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아가토스)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칼로스)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6강]
내 속에서 죄가 일을 해서, 나를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건, 내 안에 선이 없기 때문이래요. 그걸 행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죽을 수가 없다니까요. 인간은! 그래서 죄를 시켜서, ‘야! 가서 좀 도와 줘라!’ 그런 거예요. 율법을 시켜서! 예수를 시켜서!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 거룩한 일을 행할 능력이 그 피조물에게는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일을 했더니, 전부 악이야. 그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해. 희생제사 죽으라고 드리고, 열심히 간음하고, 열심히 거짓말 하고. 나는 선한 일을 하려고,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고 하는 데, 하나님은 전부 그걸 싸잡아 악(惡)이라 그런단 말예요. 그렇게 나의 최선이 악인데, 어떻게 나에게서 선(善)한 것이 나옵니까? 이사야서 64장 이야기처럼! ‘우리의 최고의 의(義)는 더러운 똥걸레’라 그러잖아요? 더러운 옷이다. 필시 랙(filthy rags)이다!
잘 들어보세요. 18절에 쓰인 선이라는 단어가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달라요. 앞에서는 ‘아가또스’의 선(善)이고, 뒤에서는 ‘칼로스’의 선이에요. 헬라어는 의미가 달라요. 선이라는 똑같은 그런 단어인데도 그가 가진 의미가 달라요.
‘아가또스’는 진짜 참 선(善) 있죠? 하늘의 그것, 진리, 그 내용인 그것! ‘칼로스’는 그것이 오게 되면 ‘선하다’ 인정받는 그 선을 이야기하는 거. ‘아 저것 참 선하네. 선하게 이루어졌네.’하고 인식이 가능하면, ‘칼로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진짜 그 선은, ‘아가또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진짜가 없으니까, 율법이 이루려고 하는 선, 그 ‘칼로스’가 당연히 안 이루어진다는 뜻이에요. 그 진짜 선이 없는데, 어떻게 ‘칼로스,’ 율법이 이루고자 하는 그게 이루어지니? 너희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아? 이런 말이죠. 그 ‘아가또스’가 없으니!
‘네오스’라는 게 진짜 ‘새 것’이라는 거거든요. 뉴(new), ‘네오스’예요. 그 뉴, 진짜 새 것이 있으면 ‘카이노스, 새 것’이 돼요. 둘 다 ‘새’거든요. 새 것! 마찬가지예요. 그 진짜 새 것이 나에게 주어지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카이노스’의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진리! 그 새 것, 그 ‘아가또스’가 전제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 말하는 거예요. 그 ‘아가또스, 그 선’이 없으므로, 너희들은 선에 이를 수가 없어.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사람 안에 ‘아가또스’의 선이 없어요. 그 ‘아가또스’의 선이 없으니, ‘카이로스’의 선도, 요원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도와주는 거예요. 선이 있으면, 그것으로 선에 이르면 되는데, 선이 없으니, 죄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율법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예수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밖에, 살아날 수 없은 존재구나!’라는 걸 아는 걸,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 예수를 통하여! 그 율법을 통하여!
그렇게 해서 바울이 깨달아 안 것이 있어요. 율법의 선한 것을 자기는 악한 것으로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게 피조물의 한계! ‘이게 나의 처음자리구나!’ 그게 21절이에요. 보세요.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내가 법을 깨달았다. 법이 뭔지를 알았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게 악으로 존재하더라. 이런 말이에요. 그 선을 행하려고 나는 열심히 그 율법, 말씀을 갖고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내 안에 있는 악으로 인해, 죄만 짓더라는 거예요. ‘선을 행하려고 하는 나에게, 그게 악으로 존재하더라. 이게 피조물이다.’ 그 말이에요.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기 자신의 열락(悅樂)을 추구하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