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과 보현보살
袈湖闡提(가호천제)|선제사 주지
1.
나는 은사이셨던 성철스님을 문수보살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광덕 사숙님을 보현보살과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별 변동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왠지 나도 잘 모르게 두 분 어른들에 대한 그러한 느낌이 줄곧 내 마음속에 떠올랐고 또한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글의 주인공이신 두 분 어른들의 호칭에 대해서다. 은사스님에 대해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절에서 흔히 노인 어른들께 공경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노장님(성철 대종사)이라고 부르고 싶고, 광덕 사숙님은 대선사로 호칭하고 싶다.
왜냐하면 옛날 우리 선조님들은 승속을 불문하고 가정에 대한 일이나 가족 구성원들을 남에게 말하거나 거론할 때는 무척 조심스럽게 임했고 겸양으로 표현했다. 그러기에 우리 출가문에서도 스승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역시 남에게 결례가 되지 않도록 특별하게 마음을 썼던 것이다. 요즘에는 옛 전통이 무시되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문화 전통의식 속에서는 그런 예의 범절이 도도히 흐르고 있으며 또한 살아 숨쉬고 있다고 본다.
내가 우리 스님을 부르는데 그러한 옛 법을 숭상하여 사회 일반 관념에 거슬리지 않게 하여 고래의 미풍양속을 존중하여 따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덕 사숙님에 대해서는 역시 한 가문의 존숙 어른이시지만 이미 세연을 모두 마치셨고 아울러 영결식 때 대선사로 존칭하였으므로 거기에 따라서 그렇게 부르기로 하겠다.
나는 노장님과 대선사를 뵈올 때마다 문수.보현 같다거나 아니면 한산. 습득과 같다는 친분 이상의 느낌을 두 분께 받았다. 그래서 원고 청탁을 받고 글 제목도 이와 같이 정했다. 물론 두 어른들의 연령의 차이는 다소 있어도 법의 견해 앞에서는 사실 그런 것은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이렇게 발설하는 것 자체가 사족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동안 잊고 지내다시피 했던 두 분의 특별한 인연이나 높은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 보는 글을 부탁 받고 난 내심 좋아했고 그래서 선뜻 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에 대한 가르침과 체취가 몹시 그립던 차였는데 뜻밖에 반가운 기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노장님께서는 사제인 대선사를 항상 좋아하셨다. 대선사께서는 무슨 일이든 사리에 매우 밝았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일 처리가 무척 공정한 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신뢰를 얻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노장님께서 좋아하신 것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대선사의 조언을 듣기를 원했다. 물론 그 심부름의 중간 역할은 거의 내가 담당했다.
2.
내가 처음 대선사를 뵌 것은 노장님께서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서 십년 수행 결사를 끝내고 경북 문경 운달산 김용사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에 노스님(동산대종사)을 찾아뵈러 범어사에 갔을 때였다.
그때 대선사의 모습은 참으로 고매하고 자비로웠으며 노스님(동산스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음을 단박에 느꼈다. 지금으로부터 서른 여덟 해전의 일이다.
그 즈음 스님들의 법복인 가사의 색 지정 문제로 노스님(동산스님)과 노장님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그 얼마 전 노스님께서 종정으로 계실 때 종단 대표로 남방의 여러 불교국을 예방하고 오셨기에 우리나라에서도 남방식 황색 가사를 착용했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노장님깨서는 황금색이 부처님의 상징 색으로 귀한 색이긴 하지만 가사 색은 율장에 정해져 있는 괴색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괴색 가사가 결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선사의 중간 역할과 조정 역할이 매우 컸다고 했다. 나중에 가사 불사를 성만하여 노스님께서 친히 증명하시고 난 뒤, 대선사께서 나를 범어사로 불러 노스님께서 내려 주신 괴색 가사를 노장님께 전하도록 하신 일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3.
그 후 노장님께서 운달산 김용사에 바랑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스님께서 입적하셨다. 부보(訃報)를 받고 노장님께서는 범어사로 향했고 내가 배행했다. 그때 노스님의 모든 장례의식 절차를 대선사께서 맡아서 진행했는데, 얼마나 짜임새 있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나가는지 일사불란하여 절차가 소홀하거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대선사의 그러한 모든 능력을 한눈에 보면서 나는 줄곧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 특히 기억에 남는 일로는 노스님의 열반으로 상좌들의 후계서열이 논의되었을 때, 실로 오랜만에 범어사에 간 노스님의 가장 맏상좌였던 노장님보다 노스님을 평소 가까이서 모시고 법제자로 인가받은 노장님의 사제 스님을 위로 모셔야 된다는 일부 권속들의 주장으로 약간의 곡절이 생겼다. 이때도 대선사의 명철하신 지혜로 서열이 원만하게 잘 정리 되었다.
그래서 노스님의 비에는 은(恩)이나 법(法)의 복잡한 서열을 따로 적지 않고 출가 득도의 순서로 기록하게 하여 노장님께서 노스님의 맏상좌로 제일 먼저 자리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노스님의 비문 또한 노장님이 쓰게 되었다. 그 후 노장님께서 한국의 법사 제도가 문제점이 있음을 몇 번이나 지적하였고, 그때마다 대선사의 주선과 노력으로 인한 비석의 원만한 기록을 칭찬하시곤 했다. 그 이후부터는 대선사께서도 범어사에 일이 있을 때마다 노장님의 의견을 경청하였으며 노스님의 사리탑을 옮긴 것도 사전에 의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
문수보살(성철스님)과 보현보살(광덕스님)은 비단 문중의 일인 범어사일 뿐만 아니라 해인총림의 일과 종단의 일도 자주 의논하였다. 노장님께서는 여러 가지 종단 불사를 대선사께 자문을 구해 처리했고, 그러므로 자연히 대선사께서도 종단에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종단 일을 보게 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백련 노장님의 뜻을 대선사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종단 발전에 실현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두 분의 밀접한 관계와 공동의 노력으로 종단의 내실이 더욱 튼튼해졌을 뿐만 아니라 불과 짧은 세월 속에서 매우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많다.
그뿐만 아니었다. 종단에서 제정한 종헌에 총림법이 제정된 뒤, 처음으로 해인총림이 출범하여 노장님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는 과정에서도 대선사께서 여러 방면으로 기울인 노력이 매우 크셨다고 했다. 그때 노장님께서는 해인총림 방장 소임을 맡으시면서 두 가지 큰일을 계획하였는데, 첫째는 해인사를 관광의 장소가 아닌 수행의 도량으로 개조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해인사에 승가대학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계획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대선사와 깊이 의논하고 실질적인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우선 해인총림을 수행의 도량으로 만드는 일로 처음 시도한 것이 법당에 관광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당에서 얻어지는 불전 수입을 메울 수 있는 수입원이 따로 마련되어야 했으므로, 신도회인 ‘영산회’를 조직하여 그 기금으로 사찰운영을 하기로 하였다. 당시 사정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시도였고 웬만하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나 노장님과 대선사의 상호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 ‘영산회’의 신도 모임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단체였는데, 그 당시 범어사에 있던 대선사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 덕분에 기금 마련이 원만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두 번째 사업이 바로 해인사에 승가대학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8.15 광복 후, 서구에서 물밀듯이 들어온 종교들이 학교를 대대적으로 설립하였다. 물론 경제적인 투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우리 민족은 교육열이 무척 높았던 민족이었던지라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땅을 팔고 소를 팔았고 그래도 안되면 부모는 서울로 올라가서 물장수를 해가면서 학비를 조달했다. 그러므로 학교만 시작하면 투자 금액은 오래지 않아 회수되었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나면 수익도 생기고 명예도 얻었다. 그 수익으로 부와 권위를 한껏 누렸고, 그 덕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항간에서는 ‘굴뚝 없는 공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또 보다 직접적으로는 아주 노골적인 표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에 반해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은 4년제 대학(강원)을 졸업해도 고등학교 학력도 인증받지 못하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봐서 불교가 타종교와의 균형을 이루고 사회적인 대등한 입장에서 포교를 하기 위해서라도 승가대학 설립이 무엇보다 급선무의 불사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노장님께서는 대선사께 학교 설립의 계획서 작성을 부탁하였고, 그로부터 대선사께서는 여러 날을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면서 학교법인 설립 계획을 세우고 학칙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많은 수고를 거듭하여 학교 설립에 필요한 제반 서류를 갖추어 당국에 승가대학 설립 허가 신청을 하였다.
당시 학교법인은 정부 종합청사와 풍전상가(豊田商街)를 건축한 덕산거사 이한상 불자가 사재를 흔쾌히 출자하였으며, 교사(校舍)는 해인사에 있는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때 평소 대선사를 존경하여 따르고 지도 받았던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이 해인사 승가대학 건립 불사에 적극 응원하여 나서기도 했다. 대선사의 고제인 지환 사제도 그 당시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불행하고 유감스럽게도 시절 인연이 도래하지 않아 해인사 승가대학 설립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때의 노력들이 훗날 조계종 종단 교육사업에 귀감이 되었고 초석이 되어 종단 3대 종책 사업으로 교육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는 길이 조계종 종사(宗史)에 남을 일이었고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돌아보면 이 모두가 대선사의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운 수완이 아니었으면 어려운 일이었고 할 수 없었던 일로 기억한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첫댓글 광덕큰스님 께서 종단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네요..모든일에 자비와 지혜가 바탕이 되어 모든일이 원만히 이루어진듯 합니다..지혜와 자비, 환희만이 밝아지길 발원드립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지금 검색해 보니 해인사 승가대학이 있는데 이 글을 쓰던 때는 준비중이였나봅니다.
큰스님의 멀리 내다 보시며 지혜가 구석구석 숨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