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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등반의 관건은 캠프 3까지의 물량 수송이야!
일단 거기까지 시신 수습에 필요한 모든 물량들을 데포(보관) 시켜놓기만 하면 우리의 준비는 끝나는 거야.
그 다음엔 날씨가 문제지. 날씨만 도와준다면야 이틀 안에 해치울 수도 있어!"
얼핏 듣기에 그것은 단순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신 수습에 필요한 모든 물량'이라는 것은 도대체 얼마만 한 부피와 중량을 지녔을까?
일반적인 등반자의 경우 캠프 3를 떠나 정상으로 향할 때 배낭에 넣고 가는 산소통은 2개다.
다소 빠듯한 분량이지만 중량 때문에 그 이상을 지고 갈 수는 없다.
등반자가 정상에 머무는 시간은 보통 30분 내외.
하지만 우리는 정상 바로 밑에서 시신 수습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예상한 소요 시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이틀이다.
덕분에 우리가 캠프 3까지 운반하여 데포시켜놓아야 할 산소통의 숫자는 무려 140개였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등반자라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산소통 5개 이상을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캠프 2에서 캠프 3까지 최소한 28회를 오르내려야 되다는 것을 뜻한다.
캠프 3이 위치해 있는 8300미터는 웬만한 8000미터급의 산의 정상보다 높다.
초모랑마의 정상 부근에는 가파른 암벽 구간이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
이른바 퍼스트스텝, 세컨드스텝, 서드스텝이다.
우리는 이 구간에 '우리만의' 고정 자일을 깔기로 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상업 원정대의 고정 자일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오려면 고정 자일이 심하게 마모될 것이 뻔했고,
우리의 작업 때문에 다른 원정대의 통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가 캠프 3에 데포시켜놓아야 할 고정 자일의 총연장은 무려 4킬로미터에 달했다.
이 밖에도 텐트와 식량과 등반 장비들이 있다.
캠프 3을 설치하려면 당연히 그전에 캠프 2에 도달해야 되고,
캠프 2를 설치하려면 당연히 그전에 캠프 1을 건설해야 된다.
보통의 등반자가 처음 ABC에서 노스콜까지 오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다섯 시간.
노스콜 직전에 절망적으로 솟아 있는 거대한 빙설벽을 오르고 나면 대부분의 등반자는 파김치가 되어 쓰러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신 수습에 필요한 모든 물량'을 8300미터까지 끌어올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몇 번이나 그곳에 올라야 되는 것일까?
ABC의 매니저로서 이 모든 물량 수송 작전을 총지휘한 정오승은 간단하게 답해준다.
"계산도 하지 말랑께! 머리만 아퍼... 어여 이거나 지고 올라가!"
우리는 배낭을 지고 일어섰다.
미련곰탱이처럼 보이는 우모복을 입고, 묵직한 이중화 밑에는 14발 아이젠을 차고,
안전벨트에는 마치 전기수리공처럼 주렁주렁 등반 장비들을 매달고,
한 손에는 피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주마를 쥔 채,
그 막막해 보이는 노스콜의 빙설벽에 달라붙은 것이다.
주마링을 하다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잠시 멈추어 서서 쉴라치면
발아래 보이는 빙설벽이 너무도 가팔라서 거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포감도 중독이 되는 모양이다.
숨을 고르고 나면 우리는 또 기계인형처럼 주마링을 하며 코앞의 빙설벽에 달라붙는다.
그 벽을 넘어서면 곧바로 노스콜의 캠프사이트다.
우리는 마치 등짐을 지고 오른 막노동꾼처럼 배낭을 벗어놓자마자 그대로 얼음 위에 드러누워 뻗어버린다.
하지만 빤히 올려다 보이는 초모랑마의 정상을 감상할 여유도 없다.
우리는 다시 그 빙설벽을 기어 내려가야 한다.
저 아래 우리가 운반해야 될 물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이 엄청난 물량 수송 작전을 우리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해치웠다.
4월 19일에는 노스콜 캠프의 구축을 완료했고, 그 이튿날에는 필요한 물량을 모두 그곳까지 옮겨다 놓은 것이다.
국내 언론에 원정 일정이 2주일가량 앞당겨져서
시신 수습 작업의 디데이가 5월초로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나간 것은 그 즈음이다.
당시의 우리는 자신감에 넘쳤고 흥분해 있었다.
노스콜에 올라서면 그 위의 캠프 2와 캠프 3 그리고 초모랑마의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얼핏 보면 몹시도 완만한 설사면이어서 내일 당장에라도 그곳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고소증세와 노역에 파김치가 되었으면서도 서로를 와락 끌어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이제 일주일 내에 캠프 2와 캠프 3을 설치하고 나면 곧바로 치고 올라가는 거야!
하지만 히말라야는 언제나 의지와 전망을 배신한다.
당장 뛰어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이던 캠프 2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4월말로 접어들면서 기상이 갑작스럽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아침에는 잠시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오후에 접어들기만 하면 눈보라가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미치게 만든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바람이었다.
돌풍이 어찌나 센지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따금씩은 두 발을 잠시 허공에 띄울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여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덕분에 돌풍이 분다 싶으면 우리는 피켈로 얼음 바닥을 찍은 다음 설사면에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
때로 그 돌풍은 10분 이상 계속되는데, 그럴 때면 우리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얼굴이 빠른 속도로 얼어갔다.
"나 엊그제 정말 희한한 경험을 했다."
ABC의 본부 텐트 안에서 엄홍길이 언 발가락을 조몰락거리며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캠프 2가 빤히 보이는데 도저히 더는 못 가겠는 거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독바로 서 있기도 힘들고...
게다가 체력은 완전히 바닥이 나서 한 발짝 떼어놓을 때마다 헥헥거리고...
그래서 한 7700미터쯤 가다가 돌아섰어.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다, 내려가자!"
엄홍길은 올라갈 때도 그러하듯 하산할 때도 맨 앞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노스콜로 하산하는 그의 뒤로 대원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하산조차 힘들었다.
숨은 너무 가빠오고 다리는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몇 발짝마다 무릎이나 피켈을 짚고 서서 가쁜 숨을 고르며 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선 채로 쉬고 있으면 어는새 바로 뒤에서 발 소리와 더불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의 안전벨트에 매달려 있는 등반 장비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아, 이놈들이 차마 나를 앞질러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빨리 가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니까...
저렇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구나... 알았다 이 자식들아, 좀만 더 쉬고 빨랑 내려갈 거다!"
하지만 그는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쉴 때마다 어김없이 바로 뒤에서 발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는 신경이 곤두서서 부아가 치밀 정도였다.
하 이 자식들 좀 멀찍이서 다라오지 바짝 붙어가지고... 야 인마, 나도 빨리 내려가서 쉬고 싶단 말이야!
그는 당장 고개를 뒤로 돌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지쳐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낼 수 없었다.
결국 노스콜 텐트 앞에 이르러서야 그는 뒤를 돌아봤다.
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기도 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뒤에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대원들은 저 멀리 적어도 100미터 이상 떨어져서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등곡에 소름이 쫘악 돋더라구... 조금 전까지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까... 무택이가 나를 돌봐준 거야. 날씨가 너무 나쁘니까 어여 내려가라고...
그래서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돌보면서 따라 내려와준 거라구..."
일반인들에게라면 황당하게 들릴 소리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그런 현상과 엄홍길의 판단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때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던 박근영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얘네들이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어요."
박근영이 ABC에 올라온 바로 다음 날 밤이었다.
ABC의 본부 텐트는 마운틴 하드웨어에서 특수 제작한 대형 돔형 텐트다.
얼핏 보면 축구공을 연상시키는 이 반구형 텐트는 윗부분에 빙 둘러가며 비닐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고소증세로 인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그는 얼핏 그 비닐 창문들 중 하나에 눈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창문 밖에서 텐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작년에 조난당한 대원들이었다.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박근영은 다시 용기를 내어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눈[雪]이었다.
창문 밖에 쌓인 눈이 흡사 사람들의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올려다봐도 그 모습은 영락없이 대원들의 얼굴이었다.
"그래? 누구 누구 왔디?"
엄홍길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요. 준호, 무택이, 민이... 거기다가 병수형까지. 네 명의 얼굴이 또렷했어요."
"표정이 어땠어?"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빙긋이 웃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얘들이 우리가 온 걸 알고 지켜주러 온 거야."
"그런 거 같아요. 나가서 눈을 털어내고 다시 들어와 누웠는데... 맘이 그렇게 푸근하더라고요.
그날 밤엔 정말 한 번도 안 깨고 푹 잤어요."
본부 텐트에서의 대화는 두런두런 끝없이 이어졌다.
만약 우리의 그런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필시 미친 사람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현상이 '몽상'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였다.
나는 엄홍길이 죽은 사람들과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내게도 죽은 산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나도 가끔씩 인수봉을 오르다
"야 인마, 너 여기 처음 선등하던 날 기억나냐?"하며 허공에다 묻고는 저 혼자 미소짓곤 한다.
며칠 후의 일이다.
오후 들어 퍼붓기 시작한 눈이 ABC의 텐트 위를 무겁게 짓눌러 끊임없이 그것을 털어내야만 했던 밤이다.
베이스캠프의 김세준이 무전 연락을 통해 급한 부탁을 전해왔다.
내일 아침에 ABC의 라마제단에 따뜻한 국과 밥을 두 그릇씩 올려달라는 것이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김세준은 당연한 듯 말해줬다.
"내일이 현옥이하고 카미 기일이거든."
나는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지현옥!
나와 동갑내기인 지현옥은 한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이다.
1999년 4월 29일, 그녀는 안나푸르나 정상 바로 밑에서 엄홍길을 만났다.
엄홍길은 정상 등정 직후 하산하는 중이었고 그녀는 정상 등정 직전이었다.
그들은 웃으며 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하고 있던 박창수도 그 최후의 순간을 함께했던 장본인이다.
정성을 다해 차림 제사상을 올려놓고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던 이튿날 오후,
엄홍길은 다시 새파랗게 언 얼굴로 기진맥진한 채 노스콜에서 내려왔다.
그날의 패인 역시 기상 악화와 체력 저하였다.
바람이 너무 심해 무전 통화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우리의 경과 보고를 듣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슬픔인지 기쁨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베이스캠프로 무전 연락을 취해 지현옥의 기일을 기억해준 김세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다가
잊고 있었던 또 하나의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무도 바람이 심해 ABC로 후퇴해야만 했던 며칠 전 바로 그날이
2000년 칸첸중가에서 목숨을 잃은 다와 타망의 기일이었던 4월 22일이라는 사실이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걔네들의 기일을 잊고 있었다니..."
돌연 자책감에 휩싸여버린 엄홍길의 표정 위로 먹구름이 마구 일었다.
"애들 제삿날도 잊어버리고 그저 기어 올라가겠다고만 우겨대고 있었으니..."
엄홍길이 내린 결론은 너무도 엉뚱했다.
"걔들이 날 돌봐주고 있었던 거야. 날씨가 너무 안 좋으니까 그만 내려가라고... 안 되겠다.
앞으로 애들 제삿날에는 등반하지 말자! ABC건 BC건 상관없어.
그날 하루만이라도 애들 생각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조신하게 보내는 게 좋겠다!"
우리는 엄홍길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남들이 그것을 비과학적이네 미신이네 비웃어대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절박한 문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래, 친구의 기일마저도 아이젠을 쑤셔 박고 피켈을 휘두르며 보내야 한다면 너무도 슬픈 일이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옛 친구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끄덕이던 우리들도 막상 캘린더를 들여다보자
그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절감해야만 했다...
우리에게는 죽은 산 친구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달이 바뀌어 5월이 되자 우리는 전원 베이스캠프로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머물러봤자 체력만 소모될 뿐 나아질 것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했던 까닭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를 악문 싸움 끝에 캠프 2까지 전진했었다.
하지만 목표량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반의반도 안 되는 물량을 그곳까지 운반해놓았을 뿐 제대로 된 텐트 하나 쳐놓지 못한 상태였다.
도대체 텐트를 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텐트를 펼쳐보지도 못했다.
펼치는 순간 강풍에 의해 날아가버릴 것이 너무도 뻔했던 것이다.
우리는 얼음 바닥에 하켄을 박고 데포시켜놓은 짐들을 날아가지 않도록 꽁꽁 묶어놓은 다음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타지에서 죽을 고생을 해본 사람들만이 고향의 소중함을 안다.
우리가 설치한 ABC의 캠프는 비탈진 자갈밭 위에 위치해 있었다.
곡괭이와 삽을 들고 최대한 자갈밭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텐트를 쳤지만 그래도 잠자리가 편했을 리 없다.
끊임없이 비탈로 미끄러지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문득 눈을 떠보면 내 다리는 옆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고
그의 팔다리는 내 옆구리를 안타깝게 부여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편안하게 주저앉아 나른하게 일광욕을 즐길 만한 작은 평지조차 찾을 수 없었던 곳이 ABC다.
그러니 광활한 분지 위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던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대원들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와아, 여기는 진짜 초특급 호텔이에요!"
사람 좋은 이길봉은 저 혼자 감탄에 겨워 때 아닌 찬사를 늘어놓았다.
"잠자리 평평하지, 숨 쉬기 좋지, 바람도 안 불지... 여긴 완전히 천국이야, 천국!
이렇게 좋은 데로 쉬러 왔으니...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아...!"
모처럼 전 대원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베이스캠프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대원들은 눅눅해진 슬리핑백을 말리고, 밀렸던 빨래를 해치우고,
모처럼 샤워 텐트 안으로 들어가 더운 물로 목욕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장난 삼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놓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새카맣게 탄 얼굴, 깊은 골이 패인 갈비짝, 허리께를 졸라매야만 겨우 엉덩이 위에 붙어 있는 바지...
그것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때쯤 우리는 평균 10킬로그램 이상씩 살이 빠져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거의 3주 만에 베이스캠프로 복귀한 엄홍길의 건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볼이 핼쓱하게 패여 있었고 평지에서 거동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완전히 쉬어버린 목에서는 쉭쉭 하는 바람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침술을 전공한 중국 원정대의 팀 닥터로부터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엄홍길은 그런 와중에도 대원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직접 주방 텐트로 들어가 한때 '도봉산 주방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자신의 요리 솜씨를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오늘은 와인 숙성 삼겹살이야.
완전 자연산 재료로만 맛을 내고, 기름은 쪽 뺀 거라구... 아마 맛을 보면 환장들 할걸?"
베이스캠프에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고기를 굽느라고 연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기를 구우면 날씨가 나빠진다.
그것이 셰르파들의 오래된 믿음이다.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 '나쁜 구름'으로 변하여 날씨를 사납게 만든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마른 오징어를 구워먹는 것조차 삼가야 했다.
삼겹살이라고 하여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엄홍길은 온갖 양념으로 맛을 들인 삼겹살을 불판 위에 올려놓고 굽는 대신 압력솥 안에 넣고 익혔다.
이 과정에서 기름을 완전히 제거해내는 것이 엄홍길만의 비법이다.
그렇게 만든 와인 숙성 삼겹살은 과연 일품이었다.
"햐, 이거 정말 입맛 도는데?"
"우리 내려가면 휴먼원정대 이름으로 이거 체인점이나 열까요?"
"대장님, 오늘 저녁 메뉴는 뭡니까?"
밤에는 본부 텐트에 모여 앉아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대부분 등반 관련 다큐멘터리들이었지만 이따금씩 가벼운 극영화를 곁들이기도 했다.
이때 사용된 노트북 컴퓨터는 내 것이었다.
극장 스크린의 비율에 가장 가까운 와이드 화면 모니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심산 스쿨 초모랑마 천막극장'이다.
이 극장의 레퍼토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야니 Yanni의 콘서트 실황이다.
엄홍길은 그리스 출신의 이 퓨전 음악가의 작품들을 몹시도 좋아하여 늘 끼고 살았다.
"야니 음악은 대자연하고 너무 잘 어울려.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어떤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게 느껴져.
이 친구한테 팬레터라도 쓰고 싶은 정도라고!"
그날 천막극장의 관객은 그와 나 단 둘이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콘서트 장소는 인도의 타지마할과 중국의 자금성.
우리는 지금 그것을 티베트 초모랑마의 베이스캠프에서 감상하고 있다.
야니가 연주하는 박진감 넘치는 리듬과 애절한 선율의 음악은
엄청난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잊을 수 없는 콘서트의 밤이었다.
우리는 실황이 끝나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며 박수까지 쳐댔다.
이제 천막극장을 접고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다.
홍길이 돌아서려는 나를 붙들어 세웠다.
"산아, 부탁 하나 하자."
그는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파스 뭉치를 내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내 등에다 파스 좀 붙여줘. 거기 왼쪽 엉덩이 뼈 위에다. 내가 좌골 신경통을 앓고 있다는 거 알지? 어휴 죽을 맛이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힘이 들어... 두 발 사이에 균형이 깨지니까 똑바로 걷지도 못하겠어..."
약간은 충격적이었다.
천하의 엄홍길이 그토록 힘들어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가 쉬어 터진 목소리로 넋두리 같은 하소연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그의 바지를 내리고 파스를 붙여줬다.
내가 파스 붙이는 손에 힘을 줄 때마다 그가 으, 으,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돌연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과연 이 몸을 갖고 다시 저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올라가서 친구들의 시신을 수습해 내려올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문득 거인의 외롭고 약한 뒷모습을 훔쳐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야니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잡은 디데이는 5월 17일이었다.
3일 전에 받은 기상 자료로는 그날 8000미터 위에서는 초속 2미터 정도의 바람이 불 거라고 했다.
우리가 받는 기상 자료들은 세계 최첨단의 정보들이었다.
우리는 영국의 BBC와 미국의 NASA 그리고 한국의 기상청으로부터 매일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첨단 과학 자료라는 것도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하루 전에 받은 기상 자료에서 예상 초속은 20미터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로 당일 체감해야 했던 바람의 세기는 그보다 훨씬 강했다.
노스콜로 철수한 장헌무는 쉬어 터진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왔다.
"형님,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 올라간다고 해도 텐트를 못 쳐!
이건 아예 태풍이야, 태풍... 정말 환장하겠어..."
18일도 마찬가지였다.
대원들의 체력과 사기는 급속히 떨어졌다.
그것은 우리 원정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올 시즌 초모랑마 북쪽 루트의 기상 조건은 최악이었다.
그날 현재까지 캠프 2 이상 진출한 원정대는 단 한 팀도 없었다.
시시각각 전해져오는 기상 정보들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몬순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몬순이 오면 모든 등반은 끝이다.
우리에게는 그 기상 정보가 잘못된 것이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노스콜에 머무르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전경원은 ABC로 하산했다.
그가 무전기를 통하여 노스콜의 엄홍길과 통화하는 내용이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거기 머물면서 맛있는 거 많이 해드려야 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한국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이 사드릴게요..."
19일에는 노스콜 이상에서 머물던 모든 대원들이 ABC로 철수했다.
약간은 날씨가 호전되는 듯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바로 작년에 숨진 세 대원들의 기일이었던 것이다.
베이스캠프에 남아 있던 우리들은 정성을 다하여 제사상을 차렸다.
밥 한 그릇 술 한 잔 올려놓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간절한 기원을 올리 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그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정작 도움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라마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손칠규가 간구하는 마음으로 제문을 읽었다.
계명대학교의 세 산악인 백준호, 박무택, 장민의
1주년 기일을 맞아 삼가 고인께 고합니다.
휴먼원정대 일동은 산에 대한 고인들의 열정과 넋을 기리고저
여기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였사오니
부디 왕림하시어 좋은 자리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지난 1년간 흰 산 이름 모를 설벽 아래서 홀로 지낸 고인들을 생각하면
이곳에 모인 우리들의 가슴은 메입니다.
당신들은 꿈과 열정으로 이 신비의 왕국에 들어와 그 꿈을 이루었으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지난 1년간 히말라야 푸른 하늘에서 갈 곳 몰라 헤맸을
당신들의 넋을 위로하고 육신이나마 우리 인간세계로 모시고자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온갖 추위와 뜨거운 태양 아래서 1년을 보내셨을 외로운 넋들이시여.
당신들은 사나흘이면 내려올 이 길을 무슨 미련이 많아 영원한 시간이 걸리셨습니까.
이제 이생에 남기셨던 온갖 한일랑 모두 접어버리고 부디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저희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추구하는 바가
부디 성공할 수 있도록 영령들이여 도와주소서!
2005년 5월 19일 휴먼원정대 일동
20일이 되어 엄홍길이 다시 모든 대원들을 이끌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을 때 솔직히 우리는 절망했다.
휴먼원정대의 도전이 이렇게 허망하게 주저앉는가 싶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홍길도 말을 아꼈다.
어두운 표정으로 구름 속에 휩싸인 초모랑마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몹시도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사흘을 쉰 다음 다시 ABC로 올라갔다.
누가 봐도 마지막 기회였다.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후 무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의 쉰 목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죽을 뻔했어! 노스콜 위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기도가 턱 막히는 바람에...
숨을 못 쉬겠더라고... 잠깐 정신을 잃었어..."
그의 목소리는 분명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보는데...
그냥 다른 대원들 올려 보내고 나는 노스콜에서 지휘만 해야겠어..."
엄홍길의 지인이라면 그의 이런 결정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원들의 뒤에 서는 것을 체질적으로 못 견뎌 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자신이 선두에 서서 처리해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엄홍길이 선두를 포기했다는 것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 잡은 디데이는 5월 29일이었다.
새벽에 캠프 3을 출발하여 시신 수습 작업에 돌입한다.
대원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출발한다.
엄홍길은 노스콜에서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지휘한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28일 자정이 되기 직전에 엄홍길이 다시 무전 연락을 해왔다.
"향을 피워..."
이제 그의 목소리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으로 쉬어버렸다.
"대장님, 죄송합니다. 잘 안 들립니다!"
엄홍길은 목에서 피가 터져라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라마제단에 향을 피우란 말이야, 향, 향! 몰라?"
"향을 피워라, 카피했습니다, 이상!"
최후의 결전을 앞둔 엄홍길은 유언처럼 말을 이어갔다.
"새벽 1시, 3시, 5시... 그렇게 세 번 피워! 한 번 피울 때마다 세 뭉치씩... 알았어?
세 뭉치씩 세 번 피우라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베이스캠프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며칠째 밤을 새우고 있는 중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우리는 정확히 새벽 1시에 라마제단 앞에 모여 섰다.
세 뭉치로 나눈 향에 불을 붙였다.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다가 붉은 꽃다발처럼 변해버린 향을 세 명의 사진 앞에 꽂으면서
우리는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대지의 여신 초모랑마여,
부디 우리가 당신께 오르는 것을 허락해주소서.
우리 대원들 모두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작년에 올라갔던 대원들도 모두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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