 자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담기가 바쁘다.
인간인 우리가 이 대자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비하면 얼마나 작디작은 미물인가를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비룡폭포의 전망대에서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고, 눈앞에 펼쳐지는 대평원의 아름다운 모습과 저 멀리 길게 이어져 흘려 내려오는 옥계폭포의 하얀 치마의 여유로운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발밑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야생 블루베리를 따 먹으면서 일행은 어느 듯 마지막 새우등 능선을 지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용문봉(2,596m)과 녹명봉(2,603m)사이의 대평원과 옥계폭포와 왼쪽으로는 철벽봉(2,550m)과 화구벽의 장엄한 모습과 승사하 계곡위의 기상천외한 여러 조형물을 바라보면서 대자연의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을 표현하지 못한 체, 연신 아,우,와 , 표현할 수 없는 감탄사만 뱉어 내면서 천지를 향해서 발길을 옮겼다.
새우등 능선과 돌너덜을 지나, 용문봉의 날카로운 턱밑에, 저 건너 철벽봉의 철벽아래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그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산행시작 2시간 30분, 10시50분 용문봉(2,595m)기슭에서 천지를 보다!
용문봉쪽에서 바라 본 천지는 천지와 천지주변 그리고 하늘이 어느부분 한군데도 섞이지 아니한 완연한 삼원색(三原色)을 띠고 있었다.
천지주위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는 시계(視界) 100%의 완벽한 날씨다.
모두들 엎드려 큰절을 하고, 어떤 이는 오징어 포 앞에 놓고 소주한잔 따라놓은 체,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 오른 감회를 마음껏 누렸다.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통제가 가능하여 단체사진 촬영을 했다.
단체사진 촬영 시 산악회의 플래카드를 펼쳤더니 옆에서 근무 중이던 경비병 2명이 순간적으로 저지를 한다.
그래도 처음 촬영 때 경비병이 눈치를 차리지 못해 한 컷 낚아 놓은 게 다행이었다.
이들은 사진 촬영 시 글자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을 거치하지 못하게 한다.
왜일까? 동북공정?
그들은 티벳공원부터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자기네 영토임을 주장하기 위해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한국고대사도 중국역사에 편입하려는 의도로, 훗날 우리가 그들에게 이곳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그들만의 주장이지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있다.
‘백두산은 한국 땅이다’라는 피켓을 놓고 찍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트레킹 코스가 원래 달문을 내려가서 천지 물가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조선인 산악가이드가 중도에서 포기를 하여 같이 동행을 하지 못하여 정상 길목에서 버티고 있는 경비병과 현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 하고, 그들의 일방적인 통행료 요구로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천지 물가에 내려가 발목이 시리도록 발 담그고, 목청껏 소리높이 애국가를 부르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해 많은 회한을 남긴 체, ‘동해물가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조용히 불렀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백두산천지를 아쉽게 뒤로 하며,11시40분 정상을 출발 했다.
13시에 관광팀과 소천지에서 조우하기로 되어 있어 하산 길은 서둘려야 될 것 같다.
하지만, 하산 길 또한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지천으로 널려있는 야생 블루베리가 발목을 자꾸 잡는다, 아래에서는 왜?빨리 내려오지 않냐고 발발이 전화가 오는데...
약속시간보다 30분 늦은 13시30분 소천지 주차장에 도착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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