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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균 (주)동명에이젼시 대표이사 | 유전무죄냐 무전유죄냐가 우리사회에 회자된지도 오래됐다. 이 말의 근원은 돈 많은 기업가와 부자 고관대작들이 거물급 전관 변호사를 선임해 피고인이 저지른 죄질에 비해 선고형량이 가볍거나 무죄를 받는것에서 연유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회장은 거액의 벌금을 내지 않고 뉴질랜드로 도피한 뒤 호화생활 의혹까지 받고있다. 그런데 허 회장이 3월에 귀국해 미납된 벌금대신 몸으로 때우는 노역(勞役)을 선택함으로써 사법부가 유전무죄(有錢無罪) 논란에 휩싸였다. ‘황제노역’은 검찰이 여론과 국민들의 거센 비난 속에 허 전 회장의 노역을 중단하고 벌금을 징수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막을 내렸다.
사건은 허 전 회장이 2007년 500억 원 탈세와 회사공금 100억 원 횡령사건으로 기소돼 2011년 12월에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254억 원이 확정됐다.
허 전 회장은 2010년 항소심 선고직후 출국해 확정판결일로부터 30일 내에 납부해야하는 벌금형 집행을 피해왔다. 문제는 항소심 담당재판부인 광주고법 형사1부는 형법에 의거 254억 원의 환형유치(換刑留置)를 명하면서 ‘유치기간 50일’을 동시 선고한 사실이다. 그것도 203일 동안 강제 노역을 처분한 1심 때보다 일당은 2배로 높이면서 벌금을 절반으로 깎아준 것이었다. 노역장 유치기간은 최고 3년이며 기존 판례도 이러한 경우는 최장기간의 5분의 1일 정도가 선고되어 왔음에도 법 상식에 비춰볼 때 ‘원님재판’ 과 ‘황제노역’ 으로 비치면서 사법신뢰 추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허 전 회장의 경우 이것을 일당으로 환산하면 5억 원이 된다. 한 예로 북한인권단체 회원인 K씨는 서울 종로구 옥인교회 앞에서 탈북자 북송 반대농성을 벌이다 공무집행방해죄로 4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돈을 내지 못한 그는 일당 5만 원으로 환산해 80일간 노역장 유치처분을 받기로 하고 1월 서울 남부구치소에 수감됐다.
일반 서민들의 노역 일당은 5만 원이 90%이상이다. 허 전 회장은 노역장에서 하루 8시간 일한다고 가정하면 시급 6천250만 원이 된다. 2008년 벌금 1천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 벌금을 내지 않았을 경우 노역 일당은 1억1천만 원이었음을 고려할 때 사법신뢰를 훼손하는 판결이다. 기업 관련 범죄의 특성을 아무리 고려하더라도 국민 억장이 무너지게 할 ‘최고액 일당(日當) 계산’이다. 허 전 회장과 K씨의 형집행과정을 보면서 국민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수 없다.
노역 일당은 법관의 재량으로 결정된다. 매년 벌금 납부 대신 노역을 선택하는 서민이 3만 명을 넘는다. 5억 원 일당은 보통사람들의 일당과 비교할 때 서민 일당의 1만 배에 해당해 너무 불공평하다. 최근 대법원은 벌금 액수에 따라 노역 일당의 상한선 가이드라인을 밝혔지만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허 전 회장을 재판한 1, 2심 재판장이 모두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근무한 향판(鄕判)이어서 초고액 일당을 바라보는 국민은 향판과 지역 기업인의 관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시쳇말로 허 전 회장이야 법에 따라 노역으로 대신하려 했다고 하겠지만, 국민은 사법부에서 발원된 법치 허무주의의 대가를 계속 치러 나가야 한다. 사법부는 이제라도 일당 5억 원 노역의 전후를 냉철히 규명해 국민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과 함께 재발방지책도 내놓기 바란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게 적용돼 비록 죗값을 치루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다.
법치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법원과 검찰은, 법을 악용한 허 전회장의 행태가 비정상이라면 법원과 검찰이 머리를 맞대고 환형유치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국회도 이번일을 계기로 법률을 다시 만들던지 바꾸던지 해야 할 것이다. 일당 5억 원 노역을 허용한 검찰과 법원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허씨의 파렴치만 부각되는 이러한 경우는 우리 사회 공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여론의 비난 속에 이 사건 담당재판장이었던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이 사표를 냈지만 한 사람의 사표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먼저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