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최초의 여성 교육서 내훈을 짓지만 비극의 씨가 되었다.
소혜왕후보다 인수대비로 더 유명하다. 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의 며느리, 덕종(인수대비)의 아내, 폐비 윤씨의 며느리, 연산군의 할머니가 바로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이다.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는 환확(韓確)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이 된 인물이다. 더욱이 누이는 둘이나 명나라 황제 성조와 선종의 후궁이여서 명나라를 자주 왕래하고 조선의 어려운 외교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그러니 당시 소혜왕후 집안의 정치적 위상은 대단하였다.
그는 1455년 19세의 나이로 수양대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결혼, 하지만 결혼 2년만에 남편이 죽고 왕후의 자리는 물거품이 되고 남겨진 거라곤 어린 자식 3명이였다. 월산대군, 자을산군, 명숙공주였다. 겨우 21세에 청상과부가 된 그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궁궐을 떠나 사가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회가 돌아왔다. 세조가 죽고 왕위는 세조의 둘째아들 해양대군(예종)이 이어 받았는데 예종이 14개월 만에 요절하자 소혜왕후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이 된것이다. 소혜왕후는 말이 왕후이지만 왕후의 지위를 누려본 적이 없고 그가 죽고 1504년 연산군때 내린 시호이다. 그는 그저 왕비의 며느리고 왕의 할머니였을 뿐이다. 왕의 어머니로 25년, 왕의 할머니로 10년을 살았으니까 말이다.
그가 궁궐로 돌아오기 까지는 만은 고초가 있었다. 성종이 큰형 월산대군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이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야망과 정치적 역량이 뒤어났음은 물론이다.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에게 혹독한 단련을 받은것은 물론이다.
1475년 왕대비로 책봉된 그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여성은 교육의 뒷편에 있던 그 시대에 “부인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조선 최초의 여성이 지은 여성교육책을 지은 것이다.
내훈의 내용은 “언행,효친,혼례,부부,모의(母儀)돈목(敦睦),염검(廉儉)으로 열여전,소학, 명심보감 등에서 중요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특히 소혜왕후가 이책에서 의도한 것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청상으로 살아온 그가 원하는 며느리를 얻기 위해 서였다. 결국 아내란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여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지 자기 아들의 마음에 든다고 좋은 아내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결국 부모의 마음에 들어야 되지 남편의 마음에 든다고 좋은 며느리가 된 다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이 말은 당시 자신의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물론 폐비 윤씨를 향한 전언이나 마찬 가지였다. 특히 시어머니 정희왕후에게 아들을 왕으로 옹립한 것에 대한 감사와 충심을 잘 드러 내고 있다.
또한 소혜왕후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찍 요절한 남편과 부모, 외동딸,세조,예종,성종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명복과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불사를 행하고 불경을 간행하였다. 그 때 지장보살본원경, 묘법연화경,자비도량참법 등수 많은 불경을 간행하고 부모은중경도 그 때 펴냈다.
그는 스스로 법도가 엄격한 유학자였지만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불력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조선에 와서 불교가 명맥을 유지한 것도 이같이 왕실의 여성들 덕분으로 오늘날 불교유산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며느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켰을까? 노년은 불행하게 된다.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를 폐비시키고 결국 죽음으로 내몬다. 아들 성종은 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100년 동안 폐비 윤씨 이야기를 거론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세상에는 비밀이란 없는 것이다. 이 일로 소혜왕후는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선왕의 후궁 엄씨, 정씨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리가 죽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도 몸져 누워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20대에 청상이 되어 궁궐을 나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대비가 된 그는 과단성있는 여장부로 살았지만 “내훈(內訓)”에서 처럼 제가(齊家)가 치국(治國)에 이르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