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2편 강해 / 이레교회 새벽기도회 20111012 水曜日 정인준 목사]
사도신경 찬송가 328(374)장 ‘너 주의 사람아 헛된 일 버리고…’
통성 기도(3분) 말씀 봉독(시편 52:1-9), 설교(15분),
◈ 시편 52편은 ‘악인의 운명’에 관한 내용을 다룬 시입니다.
표제에 소개된 바와 같이,
역사적 상황은 사무엘상 21장과 22장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피신하여
자기 부하들과 더불어 ‘거룩한 떡’(진설병)을 얻어먹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왕에게 그 일을 고발하였습니다.
이 밀고자 때문에 아히멜렉을 비롯한 85명의 제사장이 죽임 당했습니다.
그 사형 집행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도 바로 밀고자 ‘도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시를 통해 도엑을 포악한 자, 간사한 자로 그려냅니다.
◈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포악한 자여”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용감한 자’, ‘힘센 자’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그 힘과 용기가 잘못 사용되었음을 2-4절이 말씀합니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아마도 용사였을 도엑은, 그 ‘혀’로 인해 범죄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이 아히멜렉과 함께 있었던 사실을 고발하였습니다.
자기의 말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그 혀를 함부로 놀렸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연 그의 혀는 ‘간사’함을 드러내는 혀가 되었으며,
날카로운 칼과 같이 다른 사람을 찌르는 혀가 되었습니다.
4절의 ‘간사한 혀’라는 말은 ‘악한 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과격하고 조급하고 완악한 말’을 ‘간사한 혀’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잠언 1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29장 20절도 말씀합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말라기 3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과격하고 조급하고 완악한 말’을 함부로 하는 ‘간사한 혀’!
문제는 이 혀가 도엑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이러한 ‘간사한 혀’가 발견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떤 동기로 합니까?
우리 혀가 남을 찌르는 비수, 남을 해치는 독이 된 적은 없습니까?
야고보서 3장 8절은 말씀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전도서 5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8-9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우리 입술에 하나님께 감사함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고백만이 가득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