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간의 2차 전쟁은 白河(鴨綠추정)넘어 북경 通州와 郭州등지에서 벌어짐,河間 근방에 肅孫寧의 이름을 딴 肅寧은 고려 肅州로 보인다.
거란성종의 2차침략으로 인해 전쟁준비는 북경인근에서 시작하나 고려군이 밀리면서 고려개경은 분탕질당하고 이로 인한 고려현종의 피난로는 한반도 지명의 위치와 매우 다르다 피난지를 따라가보면 매우불합리한 결과가 나타난다..
피난처가 개경->양주->광주->라주->전주->공주->청주->개경인데 지명은 조선의 지명과 같지만 개경에서 1일만에 광주를(250여리) 도착하고 광주에서 12일만에 라주(800여리)에 도착하고 라주에서 전주(300여리)를 가는데 13일이 걸린다.전주에서 공주(200여리)로 하루만에 도착한다.공주에서 4일만에 청주(100여리)에 도착하고 청주에서 개경(500여리)을 8일만에 도착한다.중간의 행적에서 쉰곳은 분명히 기록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한반도에 대입하면 현종은 먼길은 날아다니다 가까운 길은 기어다닌 결과가 되니 결코 피난지는 한반도가 아니라는것이다.(아래 피난지 행로를 보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E041E4CE0F5E52F)
이 피난로가 한반도라면 현종은 피난을 날아 다니다 기어 다녔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09-1010
冬十月丙午朔
以叅知政事康兆爲行營都統使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
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
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
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
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率兵三十萬軍于通州以備契丹.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하고
검교상서우복사상장군 안소광을 행영도병마사로 하고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하고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 하고
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하고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하여
30만군을 통주에 배치하여 거란 공격에 대비한다.
통주는 어디인가? 북경 바로 우측이 통주이고 고려 영토의 북변이었던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097024CE33D3C29)
거란군이 공격해 점령한 고려 郭州가 水+郭(곽)州로 변형된것으로 보이고 ,하간 좌편에 거란장수 肅孫寧의 이름중 가운데 자를 뺀 肅寧이란 지명이 보인다 고려 肅州로 추정된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0-1010
癸丑契丹遣給事中高正閤門引進使韓杞來告興師叅知政事李禮均右僕射王同穎如契丹請和.
거란이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1-1010
十一月丙子朔遣起居郞姜周載如契丹賀冬至.
기거랑 강주재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사로 축하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2-1010
契丹主遣將軍蕭凝來告親征.
거란군주 성종이 장군 소응을 보내 고려를 친히 정벌하겠다 전하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3-1010
庚寅復八關會王御威鳳樓觀樂.
팔관회에 임금이 위봉루에서 관람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4-1010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渡鴨綠江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거란의 성종이 장수를 데리고 보병과 기병40만으로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했다.
양규와 이수화 등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백하와 영정하가 압록으로 추정)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5-1010
己亥康兆與契丹戰于通州敗績就擒.
통주에서 강조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로잡혔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6-1010
庚戌丹兵陷郭州.
거란병이 곽주를 함락하였다.(지도상 곽주는 북경 우측으로 보인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7-1010
壬子丹兵至淸水江安北都護府使工部侍郞朴暹棄城遁州民皆潰.
거란병이 청수강에 이르자 안북도호부공사시랑 박섬이 성을 버리자 순주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8-1010
癸丑丹兵至西京焚中興寺塔 甲寅陷肅州.
거란병이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를 불사르고 다음날 숙주를 함락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19-1010
庚申大流星隕于郭州.
큰 유성운이 곽주에 나타났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20-1010
辛酉契丹主攻西京不拔解圍而東.
거란 성종이 서경을 공격하엿으나 둘려싸 와해시키지 못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21-1010
癸亥西京神祠旋風忽起契丹軍馬皆僨.
서경 신사에 홀연히 바람이 부니 거란군사와 말들이 모두 넘어졌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22-1010
召還河拱辰柳宗復其爵.
볼러 돌아온 하공진,유종의 작위를 복위시켰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23-1010
壬申夜王與后妃避丹兵南幸.
밤에 왕과 왕비가 거란병을 피해 남으로 피난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1-24-1010
甲戌次楊州遣河拱辰及戶部員外郞高英起奉表往丹營請和.
양주에 행차하여 하공진과 호부원외랑 고영기를 화청사절단으로 보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1-1011
○(辛亥)二年春正月乙亥朔契丹主入京城焚燒*大廟宮闕民屋皆盡. 是日王次廣州.
2년 춘정월 거란성종이 개경으로 들어와 분탕질하고 대묘궁궐과 민간가옥을 없앴다.
그날 왕이 광주에 도착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3-1011
戊寅王發廣州次鼻腦驛.
3일후 왕이 광주를 떠나 비뇌역에 당도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4-1011
壬午次長谷驛.
4일후 장곡역에 당도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5-1011
乙酉丹兵退.
(장곡역에 도착한 3일후) 거란병이 물러갔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6-1011
丙戌王過仁義縣次水多驛丁亥踰蘆嶺入羅州.
다음날 왕이 인의현을 지나 수다역에 당도하였다. 다음날 노령을 지나 나주에 들어갔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7-1011
乙未王回駕次伏龍驛.
8일만에 왕이 가마를 돌려 복룡역에 당도했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8-1011
戊戌次古阜郡己亥次金溝縣庚子次全州留七日.
3일만에 고부군에 당도하고 다음날 금구현에 당도하고 다음날 전주에서 7일을 묵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09-1011
壬寅楊規金叔興與契丹戰死.
양규와 김숙흥등이 거란전에서 전사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10-1011
癸卯契丹主渡鴨綠江引去.
거란 성종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11-1011
以蔡忠順爲秘書監/朴暹爲司宰卿/周佇爲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韓昌弼爲閤門通事舍人.
暹自安北遁還京都挈家往其鄕務安縣道逢車駕隨至羅州已而辭歸又聞兵退來謁乃有是命時議譏之.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12-1011
二月丁未發全州次礪陽縣戊申次公州留六日. 納金殷傅長女爲妃.
전주를 출발해 려양현에 도착하였다.다음날 공주에 행차하여 6일을 묵었다.김은전의 장녀를 비로 맞았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14-1011
丁巳次淸州.
4일만에 청주에 행차하였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2-16-1011
庚申發淸州 丁卯還京都入御壽昌宮
청주를 출발해 8일후 개경 수창궁으로 환도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65C254CE37CB752)
주) 靑州=淸州 다.
운영자 심제 글.
첫댓글 요나라군과 몽골군은 고려를 침략시 군대를 양방향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경을 거쳐서 개경으로 온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출발할때 군대를 나누어 한반도 방면과 대륙방면으로 양쪽으로 공격한 겁니다. 몽골군이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 생각으론 일차로 통주를 친후 두갈래로 나누어 곽주로 내려오는 길과 숙주로 내려오는 길로 나누어 공격한것으로 보입니다.소손녕이 동부 ,성종이 서부로
고려의 서경에 대해서 조금 더 찾아볼 계획입니다. 김부식이 동황성이 서경동쪽에 있다라고 한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안국의 동황성을 김부식이 인식했다면 그 서쪽에 서경이 있다는 것인데 요사에는 개경의 동쪽으로 말을 타고 가야 서경이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개경의 동쪽으로 말을 타고 가야 서경이 있다"고 나오지 않고 " 自開東京馬行七日~"이니 개경에서 동경으로 말을 타고7일을 가면~의 내용이 요사에 나오지요.고려의 왕건이 인식한 서경은 당에서 몇번 안동도호부를 옮긴곳으로 그곳을 평양성으로 알고있엇을지 모른다는 생각 입니다. 즉 서경은 고구려 원래 평양성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해설을 그대로 따라해서 원문에 그렇게 쓰여있는지 알았습니다. 동경이 말을 타고 7일 거리였군요 큰 오해를 할뻔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