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베드로는 독자들이 참 교사들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훈을 기억해야 하는 것과 관련하여,【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참조: 유 18)”라고 경계하고 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는 1:20의 주석을 보라.
“말세에”(ἐπ’ ἐσχάτων τών ἡμερών)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롱하는 자들”은 엠파이그모네(ἐμπαιγμονῇ)로서 ‘속여 농락하는 자들’, ‘조롱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남에게 진리 및 자유를 가르치는 지도자로 자처했지만, 그들 자신은 정욕(에피튀미아스, ἐπιθυμίας: ‘의욕’, ‘바람’, ‘간절한 욕망’, ‘열망’ 등 자연적인 인간의 욕구 전체)을 좇아 행하는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가짜 교사들을 가리켜, 버트람(Bertram)은 “아마도 영지주의 난봉꾼들일 것”1)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기롱의 내용에 대해,【4】“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은 가짜 교사들인 기롱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는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질문이다(시 42:3, 79:10, 렘 17:15, 말 2:17 등등).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E. A. Blum.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의 강림”의 “강림”(재림)은 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이다(마 24:3, 27, 37, 39,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 1:14), “그 날”(롬 13:12, 고후 3:13, 살전 5:4),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주 예수의 날”(고후 5:5), “주의 날”(살전 5: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말과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쓴 것을 벗기다’, 또는 ‘벌거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주님의 재림이란 모든 것을 벌거벗겨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다(벧전 1:7, 4:13, 살후 1:7).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마 24:3, 27, 37, 39,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이 말의 통속적인 뜻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거나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전문적인 용어로 군대에 의해 나라가 침략 당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또, 특별히 왕이나 행정 장관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곳을 방문하는 일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곧 파루시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상에의 침입과 백성의 궁극적인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W. Barclay).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는 신이 예배드리는 자에게 현현하는 것에 사용되었고, 또 황제의 즉위식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리스도께 적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나 하나님을 반역하거나 모독하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메카더, W. Barclay).}(약 5:7의 주석).
신약 성경의 재림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에 속한 문제로서(마 24:36, 막 13:12, 행 1:7), 밤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은 때에 임하신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순간에는 번개가 번쩍 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알게끔 오신다(마 24:27, 37, 39, 살전 5:2, 벧후 3:10).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위엄과 영광 그리고 대 격변의 사건이며(살전 4:16), 성도들이 함께 강림한다(고전 15:23, 살전 3:13). 또, 재림 사건은 마지막 심판(롬 1:8, 2:2-10, 3:6)과 모든 것의 완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마지막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므로, 영원한 형벌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뿐 아니라(롬 5:9-11) 완전한 영광의 생명을 얻는다(고전 15:53).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기서의 모든 삶이 그 자신에게 진노를 쌓는 것이므로, 마지막 형벌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롬 2:5).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어두운 비밀들이 밝혀지고, 마음의 뜻과 동기까지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마지막 심판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불신자들에게 갑작스런 파멸이며 진노요 저주이다(살전 1:10, 5:3, 9, 살후 2:10-12). 이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은 파멸하게 된다(고전 15:24, 살후 2:8).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실질적인 힘을 상실한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된다(고전 15:24-28).
그 반면에, 성도들은 신령한 몸(골 3:4, 롬 8:23, 빌 3:21, 고전 15:42-44)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죄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8:18-21).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만물을 지배한 그리스도도 아버지께 복종하게 된다(고전 15:24-28).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⑴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벧전 4:7), 주님을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마 24:36-51, 벧전 4:7, 살전 3:13, 5:23, 롬 13:11-14). ⑵ 인간적인 생각으로 재림이 아무리 지연되는 것 같더라도 실망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데(벧후 3:4), 이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과 같은 관념을 갖지 않으시기(벧후 3:8) 때문이다. ⑶ 그 날에 우리는 사랑의 친교 중에 발견되도록 해야 한다(벧전 4:8-9, 고전 16:14, 22). ⑷ 그 날을 위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요일 2:28).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의 올바른 자세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모든 일과 의무를 주님 안에서 더욱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모든 일은 신자의 노력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신자와 함께 항상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ἀφ’ ἧςγὰρ οἱ πατέρες ἐκοιμήθησαν, πάντα οὅτως διαμένει ἀπ’ ἀρχης κτίσεως)는, 구약성경의 조상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조상들 및 독자들의 조상들이 죽은 이래 만물이 창조된 처음부터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데(단 7:13, 막 8:38, 9:1, 13:26, 요 14:3, 고전 15:51, 살전 4:15, 17, 약 5:7, 8), 그들은 세상 만물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재림의 약속들에 대해서 조롱조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의 논지는 재림의 약속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베드로의 적들의 논거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 논거는, 재림의 약속은 아주 오랫동안 지연되어 왔으므로,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안전하다는 것이다[참조: 8절 이하]. 둘째 논거는 조상들이 이미 죽었는데도 세계는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정확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특성상 변하지 않는 우주이므로, 그러한 우주 안에 재림과 같은 돌발적인 대격변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그들의 논거는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이 아니라, 피조된 물질 세계에 근거하고 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난해 성구 사전 2권'>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