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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글을 딱 하나만 더 올릴게요. 많은 분들이 감동받은 글입니다.
(1)
지난 12월12일 일요일 저녁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진 아줌마?"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유태준이었다. 창원 유(兪)씨 가문이 배출한 세계적인 석학.
십 여 년 전, 노벨 의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한 사촌 오빠의 차남이다..
"어머머!! 유태준 박사?" 나도 톤을 높였다.
일 년에 한두 번 귀국하여 후배들이 운영하고 있는 자기 이름의 병원을 둘러보는데,
15일에 출국을 하니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는 전화였다. 마침 병원이 우리 집 근처에 있었다.
조카를 만나러 가는 날은 가슴이 설레었다.
조카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서울 의대에 다닐 때도 가끔 집으로 놀러 왔었고 다른 조카들보다 친숙했던 사이다.
회색 빛 바지에 까만 와이셔츠, 황금빛 넥타이를 맨 세련되고 기품 있는 노신사가 미국식 인사로 나를 포옹했다.
백발이 더 많은 나이, 그런데도 옛날의 개구장이의 웃음은 여전했다.
몇 십 년 만의 상봉인데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100만불의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에 있고, 본인의 연구 중 하나인 알러지 예방약은 미국에서 시판을 앞두고 있는데
엄청난 시장이고 치매 예방약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윤기 나는 피부와 평화로운 얼굴. 여유로운 분위기, 진지한 매너.
"조카, 아주 이쁘게 나이를 먹었네" 내가 칭송하자
" 아마 미국에서 살아서 그럴 꺼에요. 한국에서라면 사방의 적들이 견제하고, 자연히 조급증에 걸리고,
사회 전체가 무언지 불안하고 바쁘잖아요?
그 가운데서 나도 그런 표정으로 늙었겠지요?" 그러더니 그야말로 진지한 어조로
"영진 아저씨요. 서울에 오면 많이 생각나요"
뜻밖에도 나의 작은 오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I remember him. I like him very much"
나는 둔기로 맞은 사람모양 아뜩해 졌다.
내 오빠를 기억하다니, 세상에 우리 가족말고 오빠를 기억하고 있는 유씨네 친척이 있다니!!!
좋아한다니!!! 세계적인 의학자라는 감동보다, 아직도 십 년은 왕성하게 연구를 지속할 수 있다는 능력보다
수많은 의사를 다 합쳐도 유태준 하나만 못하다고 인정을 받는 명성보다,
내 오빠를 기억하고 좋아한다는 그 말에 나는 너무도 벅차, 그만 눈이 젖고 말았다.
"유태준, 정말 고맙다. 그대가 나를 울렸어"
나도 미국식의 포옹을 했다, 더 있다가 가라는 그의 다정한 손을 흔들어 악수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겨울 날씨에 비는 왜 또 처연히 내리는가.
얼굴에 차갑게 내려 떨어지는 빗물을 그대로 둔 채 가슴에 퍼지는 끝없는 비애를 감당하기 어려워 휘청거렸다.
(2)
우리 부모님은 2남 5녀를 두셨다. 작은 오빠는 위에서 세 번째 자식이고, 이름은 영진 (榮鎭).
세살 먹은 내가 '작은 오빠'라는 소리가 안돼서 '잠빠'라고 한 것이 그대로 호칭이 되어버려 식구들도 모두 잠빠라고 불렀다.
1926년에 태어나, 1978년에 세상을 떠났다. 53년의 생애였다.
사인(死因)은 결핵이었다. 잠빠가 세상을 떠난 날은 7월 17일, 제헌절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제헌절이 돌아오면 먼저 오빠가 떠오른다.
내 나이 칠십이 되니,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벌리(別離)를 겪었다.
어린 시절의 두 언니, 잠빠,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그러나 사별(死別)은 잊게 되어 있어서 세월따라 슬픔이 가시고. 시나브로 기억에서 흐려진다.
하지만 잠빠가 세상을 떠난 지 26년.
'하루도 빠짐없이'라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그와 흡사하게 나는 오빠 생각을 하며 지낸다.
떠나간 사람 그 누구보다, 심지어 부모님보다 오빠가 가슴에 더 깊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좋을 일이 있을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에 오빠를 생각한다.
부질없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나 단념할 것을 단념하지 못해 괴로울 때 오빠를 떠올린다.
남들과는 살가우면서 가족들에게는 거리를 두었던 일.
객지로만 돌던 학교와 직장생활. 회생할 수 없는 중증의 결핵환자가 되어 들것에 실려왔던 귀가.
가히 순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병상의 날들. 이런 모든 것도 생각하지만,
늘 내게서 떠나지 않는 것은 오빠가 떠나고 난 자리이다. 허망할 정도로 간단한 뒷자리이다.
투병생활의 마지막 18년은 두 평 반짜리 방에서 한 발자국도 떼어보지 못하고 누워서만 지냈었다.
잠빠를 산에 묻고 돌아온 날, 깔고 있던 요와 이불, 머리맡의 성모상과 휴지통,
몇 권의 책을 치우니 오빠가 이 세상에 있던 흔적은 5분 만에 사라졌다.
결혼을 안 했으니 일점 혈육도 없고, 스무 해를 출입을 못했으니 옷도 양말도 신발도 있을 리 없었다.
53년의 세월이 단 5분으로 정리되는 간단 명료 앞에서 안타까움이나 허무대신,
어떤 강렬한 감동에 앞도 당했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3)
오빠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오빠 나이 스물 네 살 때 안양시에 있는 가축위생 연구소 시절이었다.
오빠의 병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열여섯에 세상을 뜬 셋째언니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셋째언니는 바로 내 위의 언니였는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한 해를 묵었다가 이듬해에 또 낙방하자,
할 수 없이 2차 시험을 보아 합격했는데 학교가 멀리 왕십리 근처에 있는 M여중이었다.
우리 집은 서대문에 있었고, 서대문에서 학교까지 통학이 힘들었다.
그 해는 해방이 되던 해라, 전차로 다녀야 했는데 나라의 전력사정으로 전차운행이 자주 중단되어 걸어다녀야 했다.
이 와중에서 언니의 다리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무릎이 아파 오다가 관절염이 되었고,
치료약의 부족으로 골수염으로 진행되었고 나중엔 결핵성 관절염이 되어 2년만에 세상을 떴다.
관절염을 고치지 못해 어린 딸을 잃다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오빠는 이 때 대학생이었다. 어쩌다가 집에 있는 날은 가엾은 동생의 시중을 도맡아 했다.
당시만 해도 결핵은 아주 무서운 병이고 전염성이 강해 가까이 하기를 겁냈었는데 잠빠는
"염려마세요, 저는 튼튼하잖아요?" 하면서 동생의 임종 뒷마무리를 도 앞장서서 했었다.
아마도 이때 전염되었던 것이 잠복기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실에 박혀 연구에 골몰할 때 발병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빠는 수원에 있는 농과대학 졸업생이다.
대학입시 원서를 내던 날, 오빠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대를 지망했다.
우리 칠 남매 중에 제일 영민했던 둘째 아들에 대해 부모님은 기대가 컸었다.
당신의 조카들처럼 의대에 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시급한 과제는 농촌의 근대화라는 소신 때문에 부모님의 뜻을 어겼고,
이 문제로 아버지와는 소원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오빠는 안양에 있는 가축위생연구소의 연구실에서 돼지 콜레라 백신 연구에 몰입했다.
가축은 농민의 큰 재산인데, 전염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때죽음을 당했다.
맨 먼저 한 일이 시계를 없엔 일이었다고 한다.
밤낮이 없는 연구, 실험...
그나마 받는 월급은 최소한의 식비를 제하고는 인근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썼다.
하숙을 하고 있는 집의 두 아들들을 공부 시켰고, 좁은 자기 방은 동네 환자의 입원실이었다. 오
랜 객지 생활과, 과로에 영양 실조. 어떻게 발병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오빠는 남몰래 약을 복용했다. 연구를 멈출 수가 없었고, 부모님께는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라면, 두 번 째 불행은 이듬해 일어난 6.25 동란이다.
가족과 떨어져 직장을 따라 남하했는데, 전쟁의 와중에서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불규칙하게 복용했던 약은 내성만 키워, 오히려 악화를 초래했다.
이 때쯤은 부모님도 오빠의 병을 알았다.
당시 메디칼센터의 원장이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의 아들인 안병훈박사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의 세계 최고 결핵전문의가 방한했을 때 입원을 하여 다각적인 검사를 했고, 수술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10년 동안에 오빠의 양쪽 폐는 좀이 먹듯 상해 있어서 절단해 낼 수가 없었다.
또 신체 다른 부위에까지 옮겨저 일년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마지막 선고를 받았다.
오빠는 병원을 몰래 빠져 나와 연구소로 달려갔다. 혼신을 다해 연구에 몰두했다. 한
국 최초로 예방약은 성공했고, 오빠는 폐인이 되어, 들것에 실려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 때 오빠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다.
집으로 온 이래 두 평반 짜리 방의 문지방을 한 발자국도 넘어보지 못하고,
오빠는 일년의 열 여덟 배를,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18년의 생을 더 살아낸 것이다.
우리는 오빠를 얼마나 몰랐던가.
오빠가 집으로 온 후 안양에서는 매일 문병객이 왔는데,
공부를 시켜준 사람, 병을 치료해준 사람, 빚을 갚아준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오빠를 따라온 짐은 찢어진 구두와, 낡은 옷 한 벌, 책과 성모상이 전부였다.
오빠는 피난지에서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빠를 살아 있는 예수라고 칭송 을 했다. 그러나 나는 감격하지 않았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몸이 만신창이 된 다음에는...
(4)
나는 그 후 곧 출가를 했기 때문에 오빠의 병상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마음은 더 무거웠고,
회갑을 넘긴 노모(老母)가 회생의 기약도 없는 아들의 병 수발을 드는 것을 볼 때는 앓는 오빠도 오빠지만
늙은 어머니가 딱하고 가엾어서 부엌 서쪽 창문을 열고 그 너머에 있는 친정 쪽 하늘을 보며 눈물을 짓곤 했다.
그 때 우리 친정은 큰오빠네 식구와 같이 살았었는데 어린 조카들에게 전염이 될 까 두려워하신 아버지께서는
바로 옆에 있는 방 세개짜리 조그만 한옥으로 작은 오빠를 옮기셨다.
다만 어머니만이 따라가시어 함께 기거하며 병구완을 하셨다.
오랜 병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한다.
더구나 결핵 말기의 전염병 환자임에랴.
오빠를 은인이라고 칭송했던 사람들의 발길도 세월과 함께 끊기고, 가족들과도 격리되어 있어야 했다.
나와 동생의 아이들을 무척 보고 싶어했지만 선뜻 데려가지 못했다.
오빠가 수용한 것은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의 고독이었다.
긴 병 환자에게서 있음직한 짜증이나 비관이 전혀 없고, 어떤 것에도 감사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누워만 있기 때문에 욕창이 심했는데, 핀셋으로 살 속의 벌레를 골라낼 때까지도.
어머니는 밥을 떠 먹이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내셨다.
"어머니, 힘드시지?" 내가 물으면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 힘들다가도 감복을 하니까 힘들지 않단다. 네 오래빈 사람이 아니다. 聖人이고 부처야"
"여자 부처가 낳았으니 아들 부처겠지"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 숟갈 밖에 뜨지 않는 환자의 밥상을 위해 엄마는 삼 시 세 때 새 밥을 지으셨고
김치도 속대 겉대 다 버리고 연하고 부드러운 가운데치로만 담갔으며
생선 한 토막이라도 짤짤 끓게 조려서 입에 떠 넣어주는 엄마가 짜증 안내는 환자보다 더 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오빠는 다섯 가지 약을 열심히 먹었다. 그 약이 자기를 살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성으로 먹었다.
그것은 소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목숨에 대한 최대의 성실이었다.
성한 몸이든 병든 몸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생명을 준 자에 대한 최고의 감사며 경외였다.
한 달에 한번 봉성체 해 주시는 신부님도 놀라운 신자라고 칭찬을 하시고,
기도하러 온 레 지오 단원들도 오히려 은혜를 받고 간다고 감동했지만,
나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지 못 했다. 그 게 뭐야. 그 건 사는 게 아냐. 나는 안타까움 때문에 분노하였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오빠의 몫까지 살려는 것처럼, 일념으로 생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저금 액수를 늘려 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오빠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늙은 부모님의 쳐진 어깨를 나의 활기로 일으켜 세우려는 듯이... 사
랑할 것이 많은 생활, 사랑할 것을 늘려 가는 생활은 활기 찼고 생에 대한 의욕을 높여주기도 했다.
오빠, 산다는 것은 부처가 되는 길이 아니라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상의 성인이 아니라우,
성한 육신을 건강하게 가꾸며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 발전해 나가는 것.
싱싱하고 아름다운 것.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기에 밀려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아갔다.
(5)
오빠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오빠가 집에 온지 18년 2개월 째였다.
목까지 올라오는데 닷새가 걸렸다. 그 간에도 오빠는 의식이 분명해서 자기 생명의 소멸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모인 형제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마웠어요" 말을 하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모처럼 단 잠에 잠기는 듯 편안하게-. 그 모습은 맑고 고왔다.
"어서 와서 영진의 이뻐진 얼굴을 보아라.!"
용케 참고 계시던 아버지가 오열을 터뜨리셨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진작부터 나는 어떤 화살에 명중이라도 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빠의 임종의 얼굴을 보는 찰라,
그 얼굴 위로 고뇌로 일그러진, 죽어 가는 내 얼굴을 보고만 것이다.
차마 두고 갈 수 없는 사랑하는 아이들, 열심히 모은 저금통장, 아름다운 집,
이 좋은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내 얼굴을...
무슨 조화였을까. 두 겹 세 겹 여름 날 덧옷을 걸치고 있는 남루한 내 모습을 보고만 것은?.
"오빠야, 잠빠~, 내가 졌어, 내가 졌어"
남들이 들으면 이해 못 할 소리를 해대며 나는 엉엉 울었다.
옆에서 보기에 답답하고 한심하고 지루한 병상에서 오빠가 누렸을 자유!
그 자유가 내게 전이(轉移)되어 오는 순간이었고,
그 것은 내 기억 속의 오빠를 더 이상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육친으로서의 위안과 안도의 울음이었다.
오빠를 산에 묻고 돌아온 날, 50여 년의 세월이 단 5분으로 마감되는 완전하고 깨끗한 종결에 전율 했던 것도
이런 맥으로 이어진 충격과 감동이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가족과 친지들은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오빠의 신(神)을 찾아갔다.
유학(儒學)을 생의 근본으로 삼고, 부처의 가르침을 종교로 가졌던 부모님과, 무신론자인 형제들까지...
그리고 살아생전, 밥 수저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무능한 한 병객이
어떤 건강하고 잘난 사람도 하지 못한 얼마나 엄청난 일을 우리에게 해 주고 갔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일 년밖에 살 수 없다던 현대의학을 조롱이나 하듯 지극한 고통의 십 팔 년 속에서
한 사람이 바쳐준 봉헌의 섭리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끝)
작은 오빠 이야기 에필로그
매월 둘째 수요일은 대학동창 모임의 날이다. 그래서 이름이 이수회이다.
오늘은 2005년의 첫 모임이었다. 15명의 친구가 졸업이래 40년을 만나고 있다.
열 다섯 명이 장방형 교자상에 앉아 식사를 하면 멀리 있는 친구들과는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4인분으로 준비된 식사를 함께 하는 친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그 날의 대화가 이어진다.
오늘은 우연하게 조금 더 친한 친구들과 한 상이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은 내가 단골로 글을 올리는 카페 단골 손님이다.
자연히 내가 올린 글이 화제가 된다.
"작은오빠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다. 내가 몇 군데 퍼갔어. 저작권 고소는 안 하겠지?"
그러면서 작은오빠의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것이었다.
" 아, 나 선진이 작은오빠 알어"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던 친구가 관심을 보였다.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카페에 쓴 이야기 말고 이런저런 일화를 말했다.
그 중에 오빠가 안양가축 위생 연구소 시절의 일들에서 친구들이 감동을 보였다.
이런 이야기다.
연구소는 농림부 산하에 속한다. 따라서 그 곳의 직원은 공무원이다.
직분은 잘 모르겠지만. 주사, 서기, 계장, 과장 , 국장, 소장 대강 이런 식의 등급이 있을 것이었다.
소장이면 아마 농림부의 과장쯤이지 싶다.
오빠가 연구소 과장으로 승진할 때이다. 자주 서울에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고 내가 물으니 승진을 안 하겠다고 오는 것이란다.
"말이다. 과장이 되면 연구에 전념할 수가 없단다. 과장이 맡아야 되는 일이 있거든.."
승진을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 세상인데 승진을 하지 않겠다고 찾아다니던 사람.
그 게 나의 잠빠였다. 그 곳 소장님도 더러 아버지를 찾아 오셨다.
"유과장 때문에 제가 죽을 지경입니다" 하소연을 하기 위해서다.
연구소에 배당되는 특별 운영비가 있는데 오빠가 그 사용 처에 대해 완강하게 제동을 건다는 것이다.
상급 기관에서 시찰이나 방문 때, 소장은 과분한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자기의 승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곳에 쓸 돈이면 연구비용으로 투자 하십시오.
연구 실적이 좋으면 그 것이 바로 소장님의 능력으로 남고 그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업적이 되어 승진 요인이 되는데 왜 돈을 쓰십니까?"
한다는 것이다.
"말이야 맞지만, 세상이 어디 그럽니까? 유과장에게 세상도 좀 읽으라고 부친께서 말좀 해 주십시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나빠지는 걸로 보면 세상이 당장이라도 망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정의와 양심의 사람이 사회 곳곳에 말없이 버팅기고 있어서 세상은 건재한 것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작은오빠 생각이 더 간절했던 것은 왜였을까?
첫댓글 유영진 선생의 짧지만 감동적인 생애...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하늘에서 영면하시고...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훌륭한 과학자가 되셔서 또 연구에 몰두해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유선진 수필가의 "사람, 참 따뜻하다"
좋은 책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ㅎㅎ
까망포리!
알게되어 기쁘면 사서 읽어...
만공팔백원 하더라.
그라고, 좋은 책이라도
'ab님'과 직접 연관되는 일이라면, 자당 함자가 게시되어도 되는 지 먼저 묻는게 순서 아녀?
물론, 지금이야 'ab님'께서 양허허신 걸로 보면 되겠지만...
타인의 입장은 전혀 고려칠 않고....ㅉㅉ
내가 아침 일찍, 니 보라고 할 때
거명 안한 이유를 모리겠어..?
내 따스한 우리집에 있고싶은데...
'ab님' 실체를 안 이상 쬐금 더 있어야것어...
여긴 너무 추우니께 오바라도 걸치고 와야것다...
참 깐죽거리네...
"잠빠",,,저에게도 "웸모"라는 호칭을 사용하던놈이 있었는데 지금은 "외숙모 저녁좀 사주지? 맛있는걸로" 그런늠이 방학이라고 뒹굴거리고 있습니다.
읽어내려가는내내 미친놈처럼 눈물지어집니다, 애닳는 사연이지만 미련한"잠빠" 같은 이들에 의하여 세상은 밝아지는게 아니겠는지요?
눈물짓는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련해지는 글이네요. 저는 완전한 이타성이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님의 작은 오빠 분께서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이타성을 가지고 계신거 같아요. 정말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일찍 돌아가신것이 너무 안타깝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모든 풀이 약초이듯이...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약초이구나!...
'내가 얻어낸 한 앞 풀의 철학이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따뜻해져 옵니다.
좋은 글로 구름 가득한 어스름의 졸음이 싹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름 없이도 제 맡은 곳에서 성심을 다하시는 분들이 그나마 오늘의 우리 나라를 지탱케하는 저력 인 것 같습니다.
"선진 아줌마?"
잠시 가졌던 궁금증에 대해 마침표를 찍게 하는군여.
휴...
읽는 내내 가슴이 아리군여.
고독했던 잠빠.
임종의 한장면을 보듯 합니다.
속물로 살아가는 제 인생 돼 돌아 봅니다.
무어라 표현이 안되는군요
제인생에서 가장 많은것을 얻어갑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