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61).손자의 타임캡슐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손자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손자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시쳇말로 '손자 바보'
라고 한다. 대개 할아버지는 자손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이미 완성된 자식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손자에게 기대하며, 손자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과거 인류의 삶의 흔적은 자연적 타임캡슐(?)인 화석(化石)을 통하여 수 억년 전의 생태계를 연구하여 짐작한다. 오늘날의 타임캡슐은 1938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가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물품을 선정 땅속에 묻으면서 타임캡슐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타임캡슐은 정부 기관, 기업 또는 개인이 미래에 전하거나 약속을 기록이나 물건 따위를 용기에 담아서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땅속에 묻어둔다.
나의 손자는 올해에 초등학교 1학년이다. 하교 시간이면 아내가 마중을 나가는데 오늘은 내가 마중을 나갔다. 조금 걸어오다가 손자는 나에게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맡기더니 친구와 놀이터에서 20여 분 동안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게 놀고 있다. 그사이 나는 손자의 책가방을 열어보니 겉에 색종이로 오려 붙인 달걀 모양의 물건이 있었다. 나는 손자에게 "율아, 이게 무엇이냐?"하고 물으니 "할아버지, 오늘 과학 시간에 타임캡슐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만든 목적을 물으니, 장래에 어른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꿈을 기록해서 반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발표하고 각자 집으로 가져가서 보관하기로 했다고 한다. 율이는 꿈을 무엇이라고 적었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 저는 현재 꿈이 1,200개나 되는데요, 제가 어른이 되어도 다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어른이 되어 건강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다섯 명을 낳아서 제가 이루지 못한 나머지 꿈을 다섯 아들이 이루도록 하겠다고 타임캡슐에 적어 넣고 교실에서 발표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율의 꿈 이야기를 듣고 무어라고 하드냐고 물었다."친구들은 제 이야기를 이해를 못 했는지 조용했고, 선생님만 손을 잡아주시면서 빙그레 웃으셨어요." 했다. 여덟 살 손자의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그날 저녁 식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내가 그대로 전하니 식구들은 한동안 조용하더니 모두 다 손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익산 금마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담임은 김형년 선생님이셨다. 졸업 무렵에 손자처럼 반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앞에서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매체는 없었고 가정에서도 교육적 조언자도 없었다. 특히 시골 초등학생들의 교육적 선망의 대상은 초등학교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아버지였고, 가장 무서운 냄새는 아버지의 땀 냄새였을 정도로 아버지는 가장 무섭고 엄한 사람이었다. 학교만 가면 담임선생님은 항상 달콤하고 친절한 냄새(머리 포마드)가 그리도 좋았으며, 음악 시간만 돌아오면 하얀 손가락으로 요술을 부려 풍금 속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오게 하는 선생님 손가락이 그렇게도 멋졌다. 그래서 나는 거리낌 없이 어른이 되면 선생님이 되겠다고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발표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나의 평생직업은 교직이 되었다.
손자는 지난 8월에 ‘수필시대 84호’에서 할아버지가 신인상에 당선되었음을 알고 있다. 수필 제목은 ‘나의 골동품’이었고 내용의 말미에 손자 ‘율(律)’에게 할아버지의 골동품을 잘 보관 간직하기를 바라는 내용이어서, 손자에게 읽혀 독후감을 발표하게 했더니, 손자는 ‘할아버지는 수필작가가 되셨으니 저는 13살(6학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나한테 말했는데 아마도 1,200개 장래 꿈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과 손자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사고력은 산업사회의 발달과 몇 차원 높아진 과학 문명의 발달에 비례한 교육과정으로 사고력도 꿈도 무궁무진한 것 같다.
남들은 여덟 살짜리 철부지의 잠꼬대 같은 이야기가 무슨 대수로운 이야깃거리냐고 하겠지만, 할아버지는 손자 바보로서 그저 신기하고 희망의 씨앗이다. 아니 손자의 타임캡슐을 가문의 타임캡슐 저장고에 보관하고픈 심정으로 점점 더 손자 바보가 심해지는 것 같다. 모든 부모는 누구보다도 자손에 대해서는 냉정과 원칙의 잣대로 적용하여 올바른 삶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손자 바보의 선입견이 앞서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은 이성적 인간보다는 본능적 인간이 먼저인 것 같다.
(201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