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가족 나들이 / 전성훈
< 담양으로 가는 길, 여행 첫째 날 >
얼마 전부터 자동차 운전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처음 운전을 시작한 사십대에는 온 종일 운전해도 피곤한 줄 몰랐는데 이제는 두 시간 이상 운전하면 무척 힘들다.
온 가족이 전라남도 담양 일원에 2박3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들네 가족은 시월 18일 오전에 떠났고 우리 식구는 오후 3시경 출발했다. 다행히 길에서 정차하는 일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300km 가 넘는 장거리 운전을 하니 젊은 시절과 달리 정신적 피로감이 심했다. 요즈음은 자동차 내비게이션 앱이 실시간 교통 상황을 반영하여 길을 안내한다. 옛날과는 천지개벽이요 상전벽해의 세상이다. 오래 전에는 집에서 중부고속도로를 가려면 신내동 구리 I/C를 지나 구리/토평 톨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다. 이번에 집을 나서자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새로 난 도로로 안내했다. 처음 가 보는 길을 온전히 내비게이션에 의존해야 하니까 피곤했다. 내 머릿속에 개략적인 그림을 그리고 자세한 것은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좋은데 온통 기계의 명령에 의존하려니까 정신이 혼란하고 짜증이 났다. 우여곡절 끝에 공주 밤으로 유명한 정안휴게소에 들려 오후 5시 반경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가을이 깊어가니까 해도 일찍 지고 깜깜한 밤도 일찍 찾아왔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운전하기가 몇 곱절이나 힘들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안경으로 바꿔 쓰고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전라남도 지역에 들어서자 갑자기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다. 자동차 와이퍼를 켜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행히 목적지인 담양에 이르자 비가 그쳤다. 숙소인 메타 팬션에 무사히 도착하여, 편의점에 들려 소주와 맥주 한 병에 마땅한 안주가 없어 오징어포를 샀다. 평소에는 이른바 소맥을 전혀 마시지 않지만 피곤함을 떨쳐버리려고 맥주와 소주를 섞어 단숨에 비웠다. 곧바로 취기가 올라서 일찍 잠을 청했다.
< 메타세콰이어의 길, 여행 둘째 날 >
술을 마시고 피곤한 상태에서 꿀 같은 단잠에 빠졌는지 다음 날 새벽 4시경 잠이 깼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오전 6시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어 입고 팬션 주변을 산책했다. 지난밤에 올 때는 깜깜해서 몰랐지만 옛 메타세콰이어 길옆에 팬션이 들어섰다. 10여 년 전에 아내와 이곳에서 2인용 자전거를 탔는데 지금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메타세콰이어 숲길도 중간에 도로를 내어 숲길이 나누어졌다. 옛 정취는 없어지고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새로운 모습만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자연 환경은 드물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일어나면 어떤 곳이든지 변하게 마련이다. 그런 변화가 올바른 방향인지 아니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인지는 좀 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이른 아침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시 한 수를 적는다.
< 메타세쿼이어 >
이웃나라 중국이 고향인 메타세콰이어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의 뜻을 가졌다는 메타세콰이어
서해 바다를 건너 전라도 담양으로 옮겨와
새로운 환경에서 잘 자라도록
극진히 돌보아준 사람의 정성에 보답하듯이
날렵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큰 키를 쑤욱 뻗치네
숲길 양편에 사이좋게 오순도순 서로 의지하며
고향 생각에 함께 웃고 울었을 메타세콰이어
새벽길 메타세콰이어는 오늘도 엷은 향기를 풍긴다
아름다운 숲길을 만들었던 선각자의 노고를 기억하며
너와 나, 우리들도 네 편, 내 편으로 등지고
손가락질 하지 말고 두 손 마주 잡고 나아갈 수는 없을까
< 소쇄원에서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소쇄원을 찾았다. 소쇄원은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목격하고 출세의 뜻을 포기한 채 고향으로 낙향한 선비 ‘소쇄옹 양산보‘선생의 거처였다.
소쇄원은 양산보 선생의 호, 소쇄옹(瀟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소쇄원(瀟灑園)은 세상과 절연하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고고한 선비의 기상과 뜻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진 멋진 곳이다. 두세 번 소쇄원을 다녀갔지만 양산보 선생의 깊은 속마음을 내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대나무 숲길을 지나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황토 길은 세상을 벗어나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같다. 산속의 깨끗한 계곡에는 송사리 떼가 유유히 유영하고 세 마리 오리 식구가 아침 산책을 한다. 숲속엔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귄다. 가을이 익어가는 단풍 속에 따사로운 햇살이 퍼지고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흐느적흐느적 흐른다. 소쇄원 건물 뒤편 골짜기의 소나무 숲은 엄마 품처럼 소쇄원을 꼭 껴안고 있다.
< 죽녹원에서 >
소쇄원을 벗어나 담양의 별미인 대통밥을 먹으러 죽녹원으로 향했다. 죽녹원 근처 한 음식점에서 대통밥을 사기그릇에 퍼놓고 내가 좋아하는 토하 젓갈를 얹어 비벼 먹는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돼지고기 떡갈비의 톡 쏘는 매콤한 맛도 일품이요, 담백한 백김치에 대순으로 만든 정갈한 반찬도 입맛에 딱 맞았다. 모처럼 입이 호사하고 배부른 기분으로 죽녹원을 걸었다.
죽녹원의 울창한 대나무 숲, 여린 댓잎을 주식으로 하는 아기판다의 동상과 인공폭포를 보며 손녀와 손자는 소리를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대나무 숲을 한참 바라보면서 대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를 느꼈다. 젊은 날 해남 대흥사 절집 부근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어찌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대나무가 윙윙하며 통곡을 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슬며시 일어나 대문 밖으로 나오니 하늘을 가로지르며 잃어버린 짝을 찾아 소리치는 대나무의 한 맺힌 듯 한 통곡소리에 내 마음도 얼어붙어버렸던 시절이 생각났다.
< 가족의 의미 >
여행지에서 맞이한 며느리의 생일, 아내는 집을 나서기 전에 미역국을 준비했다. 며느리를 생각하는 아내의 지극한 정성, 시어머니의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토로하는 며느리, 자그마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네 살 손녀와 세 살 손자는 목이 터져라 엄마의 생일 축하 노래를 두 번이나 불렀다. 성장 환경이나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이 결혼하여 다른 집안에 들어와 한 가문의 일원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간에 서로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하고 이해하고 손을 내밀어 포옹하는 가정만이 원만하고 화목한 집안을 가꾸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을 떠날 때 마다 키가 크고 다양한 단어를 자유롭게 말하는 손녀와 손자의 모습이 정말 대견하다. 손주들이 자랄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리부부는 늙어 가는 게 조금 서글프다.
< 집으로 가는 날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천 강천산에 잠시 들려 멋진 계곡과 장엄한 폭포,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 수없이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을 보면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죽녹원의 빼꼭한 대나무, 메타숲길의 멋진 메타세콰이어, 소쇄원의 소나무를 보면 자연은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다시 느꼈다. 모든 생명체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노병사의 굴레를 겪으며 지낸다. 나이 들어 늙는 걸 서러워하지 말고 자연스런 현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노년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01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