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천기행紀行.
홍반장은 그들의 사진을 찍자마자 저만큼 앞서가는 일행들을 불러 세워 교각 위에 나란히 서게 하더니 이리저리 자세를 교정해준 다음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고 나서는 홍반장은 부랴부랴 앞쪽을 향해 걸어갔다. 홍반장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송하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지나갔다.
“오지랖이 넓긴 하지만 참 쾌활하고 성건진 친구지요.”
그녀가 송하를 힐끗 쳐다보더니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성건지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그가 아하!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
“속이 깊다, 또는 어른스럽다.라는 좋은 뜻이지요. 대체로 나이에 비해 농익은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인데, 그 안에는 이것저것 참견하기를 좋아한다는 뜻도 은근히 들어 있지만 호감이 가는 긍정적인 말이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물어보았다.
“저, 산여울 님은 혹시 선생님이세요? 어쩐지 말하는 방식이 꼭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듯한 분위기가 배어있는 같아요.”
송하는 피식 하고 웃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제가 말을 좀 딱딱하게 하는 편이지요. 그렇지만 옛날이야기도 잘하고 농담이나 우스개 같은 소리도 잘하는 편인데, 아마 주미호 님 앞에서 약간 긴장을 하고 있나봅니다.”
그녀는 하얀 이가 살짝 비치게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교각 쪽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전혀 긴장을 하고 계신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리고 이야기를 잘 하신다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실래요. 제가 이야기 듣기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는 또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라, 좋습니다. 원래 이야기란 듣는 사람도 재미있어야 하지만 하는 사람도 즐거워야 하는 것인데 주미호 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제가 어젯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지요. 실은 어젯밤 꿈속에서 전설에 나오는 오작교烏鵲橋를 보았거든요. 아마 이번 진천 답사예정지를 소개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은 농다리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봐서 그런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였겠지만 우주에 무지개처럼 떠있는 오작교는 정말 무한정 크고도 아름다웠답니다. 거대한 괴조가 교각이 되어 다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수많은 새들이 머리를 맞대어 겹쳐 있으면서 교각 위로 상판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장관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작교의 아름다운 모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오작교가 바로 별들이 돌아다니는 통로였는데, 나도 그 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작교 위를 끝없이 날아다녔거든요. 그것도 사슴형상의 빛나는 초록별과 함께요.”
“네? 사슴형상의 빛나는 초록별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하를 쳐다보았다.
“네, 사슴형상의 초록별과 함께요. 그곳에서 본 별의 생김새는 아주 다양했어요. 물론 둥근 것도 있었지만 삼각뿔모양, 원통모양, 동물이나 물고기모양이나 혹은 곤충이나 사람의 형상인 별들도 날아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러면 산여울 님께서는 오작교 위를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사슴형상의 초록별과 함께 날아다니신 거로군요. 그런데 별들이 다 그렇게 조그마하던가요?”
“ 그렇지요, 꿈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더 신바람이 났겠지요. 그리고 별들이 조그마했는지 아니면 내가 별만큼 커져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송하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면서 자신의 발등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야기를 잘하시네요. 그리고 아직도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산여울 님께서는 마음도 키도 앞으로 얼마든지 더 자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다음에도 부탁을 하면 이야기를 또 들려주실 수 있나요?”
송하는 그녀의 차분한 어깨를 보며 초록색 패딩점퍼의 탄력이 그의 가슴으로 물결처럼 번져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지요.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있다면 이야기를 하는 즐거움도 있으니까요.”
농다리를 건너자 붉은 칸나 꽃이 활짝 피어있는 꽃밭을 지나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농암정을 향해 걸어갔다. 농암정에는 많은 회원들이 벌써 올라와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쪽 일행들 중 여성회원인 세오녀 님이 그들에게 다가와 고개를 끄덕하더니 그의 옆에 서 있던 그녀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사진을 찍고 있는 무리들 속으로 데려가 합류했다. 아마 버스에서 좌석 파트너인 것 같았다. 송하도 그 또래의 몇몇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농암정 고개를 넘어 건너편에 있는 초평호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초평호가 작은 산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감돌고 있는 모양은 거대한 파란 누에를 보는 것 같아 왠지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데크로 만들어놓은 조망 포인트에 서서 물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 눈을 맑은 바람으로 씻어내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맑은 가을햇살도 좋았고 파란 물과 산기슭의 푸른 숲도 좋았다. 잠시 후에 저 위쪽에서 여행자클럽 회원들은 버스로 모여 달라는 말이 들려왔다. 다음 일정은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한다면서 진천의 별미인 한방 오리백숙으로 정성껏 준비를 했으니 마음껏 드시면서 몸보신을 하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무 중에서 음식점 상호에 가장 많이 쓰이는 수종은 아마도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와 등나무일 것 같았다. 평소에 사람들 눈에 가장 많이 띄고, 친근하고, 또 용도가 다양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무라는 이미지가 전해주는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한몫을 하고 있음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클럽 일행들이 도착한 음식점도 농다리 물빛 느티나무집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서 2층으로 올라갔더니 넓은 홀 안에 4인용 식탁이 줄맞춰 놓여있었다. 옆에 있던 보물섬 님이 송하의 소매를 끌면서 저쪽 창가 쪽을 가리켰다.
“산여울 님, 저리로 가서 앉읍시다. 창밖의 경치가 멋있는데요.”
“그러지요, 보물섬 님. 창밖이 잘 내다보이는 그쪽이 좋겠네요.”
그들은 창 쪽으로 가서 4인용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식탁에는 벌써 반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가스불 위에는 커다란 냄비에 담긴 오리백숙이 설설 끓고 있었다. 진하고 구수한 오리백숙 냄새가 홀 안을 흘러 다니며 식사시간을 기다려왔던 촉촉한 입맛을 부추겨댔다. 창밖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 가을 햇살을 받은 겨자 색깔의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통통 튀어 다니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지나가면 수많은 겨자 색깔 알갱이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색의 농담을 만들어냈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 풍경의 중간쯤에 허수아비 하나가 서 있었다. 요즈음 허수아비들은 옛날 허수아비들 보다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십자로 된 나뭇가지에 대충 얼기설기 천 조각을 걸쳐놓은 게 아니라 밀짚모자를 쓰고 품 넓은 한복 저고리에 핫바지를 갖춰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옷 안으로 밀도 큰 공기가 들어가 팽팽해지면 허수아비의 몸에 생기가 돌았다. 그럴 때면 허수아비가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송하는 저 허수아비의 꿈이 있다면 천년호千年狐처럼 진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구차한 생각 없이 항상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독한 허수아비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허수아비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람이 되고 싶은 허수아비와 허수아비가 되고 싶은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욕심이 많은 것일까, 파란 하늘 아래 빈 들판을 지켜보고 있는 허수아비와 차가운 보름달 아래 하얀 뜰을 쳐다보고 있는 눈사람은 누가 더 쓸쓸할까 하는 생각들을 해보았다. 허수아비와 눈사람이 고독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그런 게지. 하는 생각이 들자 송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진천기행紀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