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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작은모임(young570519) 원문보기 글쓴이: 선월
冬至(동지) : 賦 - 기봉 백광홍(岐峯 白光弘)
지난 여름 장흥군민 회관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소설가 한승원이 자신의 딸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기념해 군민(郡民)들에게 한턱내는 자리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적인 큰 상을 받았
으니 가문과 지역뿐만 아니라 나라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장흥은 지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 받았다. 전국에서 최초일 뿐
만 아니라 아직 유일하다. 장흥이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강
의 아버지 한승원 비롯하여 이청준, 송기숙, 이승우 등 우리나라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100여 명의
현대 작가와 시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장흥 지역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다. 장
흥이 배출한 가사 작가의 수와 그들의 작품 수가 단연 전국 1위이기 때문이다. 그 가사 작가들의 맨
위에 있는 사람이 조선 명종 때의 유명한 시인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이다. 우리나라
기행 서경가사의 효시로 평가 받고 있는 ‘관서별곡’을 지었다고 하여 “문학관광 기행특구” 장흥에서는
그를 장흥 문학의 뿌리로 일컫는다.
백광홍은 조선조 중기의 이름난 시인으로 호는 기봉(岐峯), 자는 대유(大裕)이다. 기봉은 시(詩)와 부
(賦)에 능하여 그 시대 조선팔문장(조선왕조실록)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불려졌던 “관서별곡”은 그가 지은 가사 작품으로 오늘날 여러 학자들에 의해 그 문학적 가
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1522년 전라남도 장흥의 사자산 아래에 있는 기산(岐山) 마을에서 태
어났다. 그는 수원 백씨의 시조 창직(昌稷)으로부터 20세(世)이며, 아버지 백세인(白世仁)과 어머니 광
산 김씨 사이에 태어난 3남 2녀 중 장남이다.
그의 조상 중 12세인 백장(白莊)은 고려 말에 보문각 대제학으로 있었는데,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서게 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표명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태조는 백장을 충
청도 해미(海美)로 귀양 보냈다. 나중에 태종이 귀양살이하고 있는 그를 다시 불렀으나 그 때도 역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또다시 전라도 장수(長水)로 유배시켰다. 그러던 중 백광홍의 고조부
대에 전라도의 남녘 장흥(長興)으로 이주하여 사자산 밑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봉명재와 큰 스승과의 만남
기봉이 태어나서 자란 기산의 사자산 기슭에는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이 있었다. ‘봉명재’는 당시
사설 교육기관으로 이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몇 백리 밖의 타 지역에서도 찾아 올 정도였다. 기봉
도 어린 시절 이 서당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는데 전념했다. 이 무렵 기봉은 이곳으로 유배 온 영천(靈
川) 신잠(申潛, 1490~1555)에게 수학했다. 이후 스승 영천 신잠의 천거와 소개로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의 일재 이항(一齋 李恒, 1499~1576))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 마을은 ‘봉명재’가 있어서인지 조선 중기에 명성이 높은 문인을 한꺼번에 여덟 명이나 배출하여
이들을 ‘기산 8문장’이라 불렸다. 이른바 ‘기산 8문장’ 중 기봉의 형제가 네 명이어서 한 가문의 4문
장(一門四文章)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란 기봉을 비롯하여 그의 친동생 풍
잠 백광안(風岑 白光顔)과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그리고 사촌 아우인 동계 백광성(東溪 白光城)
을 두고 이른 말이다.
첫 스승은 영천 신잠 선생
신잠은 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리었던 대 학자였다. 기봉이 출세한 이후 영천을 처
음 찾은 것은 1554년 4월이다. 이 때 쓴 시가 전하고, 그 해 6월 14일 밤에 ‘함담정(膈生亭)’에서 영천
을 모시고 달구경을 하며 지은 시운이 전한다. 이밖에도 영천과 관련된 기봉의 시는 6편이나 된다. 이
중 1548년 7월초에 기봉이 아우와 더불어 시산에서 영천에게 인사드리고 지은 시가 있다.
영천의 문집인 “고령세고(高靈世稿)”에는 기봉과 관련된 “대유의 시에 차운함(次大裕韻)”이란 제목의
시가 두 편이나 전한다. 이 중 한 편을 보자.
강남 대숲에서 헤어진 지 몇 달이나 되었을까
천리타향에서 또다시 서글픈 가을을 맞는구나.
어지럽고 바쁜 세월 얻은 것 하나 없고
백성 다스리기 게으르고 우둔하니
내 학문을 어찌 넉넉하다 하리오.
부질없이 이별의 잔을 드니 지는 해가 서글프고
더욱이 긴 대자리는 창주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그대를 어디서 보내건 서로 그리워하지 않겠는가마는
‘함담정’의 물이 솟구쳐 오르네.
分竹江南今幾月 異鄕千里復悲秋
紛忽度日心無得 懶拙臨民學豈優
壹把離杯愁落景 更敎長高叫滄洲
送君何處相思苦 膈生亭中水檻頭
이 시에 대한 기봉의 원운은 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였던
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영천 자신의 처지를 반성하는 태도와 기봉과의 이별을 서글퍼
하는 마음이 주된 내용이다. 특히 “그대를 어디서 보내건 서로 그리워하지 않겠는가마는 / ‘함담정’의
물이 솟구쳐 오르네.”라고 한 것은 ‘함담정’이라는 이별 공간에서의 참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정한
과 심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영천은 제자인 기봉을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했고, 기봉
은 스승인 영천에게 나아가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배우고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큰 스승 일재 이항 문하에 들어
그는 일찍이 향리에 있는 ‘봉명재’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약 400리나
떨어진 시산으로 가서 일재 이항의 문하로 들어갔다. 일재는 학문을 연찬하고자 자신의 문하를 찾아
온 기봉을 처음 만나 면접해 본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써 주었다.
하늘이 영재를 세상에 낸 것은 마땅히 그 뜻이 있으리니
그대에게 거듭 큰 뜻 세우기를 권하네.
중니(仲尼)는 물은 그 연원이 유구하다 하였고
증점(曾點)은 봄날이란 아주 빨리 간다고 읊었다네.
널리 배우고 깊이 생각하면 반드시 스스로 터득할 것이니
진실하게 행동하고 어디에서나 겸손한 자세로 배우게나.
명백한 깨달음을 얻으면 가슴이 훤히 트이게 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면 만물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을 걸세.
天挺英才應有意 勸君重立大規模
仲尼稱水淵源永 曾點吟春闊步鍼
博學硏思須自得 篤行隨處岫工夫
一朝洞會胸中豁 湊合圓融渾萬殊
이 시는 “처음 시산에 진학하였을 때 일재 선생이 준 사운시(初進學詩山時一齋先生贈四韻詩)”와 “수
재 백광홍에게 줌(贈白秀才光弘)”이라는 두 가지의 제목으로 “기봉집”과 “일재집”에 각기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서 기봉을 가리켜 하늘이 낸 영재로 평가하고, 거듭 큰 뜻을 세우라고 권유한 것은 기봉
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고, 그 이하는 학문의 방향과 태도를 일러준 것이다. 일재가 처음 제자가
되고자 온 기봉을 만나 미리 일러두고자 한 것은 다음의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상의 모든 사물을 궁리하여 보면 그 연원은 물과 같이 유구하므로 학문을 하려면 모든 것을
깊이 따져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봄날이 아주 빨리 가듯이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으므로 젊은 시절에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
셋째, 학문이란 널리 배우고 깊이 생각하면 반드시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대상이다.
넷째, 학문하는 사람은 항상 진실하게 행동해야 하고 겸손한 자세로 배움에 임해야 한다.
다섯째, 명백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가슴이 훤히 트이게 된다.
여섯째, 이러한 여러 덕목과 학문하는 바른 태도, 자세, 열성 등이 모두 어우러지게 되면 뒤섞여 있
는 만물 중에 각각 사물의 특수성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일재는 기봉이 지닌 영특하고 빼어난 학문
적 자질을 인정하고, 그를 큰 학자로 키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평안평사 부임과 관서별곡
기봉은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벼슬보
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오로지 성리학에만 정신을 쏟았고, 젊은 시절 이미 수많은 서적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549년 28세의 나이로 과장에 나아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
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552년에 홍문관 정자의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이듬해 10월
명종 임금은 영·호남 문신들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시문으로 글재주를 겨루게 하였다. 여기에서 기봉은
“동지(冬至)”라는 부(賦)를 써서 장원을 했다. 이 때 명종 임금은 상으로 “선시십권(選詩十卷)”을 하사했다.
1553년에는 그가 지향했던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순수한 학문 연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호당(湖堂)”에 뽑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1555년 봄에 뜻밖에도 평안도 평사
의 벼슬을 제수 받게 된다. 이 때 평안도의 외직에 부임한 기봉은 그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풍광을 시
문으로 음영한 바 많거니와 그 중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은 널리 회자되었다. 이 작품은 기행서경
가사의 효시로서 25년 뒤 송강 정철(松江 鄭徹)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직접적 영향을 주
었다.
관서별곡은 작자가 왕명을 받아 관서 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서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것까지의
기행 노정과 서경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가사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면 가사는 시조율을 가졌으면서
시조에 비해 길이가 긴 장편의 노래라는 점에서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이행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기행가사는 다소 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
히 기봉은 한시 부문에서도 장시와 부에 능했고, 서사시적 성격을 지닌 작품도 몇 편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봉은 평안도 변방에 부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병을 얻게 되어 더 이상 객지에 머
무를 수 없게 되었다. 1556년 관직을 그만 두고 귀향하던 도중 부안의 처가에서 작고하였으니,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 때 그의 스승 일재는 부음을 듣고 “문재와 학덕이 드물게 뛰어났는데 이를 크게 펴
지 못한 것이 아깝다며 매우 슬퍼하였다.”고 “일재유집(一齋遺集)”에 기록되어 있다. 1808년 고향 마
을의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최경창의 부채에 쓴 사랑의 시
삼당시인 중 한 사람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 1583)과의 일화 한 편이 이수광(李係光, 15
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전한다. 기봉이 쓴 “최고죽의 부채에 제함(題崔孤竹扇)”의 시에
얽힌 이야기이다.
관서 명승지에 큰 강 셋 흐르고
곳곳마다 꽃피는 정자에 말 수레가 매어 있다네.
그대 백상루에 이르거든 물어나 보아주오.
푸른 창에는 강남 꿈꾸는 이가 꼭 있을 것이니.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柱
君到百祥樓下問 碧竹應有夢江南
기봉이 평안도 평사로 있을 때 안주 땅에 있는 기녀와의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병이 들어서 벼슬
을 내놓고 낙향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평안도로 가고 있는 고죽과 우연히 마
주치게 된다. 그는 고죽의 부채에 이 시를 써 주었고, 고죽은 후에 안주의 백상루에 찾아가서 이 부
채를 그 기녀에게 전해 주었다. 기녀는 이미 부음을 받은 뒤였기에 부채를 받고 매우 슬퍼했다. 여기
까지가 지봉유설에 쓰인 내용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에 고죽은 다시 청천강변 안주성벽에 자
리하고 있는 그 백상루를 찾았다. 이 때 고죽이 지은 시가 “평양에서 백 평사의 별곡을 듣고(箕城聞白
評事別曲)”이다.
금수산 고운 경치는 옛 모습 그대로이고
능라도의 향기론 풀은 지금까지 봄이건만
님은 떠난 후 소식이 없으니
관서별곡 한 곡조에 수건 가득 눈물이네.
錦繡烟花依舊色 綾羅芳草至今春
仙娘去後無消息 一曲關西淚滿巾
떠나고 없는 기봉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애절하게 젖어 있는 시편이다. 고죽은 예전 부채를 전해
주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백상루를 다시 찾았다. 기녀는 고죽과 마주 앉아 기봉이 지은 “관서별곡”을
한 곡조 읊었다. 옛 사랑이 생각나서 흐르는 눈물로 수건을 가득 적셨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죽의
이 시가 시사하여 주는 것은 기봉이 지은 “관서별곡”이 기봉이 평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전창되었다는 점이다.
임금에게 상으로 받은 “선시보주”
기봉이 홍문관 정자로 있던 1553년 10월 명종 임금은 영·호남 문신들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시문으로
글재주를 겨루게 하였다. 여기에서 기봉은 “동지(冬至)”라는 부(賦)를 써서 장원을 했다. 이 때 명종 임
금은 기봉에게 상으로 “선시십권(選詩十卷)”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기산 마을의 기봉공파 종
가에 보관되어 왔다.
“선시보주”는 조선조 세종 연간에 주조된 초주갑인자본 10책 완질본이다. 현재 국내에는 전존본을 찾
을 수 없었고, 다만 일본의 內閣文庫와 蓬左文庫에 각각 1질이 소장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
다. 일본에 전존되고 있는 것은 권6의 1책이 결본된 상태로 소장되고 있는 까닭에 기양사 소장본만이
유일하게 완질본 상태로 전래되고 있다.
초주갑인자는 세종 연간에 주조되어 선조 초기에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 庚申字)가 주조되기까지 비
교적 오랜 동안 서적 간행에 사용되었던 까닭에 국내에도 많은 인본이 전래되고 있으나 대부분이 낙질
또는 결본 상태이며, 이처럼 10책에 달하는 전질이 온전히 전존되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기봉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 “선시보주”는 1999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07호로 지정되었다. 2010
년 국가지정 문화재로 예고되었다.
기봉 배향되어 있는 기양사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동계길 33-26번지에 있는 사당이다. 기봉 백광홍 때문에 장흥문학기행의 명소
가 되었다. 장흥 유생 이상계(李相啓)등이 1800년 초 예조에 청사소(請祠疏)를 낸 결과, 조정에서 장흥
향교에 남계 김윤(南溪 金胤), 서곡 임분(書谷 林洞), 죽곡 임회(竹谷 林膿),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
동계 백광성(東溪 白光城), 풍잠 백광안(風岑 白光顔), 옥봉 백광훈(玉峰 白光勳), 지천 김공희(芷川 金
公喜) 등 기산리 한 마을 출생인 팔문장의 사우(祠宇)를 세우도록 통고해 왔다. 따라서 백씨 후손 진항
(鎭恒), 사찬(思瓚) 등이 사림들과 협찬하여 1808년(순조 8년)에 창사하여 향사해 오다가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1901년(광무 5년)에 신축, 복설(復設)하면서 정신재 백장(靜愼齋 白莊). 정해군 백수장(貞海君 白壽長 ).
사주당 백문린(思周堂 白文麟). 석담 백한남(石潭 白翰南). 술고당 백민수(述古堂 白民秀) 등 일문 조손
5위를 추배하여 고려말 대제학 정신재를 주벽으로 지금까지 향사 해 오고 있다.
광복후 1958년에 기양강당을, 1972년에 사우를, 1974년에 내삼문(東光門)을 중건 복원 하였다. 1999년
기봉에게 명종이 하사한 “선시보주” 10권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강당을 재중건하고 직
사(直舍)도 중건 하였다.
관서별곡 가비
관서별곡의 문학적 가치와 문학사적 의미를 통해 기봉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현창하기 위한 가비는 두
개가 있다. 그 하나는 “기봉관서별곡가비(岐峯關西別曲歌碑)”이다. 이 비석은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구름치의 기봉의 묘소 아래에 있다.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건립 당시 회장 金東旭 연세대 교수)에서
전국 국문학자들의 뜻을 모아 건립하여 1987년 11월 1일에 세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양사 후정에 세운 “관서별곡비”다. 이는 2000년 1월 31일에 세운 것으로 기양사의 강당,
직사 등을 중건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비석의 특징은 전면에 “관서별곡” 전문을 새겼다는 데
있다. 이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기봉 후손 중 한 사람인 서예가 백응선이 글씨를 썼고, 그 형제들이 출연
했다. “비음기”는 최승범 전북대 교수가 짓고 윤수옥 장흥문화원장이 글씨를 써서 새겼다.
백수인<조선대 교수>
백수인 교수 mht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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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작은모임(young570519) 원문보기 글쓴이: 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