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6월 20일 남북통일 기원미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 마태오 18,19ㄴ-22)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갈라진 이스라엘이 하나로 뭉치게 되는 새날을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더불어 그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의 눈물을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날의 표징으로 이해하게 한다. 희망에는 눈물이 따르고, 죽음에서 희망이 솟아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끝이 났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는다. 그렇게 옷 입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적 실천이 필요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무식한 베드로의 이 대답은 상당한 신앙이 뒷받침되어야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질문해 오신다면,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시며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고, 걸어가셔야 할 길이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은 ‘너와 나’를 말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자란 환경이 다른 ‘너와 나’를 말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마음을 모을 수 있다면 기도의 준비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손용환신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마태오 18,21)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18,22) 그렇다면 내가 용서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저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곤 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스스로 질문해 보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는 사람은 그분을 따라 걸어가면 자연히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고 붙들어 주시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수많은 ‘너와 나’가 화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의 일치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너와 나’의 마음을 모으는 문제입니다. 어떤 ‘화해’라도 솔직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해는 먼저 상대를 인정할 때 가능해집니다. 부정과 비난 속에서는 마음을 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용서만이 서로에게 활력을 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용서의 숫자를 엄청 부풀려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의 답변은 그게 아닙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에는 숫자가 필요 없다는 단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닫게 됩니다. 닫힌 마음으로는 밝은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열면 미움이 빠져나갑니다. 은총이 밀어내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용서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부족함 때문에 실수를 하고, 그 실수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만일 이런 실수들을 용서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한 순간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족한 남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용서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반복된 실수를 하고, 똑같은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용서해주고, 친구들이 용서해주며,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늘 용서받고 있기 때문에 나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나도 용서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이 나에게 화를 내면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화를 내면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내 실수로 짜증을 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실수한 것을 용서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할 네 번째 이유는 용서는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을 때 마음속으로 살인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를 저주하고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면 거꾸로 나도 삽니다.
그러기에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기 위해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용서의 시를 바칩니다.
용서의 시
용서의 반대말은 증오랍니다.
믿는 사람은 용서를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증오를 합니다.
증오를 하면 사람을 죽이고
용서를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용서에는 사랑이 감추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은 용서를 합니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사람은 원망만 합니다.
자기만 알아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하면 행복해집니다.
자기도 남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도 남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기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면
남의 상처도 감쌀 수 있습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함도 없고, 긍정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남의 탓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이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용서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 속에 숨겨진 자기의 잘못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망각도 아니고, 무시도 아니며, 덮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랑을 하면 섭섭함이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면 또 하나의 용서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난 용서해 주는 분량만큼 용서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체
어리석은 인간이 되곤 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양해룡신부-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65년이라는 시간이 흘렸습니다.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많은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의 시간은 언제나 하나가 되길 바라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합니다. 그때 남과 북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코끝이 찡해 옵니다. 이념적, 정치적 대립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한 민족이라는 핏줄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도 깜짝 놀랍니다. 남북의 화해는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분열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는 남북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어, 하나 되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체의 언행을 삼가고,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합니다(에페 4,29).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신뢰를 깨는 악의 찬 상호 비방입니다. 그리고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남북 화해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이전에, 우리 스승께서 하셨던 위대한 사랑을 북쪽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지칠 줄 모르게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이제 어느 정도 했으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통일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해 일하는 데 어려움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북이 갈라진 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여러 가지 아픔들이 아직도 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한국을 위해서, 서로의 아픔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북도 서로 용서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화해의 물꼬를 터야하겠습니다. 이 용서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어투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그 어떤 화해의 손짓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통일에 대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 용서 그리고 사랑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는 우리 사명입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안소근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형제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랑을 제 마음에 심어주소서.
독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 하고 묻습니다. (21절) 이 물음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마디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 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마태오복음 18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삶, 곧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21 – 22절 대화에서도 핵심은 ‘형제’ 라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할 횟수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죄의 크기,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관계의 강도, 이 둘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한번 잘못하면 그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속였다면 더 이상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라면 서로 잘못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디에선가 ‘가족은 웬수다. 아무리 잘못해도 같이 살아야 하니까.’ 라는 짧은 글을 읽고 크게 공감한 일이 기억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 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마 부부는 몇 번 싸웠다고 취소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제 관계는 더 그렇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살면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형제끼리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싸웠다고 갈라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 라는 물음을 달리 표현한다면, “제 형제가 몇 번이나 저에게 죄를 지으면 형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 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일곱 번 ? 형제가 나에게 일곱 번 잘못하고 나면, 그 관계는 끝날 수 있을까요 ? ‘형제’ 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얼굴을 넣어 봅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내칠 수 있을까요 ? 형제와 다툰 경험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설령 형제가 일흔여덟 번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형제라면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태오복음 18장 문맥을 보면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조건 잘못을 덮어버린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늘 복음보다 조금 앞에서는, 계속 형제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18, 15) 이 구절은 다시 레위기 19장 17 – 18절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잘못한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할 수도 없고 그를 돌아오게 하여 함께 살아야 하는 ‘형제’ 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그 형제를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궁극적으로는 ‘형제’ 라는 관계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 이라는 말도 이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은 빗나간 듯한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받아들여 일치를 이룰 때 그 자리에는 주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뜻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성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이 짧은 복음을 읽습니다. 구체적 맥락 안에서 이 복음은 특별히 깊은 뜻이 있음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화해를 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얼마만큼 잘했고 잘못했는지를 떠나서, 아니 비록 서로에게 잘못한 것이 일흔일곱 가지 또는 그 이상 있다 해도, 그 잘못의 크기보다 형제간의 유대가 훨씬 더 강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유대가 서로에게, 상대방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형제간의 사랑을 다른 어떤 것이 가로막았다면 그것을 치우라고 말입니다.
기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네 형제와 벗들을 위하여 나는 이르네.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 (시편 122, 6 – 8)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전삼용신부-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느 날 남북통일 기원미사 때 이런 강론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통일이 되기 원하십니까? 먼저 옆의 형제들을 용서하십시오.” 사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릅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며 갈라지고, 이웃과 직장동료와 또 교회에서마저도 서로 갈라지면서 통일기원미사를 하면 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부터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더 큰 용서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하나 되는 방법으로 용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하는데 한계를 두지 말라고 하시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나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죄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 가면서까지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둘째는 상대를 눈물 흘리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미워하면 나만 손해라는 것입니다.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망가지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잘해 오던 것도 다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심지어 보복을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내 저런 사람과 헤어진 것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저런 사람과 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헤어진 것도 가슴 아픈데 왜 자신까지 망치려고 합니까? 어떤 아이들은 부모에게 반항이라도 하듯이 성적이 조금 떨어지면 아파트에서 뛰어내립니다. 성적이 떨어진 것을 비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까지 고생시키는 부모님께 고통을 주기 위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하나의 보복인 것입니다. 자신과 부모와 친구들과 사회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복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왜 영혼을 잃으면서까지 아픔을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용서해야 하는 셋째 이유는 미워지는 것은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랑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랑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죄 지은 핑계를 여자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받아먹은 것은 자신이었습니다. 여자는 그 핑계를 뱀에게 댔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본인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 미워진다면 그 사람보다도 자신의 죄가 무엇이 있나 먼저 살피고 하느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질지라도 또 다른 미워할 사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워하려면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악한 면만을 본다는 뜻은 이미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꽃밭에 누가 똥을 싸놓고 갔습니다. 꿀벌과 똥파리가 동시에 그 꽃밭으로 달려갑니다. 꿀벌 눈에는 꽃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똥파리는 그 아름다운 꽃 속에 있는 더러운 똥만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존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점만 찾아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어둠 속에 있는 것이고 똥파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침 뱉고 때리고 온갖 고통을 주는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피를 흘리셨고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하시며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 용서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책은 “윈윈(win win) 정책”입니다. 둘 다 이기는 것입니다. 어떤 웅덩이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 항상 다른 물고기를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나머지 물고기도 죽고 말았습니다. 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미움은 결국 타인도 죽이고 자신도 죽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립니다. 마리아 고레띠라고 하는 성녀는 열 살밖에 안 되었는데 동네오빠로부터 수십 군데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 청년은 소녀를 성추행하려다가 소녀가 결사적으로 반항하자 들어 올린 손바닥부터 시작하여 온 몸에 칼질을 해댔습니다. 이 소녀는 죽어가면서 그 청년을 용서한다고 말했고 자신과 함께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감옥에서도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은 마리아 고레띠가 감옥에 있는 그에게 나타나 그를 회개시켰습니다. 그는 깊이 회개하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다가 하느님나라로 갔습니다. 마리아 고레띠가 용서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구원 못 받고 그 청년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둘 다 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통일, 그것은 먼저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응어리를 없애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나라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 통일 외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텔레비전에서는 더 이상 제가 응원하는 팀의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텔레비전을 껐다고 해서 제가 응원하는 팀이 패배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그 패배하는 장면을 보지 않는 것일 뿐, 실제로는 경기가 계속 진행되었고 저의 예측대로 제가 응원하는 팀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제 손에 텔레비전 리모컨이 쥐어져 있다면 원하는 장면만을 쉽게 취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만 볼 수도 있고, 관심 있는 뉴스만 시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만 일어나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 내가 싫어하는 일, 정말로 관심 없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만을 행해야 하고, 그것만을 취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내 뜻과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 법입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 지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싫은 영화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 차에 타고 있을 때는 늦게 가는 행인을 욕 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빵빵되는 운전사를 욕을 하는 사람.
-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이라고 말하는 사람.
- 지하철에서 남은 조금만 양보해서 한자리 만들어 나를 앉게 해야 하고, 나는 한사람 더 끼면 불편하니까 계속 넓게 앉아가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 남은 내가 탈 때까지 열림 단추를 계속 누르면서 기다려야 하고, 나는 남이 타건 말건 닫힘 단추를 눌러서 얼른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이 세상은 리모컨을 누르듯이 내가 원하는 대로 쉽게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고, 또 그렇게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모든 이가 함께 어울려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용서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우리들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함께 봉헌합니다. 반세기 동안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며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요즘에는 더욱 더 그 강도가 더 세져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지금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또한 용서와 참회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면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정성이 모여질 때, 비로소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현실이 될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건없는 사랑으로 가능한 평화 -배광하신부- 남북통일 기원미사(마태 18, 19ㄴ-22) : 용서, 우리가 살 길 ▤반드시 해야 할 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언젠가 피정 중에 들었던 내용인데 갑자기 생각나서, 그때 메모했던 글을 찾아 이렇게 적어 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저항하였던 많은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혀 끔찍한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붙잡혀 온 사람들 중에는 평범하게 지내며 조용히 살다가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절규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던 구석의 저항운동가가 울부짖는 사람을 향하여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 마땅한 것이오. 전쟁은 5년 동안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피를 흘렸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조국과 민족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도대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진정 무서운 경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조국도 벌써 반세기가 지나도록 갈라져 있고, 수많은 이산가족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데, 무심한 세월은 쏜살 같이 흘러 이제는 헤어진 가족의 얼굴조차 기억에서 사라지고, 이제 남과 북의 가족들은 하나둘 땅의 먼지로 천추의 한을 안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쪽은 배부름 속에, 북쪽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서로를 향한 증오의 살기만 쌓아가고 있는데,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신앙인들은 이 모든 저주의 세월을 나 몰라라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일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남녘과 북녘의 고통 받는 동포들을 위하여 쓰고 또 써도 남을 돈들을 쓸모없는 전쟁의 소모전을 치루기 위해 끊임없이 쏟아 붓는 현실에 우리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이 죽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통일에 대한 희망과 작은 의지와 기도마저 사라진다면, 그것이 벌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그 나태함과 무관심으로 받게 될 징벌을 피하고자 또다시 움직여야 합니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고, 바꾸도록 애써야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 행동해야 합니다. 서로가 소통할 길을 뚫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능력과 한계로 불가능해 보이는 이 통일의 염원을 오늘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사랑으로 해야 할 일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로 팔려 갑니다.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갈 때, 요셉이 형들에게 울부짖는 모습이 지금 이 땅에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가 얼마나 형들에게 통곡하며 살려 달라고 하였을까? 카인과 아벨에게서 보듯, 요셉과 형들에게서 보듯, 또는 이 나라 이 땅에서 보듯이, 모든 인류의 전쟁과 살인은 형과 아우의 혈육의 전쟁이고, 피붙이들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살육의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용서뿐입니다.
요셉은 피눈물 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 이집트 파라오 왕 다음가는 재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때 형들이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건너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요셉은 증오의 한 맺힌 형들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현자 요셉, 착한 요셉의 증오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가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은 실로 감동입니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뒤,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큰 소리로 목 놓아 웁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집트 전역에 들렸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창세 45,1-2).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수많은 아픔의 세월 때문에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을 용서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울었을 때, 이미 그에게는 환희의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울음소리였을 것입니다.
이제 진정 기도해 봅니다. 요셉의 용서의 기쁜 울음소리가 이 땅에도 울려 퍼지길 말입니다.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용서하며 부둥켜 한 몸이 되어 그동안 막힌 증오의 한을 강물 같은 울음으로 모두 뚫어 버리길 주님께 간청해 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할 때, 이유와 조건 없이 사랑할 때,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 민족, 이 땅에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신명 30,3).
이는 또 개개인의 행위를 넘어 교회의 공적인 행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의미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더욱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함께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인 기도가 힘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함께 바치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공동으로 바치는 기도의 힘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이 마음을 모아 바칠 수 있는 기도라면 ‘무슨 일이든’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이런 모임과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곧 그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유다 라삐 전승의 하나인 「선조들의 어록」에는 옛 하느님 백성의 율법에 대한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율법(토라)의 말씀을 연구할 때 ‘쉐키나’ (하느님의 현존)가 그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의 말씀이 공동으로 묵상되고 있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여 계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 그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모상” (콜로1, 15)이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시어 하느님의 완전한 뜻을 선포하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던” (요한 1, 14)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쉐키나’, 지상에서 완전하고 참된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 21) 형제들은 그들의 죄에 대해 서로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그는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이라는 말은 다음에 나오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말과 같이 상징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니까요.
베드로의 ‘일곱 번’ 은 용서의 의무가 분명하게 요구하는 한 번보다도 더 자주 기꺼이 용서를 베풀려고 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22절) 이는 결국 한없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보통 사람의 ‘이치에 맞는 납득할 만한’ 기준을 뒤집어엎으십니다. 여기에는 잘못을 범한자가 회개하거나 최소한 묵시적으로라도 용서를 구할 경우라는 단서조차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원칙’ 은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라 사실 받아들이기 가 쉽지 않습니다.
잠시 성경의 다른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숫자가 반복되어 나오는 성경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카인의 후손 라멕이 아내들에게 들려준 노래입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 23 - 24)
아우 아벨을 죽인 후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된 카인은 하느님께 청하여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만나는 어떤 사람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신 것입니다.(창세 4, 15) 만일 그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의 죽음은 일곱 갑절로, 곧 완전하게 되갚음을 당할 것입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나쁜 죄를 저지른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영역 안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라멕은 자기를 해치는 사람에게 카인보다 더 무자비한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경우에서 다른 점은 카인의 죄와 카인에게 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죄에 대한 처벌은 모두 하느님의 권한 안에 들어가 있지만, 라멕은 스스로 자신의 보복 권한을 주장한 것이지요. 이처럼 라멕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무절제한 보복행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끝없이 순환되는 복수와 폭력의 사슬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의 형제애를 대응시키십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확대된 죄는 그에 대등한 무한한 선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나칠 정도로 용서해야 될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매정한 종의 비유가 베드로에게 주는 대답의 마지막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 33. 35)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 21)
“우리 모두 축구공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축구공의 무게는 400g 조금 넘습니다. 또한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축구공입니다. 더군다나 이 축구공은 값비싼 보석처럼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걷어 채이고, 집어 던져 집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축구공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열광 속에 있으며, 하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이런 축구공처럼 걷어 채이고 집어 던져진다 하더라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모습이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그렇게 커다란 힘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단지 작은 힘만 있다 하더라도, 아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그 자체만 하더라도, 그 힘은 주님으로 인해서 커다란 힘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이런 힘을 믿지 못합니다. 나의 이 작은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나의 능력을 스스로 무시하곤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마음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이 담긴 기도들이 같이 어울려질 때 하느님의 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그런데 우리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이상 모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만을 위한 기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만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만을 입에서 맴돌게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은 남북통일기원미사, 즉,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단순한 행사치례로 그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기도한다고 또한 기도해야 한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하지만, 진정으로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미사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통일도 더욱 더 늦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통일되기를 주님께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원했을 때, 우리의 통일도 그리 먼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