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의 숨결에 게재한 원고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돌문화
돌은 아기가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첫 생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돌을 초도(初度) 즉 맨 처음 닥치는 차례라고 썼는데, 한 개인이 겪는 첫 번째 통과의례임을 뜻한다고 하겠다. 1781년 김홍도가 그린 <평생도> 는 한 사람의 이상적인 일평생을 여러 폭으로 나누어 병풍으로 꾸민 풍속화인데, 평생도의 첫 그림이 돌잔치다.
돌잔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경우 안지추(531〜591)가 자손을 위해 저술한 교훈서인 『안씨가훈』에 “강남풍속에 아이가 출생한 지 1년이 되면, 새 옷을 마련하고 목욕을 시켜 장식하는데, 아들이면 화살ㆍ종이ㆍ붓을, 딸이면 가위ㆍ자ㆍ바늘ㆍ실 따위를 사용하고 더불어 음식물과 보배ㆍ보물 등을 아이 앞에 갖다 두고는, 그 어느 것을 가질 생각을 내는가를 관찰하여 아이의 미래를 예상한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00년이 넘는 오랜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 돌잔치가 일반화되었다. 『묵재일기』를 쓴 이문건(1494~1567)은 조선 유일의 육아일기를 남긴 분이다. 그는 돌에 손자가 돌잡이 하는 것을 보고 시를 남겼다. 이문건은 손자가 필묵을 잡아, 아이가 문장을 업으로 삼을 아이라고 좋아했고, 집안의 장식품인 투환을 잡자 아기가 나중에는 덕을 이루어, 온화한 가운데 성인과 짝할 만큼 되기를 기원했다. 세 번째로 활을 잡자, 남자가 문무를 겸해야 한다고 여겼다. 쌀을 잡자 백성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곡식에 의존해야 하는 법, 모름지기 양육하고 평강하게 하게 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도장을 잡자, 이것으로 시험 삼아 관직을 오를 조짐이니, 좋은 신하가 되어 임금을 보필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정조실록』에는 1791년(정조 15년) 6월 8일에 원자(뒷날 순조)의 돌잔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날 창경궁 집복헌에는 온갖 장난감을 담은 소반이 차려졌다. 이날 원자는 사유화양건이란 모자를 쓰고, 자주색 비단 겹저고리를 입고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원자는 먼저 채색 실을 집고 다음에 화살과 악기를 집었다. 원자가 돌잡이를 하자, 원자의 미래가 궁금했던 정조는 자신 곁에 있는 승지와 규장각 각신들에게 들어와서 보라고 했다. 이날 정조는 종친들과 대신들은 물론, 서리, 하예, 군졸, 거리의 백성들에게도 돌떡을 내려주었다. 원자의 돌을 함께 기뻐하고 싶어 하는 정조의 마음을 읽어볼 수가 있다.
이처럼 돌은 사대부 가문만이 아니라, 왕실에서도 지켜진 풍습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하고, 먹는 것도 풍요롭기 때문에 유아사망률이 낮지만, 옛날에는 위생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고, 의료 혜택이 풍족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의료혜택이 민가와는 확연하게 차별되는 왕실에서도 왕의 자식 가운데 돌이 지나기 전에 죽는 이들도 있었다. 백일잔치를 치렀던 것도,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백일을 넘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풍습이다.
예전에는 아기의 첫 외출 시에 북어머리를 옷섶에 달고 나간다거나, 외가에 갈 적에 숯이나 재를 얼굴에 발라 밉게 보이거나, 고추를 꽂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나쁜 귀신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였다. 자손이 번창 하지 못한 집안에서는 이러한 습속이 매우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렇게 무명 장수를 빌고, 나쁜 기운을 멀리하고자 하는 풍습이 발전한 것은,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에 사람들의 나름의 대책이었다고 하겠다.
정조는 원자가 태어난 후, 첫 돌이 된 후에야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아기가 돌을 넘기면 초기 성장과정에서 한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원자의 돌을 기념해,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는 명령을 내려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돌날 아이의 무사함과 미래를 축원하기 위한 잔치를 했고, 이것이 점차 통과의례로 정착된 것이다. 백일잔치는 차츰 의미가 사라져가지만, 돌잔치는 지금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는 생명력이 긴 전통의례다.
우리 조상들은 먼저 돌을 맞이하기 전에 돌 치성을 드렸다. 예전에는 만신당에 가서 흰밥과 미역국, 정화수, 시루떡을 쪄서 상을 차려놓고 아기를 점지해준 산신(産神)에게 감사하고, 아이의 부병 장수와 복록을 기리는 치성을 올렸다. 요즘에야 이런 치성행위가 미신으로 간주되지만, 아이가 태어나 무사히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금도 같은 만큼, 각자가 믿는 종교에 따라 아이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마음가짐은 필요할 것이다.
아기가 첫돌에 이르면 발육이 현저하게 달라지며 자기 의사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걸음마도 가능해진다. 돌잡이가 떡을 돌린다는 말은 아기의 성장이 비교적 빨라 대견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돌은 아이가 일가친척들에게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여주는 자리인 만큼, 아이에게도 돌복을 입힌다. 남자 아이의 경우는 보라색 또는 회색바지, 색동저고리와 색동두루마기, 금박 또는 은박을 찍은 남색조끼와 색동마고자를 입고, 수놓은 버선(타래버선)을 신었다. 그리고 염낭(돌 주머니)을 달았다. 여자 아이는 색동저고리와 빨강색의 긴 치마, 금박 은박을 찍은 조바위, 수놓은 버선과 염낭을 해 입혔다. 가슴에는 돌띠를 돌려 매어주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길게 만들어 한 바퀴 돌려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염낭은 복록을 기원하는 뜻으로 달아주는 것이다. 또 은도끼, 은물고기, 은장도 등을 장식물로 달아주기도 했는데, 무병장수와 복록을 기원하며, 사귀의 접근을 막아 부정을 막으려는 의미였다.
돌을 맞이한 아이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돌상은 떡과 과일이 주가 된다. 다채로운 요리법이 없던 시기에, 떡은 각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별미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돌상에 오르는 떡은 각기 의미가 달랐는데, 백설기는 100세까지 살기를 기원하며, 아기의 신성함과 정결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고, 수수경단은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 색 팥고물을 묻힌 떡으로 귀신을 퇴치하여 병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상에 올렸다. 이 밖에도 인절미와 찰떡은 끈기 있고, 마음이 단단 하라는 뜻에서 올렸고, 송편은 속이 빈 것과 속을 넣은 것 두 종류를 만들어, 속 넣은 것은 속이 차고 영리하라는 의미에서, 속이 빈 것은 도량이 넓은 마음씨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올렸다. 무지개떡은 아기의 꿈이 오색무지개처럼 오색찬란하게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떡이다. 이 가운데 백설기와 수수경단은 반드시 해주는 떡으로, 10살까지 생일마다 해주면 좋다고 여겼다.
충청도 지역의 돌날 풍습을 서울, 경기 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대체로 이렇게 치러졌다. 먼저 삼신상을 차리고 치성을 드린다. 수수떡과 쌀떡(흰떡)을 해준다. 이것을 안 해주면 아기가 잘 못 걷는다고 믿는 지방도 있고, 흰 떡을 안 해주면 잘 엎어진다고 믿는 곳도 있었다. 돌상을 차리고 돌잡이를 한다. 수양부모(시영부모)를 정해준다. 이것은 명이 길라고 하는 풍습인데, 수양부모는 아이에게 별개의 이름(개똥이, 바위, 오쟁이 등)을 지어서 부른다.
돌잔치에서 가장 즐거운 행사는 돌잡이다. 아기가 집는 것을 보고 아기의 장래를 점치는 행사는 단순히 재미를 위한 시간만은 아니다. 아기의 잠재된 적성을 미리 알아보고, 그에 맞는 그에 맞는 교육을 시키려는 조상들의 바른 조기교육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풍습이라고 하겠다. 아이가 잡는 물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기 마련이다.
활과 화살 -> 무신이 된다. 국수 -> 수명이 길다. 대추 -> 자손이 번창 한다.
책과 지필묵-> 문장으로 크게 된다. 쌀 ->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다.
척과 침 ->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된다. 칼 -> 음식 솜씨가 뛰어나게 된다.
떡 -> 미련하다.
요즘은 활이나 먹 대신에, 골프공, 청진기, 판사봉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추가하기도 한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변한 탓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속신을 믿지 않아도, 돌잡이는 지금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돌날에는 친척과 이웃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축하연이 있으며, 돌떡은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돌렸다. 돌떡을 받은 사람은 돌떡을 담은 그릇을 씻지 않고 그 그릇에다 적으나마 물품이나 돈을 답례로 보내주는데, 받은 돈은 밑전이라 하여 매우 귀중하게 여겨 쓰지 않고 아이를 위해 증식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돈 대신 답례로 주는 물품으로는 실, 의복, 돈, 반지, 수저, 밥그릇, 완구 등이 있는데, 아이가 장차 필요한 것이나, 아이의 미래를 축원하는 뜻을 가진 물품을 주기 마련이다.
요즘은 돌잔치를 예식장이나 뷔페식당 등을 빌려 치루는 경우가 많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돌상 차림이나 돌잡이 내용 등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지만, 아이의 무사함과 아이의 미래를 축원하는 풍습만큼은 계속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시민대학 강사
고구려사, 한국생활사 전공
저서 : [세상을 바꾼 수레],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외 4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