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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험 속에서 살아라
98. 어떤 자세 속에서도, 그대의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이 점차 거대한 평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껴라.
99. 그대 자신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느껴라. 멀리 그리고 가까이.
외부의 삶은 하나의 태풍이다. 끊임없는 갈등과 곤란과 투쟁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일 뿐이다. 그것은 엄청난 소음과 바람과 파도로 쉴 새 없이 요동하는 바다 위와 같다.
하지만 이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 하나의 중심이 있다. 거기에서 삶은 소리 없이 흐르고, 휴식이 넘치며, 어떤 투쟁과 폭력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대는 표면과 동일시해 왔다. 외부와 자신을 동일시해 왔다. 그때 고뇌와 근심이 따른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편이다. 우리는 표면과 동일시한다. 거기에서 계속되는 투쟁과 동일시한다. 표면은 동요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이상하거나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중심에 자리 잡을 수 있다면 표면의 동요는 아름다운 광경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제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고 있다. 만약 그대가 내면에서 침묵할 수 있다면 그때 외부의 모든 소리들은 하나의 뮤지컬이 될 것이다. 그때 거기에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그것은 한 편의 연극이다.
그러나 그대가 내면의 정수, 침묵의 중심을 모른다면, 단지 전적으로 표면과만 동일시한다면 그때 그대는 미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거의 미칠 지경에 있다.
모든 종교적 방편들은, 요가와 선(禪)과 선술(仙術)은 그대를 다시 이 중심과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 그 기본이다. 그대를 내면으로 들어가게끔, 주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끔 하려는 것이다. 당분간 주변을 떠나 자신의 존재 속에서 깊이 이완하려는 것이다. 그 이완은 너무나 깊어서 그대에게는 외부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내면만이 거기에 남게 된다.
그리고 한 번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면 그것은 이제 어렵지 않다. 만약 그대가 표면에 집착하고 있는 마음만을 안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을 이완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표면에 집착을 끊는 것은 어렵다.
한 수피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수피인 파키르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어두운 밤이었고 그는 길을 잃었다. 너무나 캄캄해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심연으로 떨어졌다. 그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는 그 어둠 속에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밤은 몹시 추웠다. 그는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메아리만 계속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손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가지를 놓치게 되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죽음은 명백하게 가까이 있었다. 한순간 그는 떨어져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 순간이 왔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공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순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말이다.
파키르는 손아귀에서 나뭇가지가 조금씩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은 완전히 얼어붙어서 다시 잡을 수도 없었다. 이제 그는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연 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는 맨땅 위에서 있었다. 그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상황이다. 그대는 표면에 계속 집착하고 있다. 그대는 표면을 떠나면 자기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실제로는 표면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어둠이 있는 곳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대는 어떤 땅도 볼 수 없다. 그대는 표면과 같은 어떤 것도 거기에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방편들이 그대에게 용기를 주고 강하게 하고 모험을 즐기도록 만들 것이다. 그대가 표면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잡았던 손을 놓고 자신 속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닥 없는 수렁처럼, 심연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그대의 존재의 토대다. 한번 그대가 표면을, 주변을 떠나게 되면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중심에 이르는 것이 목표다.
한번 그대가 중심에 이르면 다시 그대는 주변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대 의식의 질이 변했다. 그때 그대는 주변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주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중심에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중심에 머무르며 주변을 바라보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때 그대는 주변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신나는 연극이다. 그때 거기에는 갈등이 없다. 심각해 보이는 것도 하나의 게임인 것이다. 그때 그대 내면에는 어떤 긴장도 생기지 않는다, 고뇌가, 근심이 사라진다.
어떤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대는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근원적인 샘물 속에 잠길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재충전될 것이며 다시 젊어질 것이다. 그대는 다시 주변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번 그대가 그 길을 알고 나면…, 그 길은 멀지 않다. 그대 자신 외에 다른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가까이 있다.
장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집착이다. 그대는 주변을 붙잡고 있다. 자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마치 그대가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죽음이다. 주변과의 동일시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의 느낌, 새로운 이미지가 일어난다.
그래서 만약 탄트라의 방편이 무엇을 말하는지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자신 속에서의 깊은 이완, 전체적인 이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대는 항상 긴장해 있다. 그것은 집착 때문이다.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결코 이완할 수 없다. 흘러가는 대로 맡기지 못한다. 그대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다. 그 행위가 바로 문제다.
그대는 결코 비행위의 상태에 머물 수 없다. 비행위의 상태에서라야 어떤 것들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다. 그대는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호흡은 들어가고 나온다. 혈액은 순환한다. 육체는 살아 있고 심장은 고동친다. 온 세상이 그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쉬고 있고 어떤 것들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다. 어떤 것들이 저절로 일어날 때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다. 그대는 전적으로 이완되어 있다.
그대가 행위자가 될 때 어떤 것들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긴장하고 있다. 그대는 잠잘 때조차도 부분적으로만 이완한다. 잠속에서도 뭔가를 계속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완은 전체적이지 않다. 그대는 잠속에서도 모든 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잠자는 사람을 관찰해 보라. 그대는 그가 무척 긴장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온몸이 긴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잠자는 것을 바라보라. 그는 실제로 이완되어 있다. 동물들 역시 잠들면 이완되어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잠자면서 이완되지 못한다. 그대는 어떤 것과 싸우고 있다. 그대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다. 꿈속에서 그대는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방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대가 낮 동안에 한 일을 잠자면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내면의 드라마로서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완될 수 없다. 그대는 노심초사하게 된다. 잠을 자도 피로가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낮에 있었던 흐름이 밤에도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히 쉬지 못한 채 다시 날이 샌다. 그대는 진짜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결국 잠은 약품을 통해서 강제로 재워져야 한다. 그대는 자연스럽게 잠에 떨어지지 못한다. 낮이 멀지 않고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그대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어 간다. 결국 그대는 부분적으로만 잠자는 것이 된다. 부분적으로만 이완되고 휴식하는 것이다.
명상은 가장 깊은 잠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이완에 뭔가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대가 전체적으로 이완되면서 동시에 각성이 일어난 상태다. 자각이 거기에 있다. 깨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잠든 것이 바로 명상이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대는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거부하지 않는다. 행위자는 거기에 없다. 행위자는 깊은 잠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직 주시자만이 거기에 있다. ‘각성 속의 비행위’가 거기에 있다. 무위(無爲)가 거기에 있다.
그때는 어떤 것도 그대를 동요시킬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이완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모든 것이 그대를 혼란스럽게 하고 흔들어 놓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특정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대는 거의 항상 동요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동요되지 않으면 저것이 동요되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그대는 동요되고 있다. 동요될 기질을 갖고 있다. 모든 원인들이 그대에게서 제거된다고 해도 그대는 동요될 것이다. 그대는 동요될 이유를 찾을 것이며 어떤 이유라도 만들어낼 것이다. 외부로부터 찾지 못하면 그대는 내부에서 뭔가를 만들어 낼 것이다. 어떤 생각, 어떤 사상을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동요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어떤 체험이 필요하다. 확증이 필요하다. 한번 그대가 이완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때는 그 어떤 것도 그대를 동요시킬 수 없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다. 단지 그대가 그 기질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편집증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그대 주위에서 일어나지만 그대는 고요하다. 자동차의 소음들도 음악 소리로 들린다. 그대가 이완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시장바닥의 분주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린 것이다. 내면의 자질에 달린 것이다. 그 자질이 그대에게서 많이 개발될수록 그대는 중심으로 향한다.
그와 반대로 그대가 주변을 향해 다가갈수록 그대는 더욱 동요하게 된다. 혼란스럽게 된다. 그대가 혼란스러운 기미를 보이는 것은 이미 그대가 주변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단지 중심에 다가가라. 그대의 혼란은 그대가 표면에 집착해 있는 정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대의 삶은 거짓투성이일 뿐이다. 그대의 진짜 집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 존재의 바로 그 중심 말이다.
이제 우리는 그 첫 번째 방편으로 들어갈 것이다.
98. 어떤 자세 속에서도, 두개의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이 점차 거대한 평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껴라.
너무나 간단한 방편이지만 이것은 기적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시도하라. 그리고 누구라도 이것을 수련할 수 있다. 거기에 어떤 위험도 없다.
"어떤 자세 속에서도……"
첫째는 이완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대에게 편안하고 손쉬운 것이라면 어떤 자세라도 좋다. 굳이 특별한 아사나(asana)를 고집하지 마라.
붓다는 특정한 자세로 앉는다. 그에게는 그것이 편안한 자세다. 그대에게도 그 자세가 쉬운 것일 수 있다. 당분간 그대가 그것을 훈련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자세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 자세를 연습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그대에게 쉬운 자세를 선택하라. 그것에서부터 시작하라. 자세에 대해서 고심하지 마라. 의자에 앉는 것이 편하면 의자에 앉아라. 중요한 것은 그대의 육체가 이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몸 전체를 느껴라. 다리에 긴장이 있는지를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만약 그대가 신체 어느 부분에 긴장이 있음을 느낀다면 그 긴장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라. 만약 다리에 긴장이 있다면, 오른쪽 다리에서 그것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가능한 한 그것을 더욱 긴장시켜라. 그때 긴장의 절정이 오게 되고 갑자기 그것이 이완되는 것을 그대는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는 다른 긴장이 있는지를 찾아서 몸의 각 부분들을 살펴 나가라. 긴장이 발견될 때마다 그것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라. 긴장이 강렬해진 다음에야 쉽게 이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상태에서는 이완되기 어렵다. 그대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쪽 극단에서 다른 쪽 극단으로 옮겨 가기는 쉽다. 극단이란 것 자체가 이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안면 근육에 긴장을 느낀다면 그때는 가능한 한 그 근육에 더욱 힘을 주어 긴장을 강렬하게 만들어라. 더 이상 긴장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갑자기 이완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몸의 모든 부분을 살펴라. 모든 긴장의 90%는 안면 근육의 긴장이다. 나머지 몸의 부분들은 10%밖에 긴장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대의 모든 긴장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얼굴을 될 수 있는 한 긴장시켜라. 그것을 고민과 번뇌 속에서 강하게 만들어라. 그때 갑자기 이완된다. 5분 동안 그렇게 하면 그대는 몸 전체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모든 관절이 이완된다. 이것이 바로 그대에게 편안한 자세다.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다. 앉아서도 할 수 있다. 그대가 편하게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
“어떤 자세에서도, 그대의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이 점차 거대한 평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껴라.”
두 번째로 그대의 몸이 손쉬운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느낄 때 거기에 대해서 흥분하지 마라. 단지 온몸이 이완된 것을 느끼기만 하라. 몸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실제로 몸을 기억하는 것 또한 긴장의 일종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어떤 흥분도 일으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완하고 그것을 잊어버려라. 잊는 것이 바로 이완되는 것이다.
그대는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쉬운 실험을 한 가지 할 수 있다. 손을 그대의 심장에 올려놓고 맥박을 재어 보라. 눈을 감아라. 5분 동안만 그 맥박에 주의를 집중하라. 그리고 그것을 세어 보라. 사실 의사가 그대의 맥박을 잴 때는 정상적인 맥박이 나오지 않는다. 의사가 그대의 손목에 손을 댈 때 그대는 긴장하게 된다. 그러면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이다. 만약 의사가 젊은 여자일 경우에는 맥박이 더 빨라진다. 그래서 젊은 여의사들은 그대의 맥박 수에서 열 개쯤 뺀다. 그래야 평소의 그대 맥박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의식을 몸의 어떤 부분에 집중할 때마다 그 부분은 긴장된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지켜볼 때 그대는 긴장하게 된다. 그대가 혼자 방 안에 있는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는 온몸의 대사 작용이 빨라진다. 하지만 그대가 혼자 있을 때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완하려고 너무 야단을 떨지 마라. 잘못하면 그것은 강박관념이 된다.
5분간만 맥박을 세고 그 다음에는 잊어버려라. 그 잊어버림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대의 몸은 더 깊이 이완될 것이다. 그때 두 번째 과정이 시작된다.
“……그대의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이 점차 거대한 평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껴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은 심장의 영역이다. 그대의 가슴이다. 먼저 그것을 느껴라. 거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라.
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단지 심장의 영역만을 느껴라. 거기에 거대한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대가 몸에 대해서 완전히 잊을 때 그대의 가슴에 평화가 가득 차 있음을 의식적으로 느껴라. 그러면 바다와 같은 평온함이 즉시 일어날 것이다.
그대의 몸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두 가지 특별한 중심이 있다. 거기에서 특별한 느낌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가슴의 영역은 그대에게 느껴지는 모든 평화의 원천이 된다. 그것이 곧 가슴의 중심이다. 그대가 평온할 때마다 그 평화는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가슴은 평화를 뿜어낸다.
어떤 민족 어떤 문화를 떠나서, 문명인이건 원시인이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을 느낄 때는 가슴으로 느낀다. 사랑은 가슴에서부터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인 설명이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생각한다. 심장이 사랑의 상징물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이완된다. 그대가 이완되기 때문에 어떤 평온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평화는 가슴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대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그대는 평화롭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동요한다. 평화 때문에 가슴은 사랑과 결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그대는 평화를 느끼기 위해 사랑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위험성이 들어 있다. 그대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그대보다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그대에게 평화를 주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뇌와 고통이 따른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그대처럼 똑같이 사랑에 빠지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대의 표면적인 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표면은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두 사람 모두 사랑에 깊게 빠져서 충분히 이완되고 가슴은 평화로 넘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이 그대에게 평화의 일별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것은 못된다. 평화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한다. 사랑을 통해서는 어떤 평화도 영원해지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일별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것이다. 폭력과 증오와 분노가 거기에 생겨날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사랑을 통하지 않고 평화를 직접 찾는 길이다. 만약 그대가 평화를 직접 찾을 수 있다면 ― 이 방편이 바로 그것이다 ― 그대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것은 소유욕에서 나오는 사랑과 다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한 상대방을 그대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그대의 사랑은 단지 어여삐 여김이 될 것이다. 자비심이, 깊은 공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그대의 연인조차도 그대를 동요시킬 수 없다. 그대의 평화가 확고하게 뿌리박았으며, 그대의 사랑은 내면적 평화의 그림자로서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변화된다. 그래서 붓다는 사랑하지만 고뇌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대가 사랑할 때 그것이 고통스럽다면 사랑하지 않을 때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사랑할 때는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고 사랑하지 않을 때는 사랑이 없어서 고통스럽다. 그것은 그대가 표면에, 주변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잠깐 동안의 자기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또다시 어두운 골짜기로 떨어질 것이다.
먼저 그대 자신을 평화 속에 뿌리박아라. 그때 그대는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랑은 그대의 부족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대는 구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그대의 사랑은 일종의 속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대의 사랑은 그 차원이 바뀌었다. 그대는 거대한 평화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어한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말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밀이다. 그대가 나누어주면 줄수록 그것은 더욱 풍부하게 된다. 그대가 그 보물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은 무진장으로 존재한다. 그대는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나누어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사랑은 내면의 평화에서 나오는 결과로서 그대에게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보통 그 현상은 반대로 일어난다. 평화가 사랑의 결과가 된다. 그때 사랑이 주가 되면 고뇌와 번민이 따른다. 사랑은 열병을, 추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점차 거대한 평화 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껴라. 그때 단지 두 겨드랑이 사이의 영역을 자각하라. 그것이 깊은 평화로 충만해 있음을 느껴라. 평화가 거기에 있음을 느껴라. 그러면 그대는 평화로 충만해진다.
그것은 언제나 충만해 있다. 단지 그대가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자각만 일어나면, 그대의 중심에 다가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느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표면에서 멀어진다. 주변에서 멀어진다. 그대가 평화로 충만해질 때마다 그대는 표면에 대해 거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외부의 소음들은 단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대의 침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적인 현상이다.
옆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있고 누군가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았다. 또 누군가는 싸우고 있다. 그대의 주위가 온통 떠들석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들이 멀게만 느껴진다. 그것은 그대가 주변으로부터 철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타인에게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개입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그대를 동요시킬 수 없다. 그대는 초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이다.
그리고 가슴은 자연스럽게 평화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그대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항상 거기에 있어 왔던 근원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그대의 가슴이 평화로 충만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상력이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탄트라의 접근 방식과 서양의 최면요법이 다른 점이다.
최면요법가들은 그대가 상상력을 통해서 그것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가 그것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탄트라에서 상상력은 단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자각하도록 돕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영구적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이다. 그러므로 평화의 환상을 만들어 낼 바에는 차라리 평화롭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환상 속에 있으면 그대는 그것에 중독되어 더 이상 성숙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실체가 환상을 깨뜨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더 큰 실체만이 깨뜨려지지 않는다. 더 큰 실체는 그대가 집착하는 주변에서 생긴 작은 실체들을 깨뜨려 버릴 것이다.
그래서 샹카라나 다른 전통에서도 이 세상이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 환상뿐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더 높고, 더 거대한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세상은 꿈처럼 보인다.
그것은 너무나 아득하게 멀리 보여서 실제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거리의 소음들도 마치 그대가 꿈꾸는 것처럼 들려올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냥 일어났다가 지나갈 것이고 그대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대가 실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실체라고 느낄 수 있겠는가?
실체는 더 깊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를 꿰뚫는다. 그것이 그대를 더 깊이 꿰뚫을 때 그대는 더욱 실재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샹카라는 온 세상이 비실재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이 멀어져 가는 어떤 지점에 이르렀음이 틀림없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져 마치 꿈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꿰뚫지 못했다. 꿰뚫는 것은 실체의 몫이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대는 그 돌에 맞는다. 그 아픔이 철저하게 그대를 꿰뚫지 않으면 그대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느낄 것이다. 마야라고, 환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상처를 입고 그 아픔이 철저하게 그대를 관통한다면 그대는 그것이 실재라고 느낄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이 자신의 살을 꼬집어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픈지 안 아픈지, 확실하게 느껴지는지 아닌지를 알아본다.
만약 내가 붓다의 몸에 돌을 던진다면, 그래서 그대가 실제라고 느낄 만큼 그의 몸도 상처를 입는다면, 그러나 그는 주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중심에 서 있다. 그는 돌이 자신의 몸을 때리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멀리서 느낄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그것이 그에게는 꿈처럼, 환상처럼 느껴진다. 그대에게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든 사물에 본질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공(空)이라고 말한 것이다.
샹카라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세상은 환상이라고.
이것을 해보라. 그대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 평화가 충만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때마다 그대 가슴의 중심은 널리 퍼진다. 그리고 세상은 환상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명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징조다.
세상이 환상이라고 일부러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생각이다.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갑자기 그대 마음속에 일어난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갑자기 꿈결같이 느껴진다. 어떤 본질도 없이 그저 영사막에 상영되는 필름처럼 느껴진다. 마치 3차원 영상처럼 말이다. 세상은 빛의 장난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환영이 아니다. 세상은 실재다. 단지 그대가 세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그 상황을 그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그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기준이 된다.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명상의 척도일 뿐이다. 만약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대는 중심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 것이다. 이제 표면과 그대 사이에는 대단한 간격이 생겼다. 그대는 표면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대와 다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그대는 이전처럼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방편은 무척 쉽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도 않을 것이다.
때때로 그것은 시작부터 그 아름다움과 기적 같은 신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방편을 시도해 보라.
그대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해서 실망하지 마라. 기다려라. 그것을 계속하라. 그것은 손쉬운 방법이라서 언제 어디서든지 가능하다. 밤에 침대 위에 누워서 그것을 할 수도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대로 누운 채로 할 수도 있다. 10분이면 충분하다. 잠자기 전에도 10분이면 족하다. 침대 위에 누워서 세상을 비실재로 만들어 버려라. 그러면 그대의 잠은 너무나 깊어져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을 느낄 것이다. 꿈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세상이 비실재가 된다면 그대는 전적으로 이완될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이라는 실체가 그대를 계속 번거롭게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나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방편을 권해 왔다. 그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세상이 비실재가 된다면 긴장은 풀어지고 만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주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이미 그대는 더 깊은 잠의 상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대가 잠을 자기 전에 이미 잠보다 더 깊은 상태에 들어가 있다. 그때 아침은 아름답다. 그대는 신선해지고 상쾌해지며 보다 젊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에너지가 약동하고 있다. 중심에서부터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러니 아침에 그대가 잠을 깨면 눈을 뜨지 마라. 먼저 이것부터 하라. 육체는 잠을 잔 직후라 충분히 이완되어 있다 생기가 넘치는 것을 느낀다. 그때 10분 동안 이 실험을 하라. 그러고 나서 눈을 뜨라. 이완하라. 그대는 이미 이완되어 있다. 그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지 이완하라. 그대의 의식을 가슴에 모아라. 두 겨드랑이 사이에 말이다. 거기에 깊은 평화가 가득 차 있음을 느껴라. 그대의 눈에서 평화가 흘러나올 것이다.
그때 그대에게는 세상이 전적으로 달라져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져 있음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 그대가 달라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더 친절하고 가까워지고 더 열려질 것이다. 거기에는 자력 같은 것이 있다. 평화가 곧 자력이다.
그대가 평화롭게 될 때 사람들은 그대에게 더 가까이 끌린다. 그러나 그대가 혼란스럽다면 사람들은 그대를 경원시할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현상이라서 그대는 쉽게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대가 평화로워질 때 사람들은 그대를 가까이 하려 한다. 평화가 그대에게서 방사되기 때문이다. 평화의 순환이 그대 주위를 돌고 있다.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느낄 것이다. 마치 나무 그늘처럼 그대는 이완된 분위기를 갖고 있다. 평화로 가득 찬 사람은 그의 주변에 평화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다.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내면에 고통과 갈등과 근심과 긴장으로 가득찬 사람은 누구든지 그 곁에 가기를 꺼린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무엇을 갖고 있든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원하는데 그대가 내면에 혼란을 갖고 있다면 상대방은 그대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그대가 그의 에너지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와 함께 있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와 헤어지고 나면 그는 지치게 되고 심하면 탈진하게 된다. 그것은 그대가 생명의 에너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방편을 수련하면 그대만 자신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 그대가 자신의 중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간다면 삶의 형태가 전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대가 평화로워진다면 온 세상이 그대에게 평화롭게 보인다. 그것은 하나의 반사작용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에서 그대의 상황이 반사된다. 모든 사람은 그대에게 하나의 거울이다.
자, 다음 방편으로 넘어가자.
99. 그대 자신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느껴라. 멀리 그리고 가까이.
탄트라나 요가는 그대의 협소함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자신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때문에 그대는 항상 속박 속에 있다고 느낀다. 속박은 다른 어떤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좁아터진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점점 더 좁아져 간다. 그대는 한정되어 간다.
사실 그대는 무한한 영혼을 갖고 있다. 무한한 존재다. 그 무한한 존재가 갇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곳에서 한계를 느낀다. 그대가 어디로 움직이든지 막다른 골목이 나타난다. 그대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대는 온 사방이 경계선으로, 벽으로 둘러쳐져 있음을 느낀다. 날아갈 수 있는 하늘도 없다.
그러나 그 경계선들은 그대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일정한 이유가 있다. 안전을 인해서, 무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 경계선이 좁아질수록 그대는 더욱 안전함을 느낀다. 만약 그대가 큰 경계선을 갖는다면 그것을 모두 살펴볼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좁은 곳에 갇힌 남아 있다. 주위를 손쉽게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안전함을 느끼는 동시에 답답함을 느낀다. 속박을 느낀다. 이것은 마음이 얼마나 역설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대는 좀더 안전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더 많은 자유를 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은 양립할 수 없다. 그대가 자유를 원한다면 안전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경우에도 안전성이란 그대의 환상일 뿐이다. 실제로 거기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죽음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죽을 것이다. 아무리 안전하게 보여도 그것은 단지 허상일 뿐이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높은 벽을 쌓고 지붕을 덮었다. 그때 하늘은 완전히 닫혀 버린다. 그때 그대는 고통으로 절규한다. 어디에 툭 터진 하늘이 있는가?
“나는 자유롭고 싶다. 나는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이 장벽들은 그대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 방편에 실제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이 불가능하다. 그대가 장벽 속에 갇혀 있는 한 그대는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없다.
먼저 만들어 놓은 철창들을 걷어 치워라. 그리고 담을 쌓는 일을 멈추어라. 그때야 비로소 그대는 이 방편을 느낄 수 있고 수련할 수 있다.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라. 멀리 그리고 가까이.”
어떤 경계선도 없이 무한한 공간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대에게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대의 마음이 그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선 그대는 어떤 것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멈추어야 한다.
첫 번째로 그대는 안전성에 너무나 매달려 있다. 그러면 얽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감옥의 독방만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그대를 해칠 수 없다. 죄수들만큼 안전한 사람들은 없다. 그대는 죄수들을 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매우 어렵다. 죄수는 왕보다 죽이기 힘들다. 그대는 대통령을 암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언제나 정치 지도자들은 곳곳에서 암살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한 사람의 죄수를 죽이기는 어렵다. 안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감옥으로 가야 한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는 위험해서 살 수가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인 감옥을 우리 주위에 만들어 놓았다. 심리적인 감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갖고 다닌다. 그 감옥은 휴대용이다. 그대는 힘들게 그것들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도록, 아예 자동적으로 그대를 따라다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대가 어디에 가든지 그대의 감옥은 그대와 동행할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벽 뒤에 가려져 있다.
아주 드물게 그대는 손을 그것 밖으로 뻗어서 누군가를 만진다. 그러나 오직 손만 내민다. 그대는 감옥 밖으로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만날 때마다 우리는 단지 손만 내미는 것이다. 두려워하면서 창문 밖으로 손을 뻗친다. 그리고 한시라도 다시 손을 집어넣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심리학자들은 손을 내미는 것조차 하나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손에도 무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만 장갑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 역시 다른 사람이 그대의 손을 만지지 못하도록 장갑을 사용한다. 악수를 할 때 거기에는 죽은 손 하나가 나온다. 그리고는 얼른 다시 집어넣는다. 상대방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적이다'라고 한 말처럼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무장한다. 모든 사람이 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장한 사람끼리는 어떤 우정도, 사랑도, 교류도 일어날 수 없다. 그대는 두려워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지배하고 소유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대를 노예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대는 스스로 감옥을 만든다. 안전한 감옥을 말이다.
삶은 이제 지겨움 그 자체가 되었다. 답답하고 따분하다. 그리고 너무나 조심스럽다. 삶은 모험이 될 수 없다. 그대를 과잉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상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기본 법칙을 기억하라. 삶은 불안전하다는 것을.
삶은 불안전성이다. 그대가 불안전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을 때만이 그대는 살아 있을 수 있다. 불안전성이 곧 자유다. 만약 그대가 끊임없는 불안전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대는 자유로울 것이다. 그리고 신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두려워서 그대는 감옥을 만들었다. 그대는 죽어있다. 그리고 더욱더 죽으려고 한다. 그때 그대는 신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절규할 것이다.
“삶이 어디에 있는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축복이 무엇인가?”
삶은 그 자신의 위치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절대로 그것을 만나려 들지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감옥 속에서 삶을 만나려고 한다. 그래야만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은 불안전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삶을 위해서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대는 단지 환상만 자꾸 만들어 낸다. 그 환상 속에서 그대의 생을 낭비할 수 있다. 그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 모두 사기행각이다.
그대는 사랑에 떨어진다. 그때 그대는 두려워한다. 이 여자는 혹은 이 남자는 어느 순간에라도 그대를 떠날 수 있다. 그때 즉시 공포가 엄습한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대는 사랑에 빠졌다. 삶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불안전이 들어온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그를 떠나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를 해칠 수 없다. 그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불안전이 들어온다. 삶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삶과 함께 죽음도 들어온다. 그대가 사랑하는 순간 그대는 두렵다. 그 사람이 죽을 수 있다. 떠날 수 있다. 그대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이제 어떤 안전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그대는 그 사람과 결혼한다. 법적인 구속 말이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은 그대를 떠나기 어렵다. 사회가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법이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경찰이, 판사가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이 떠나기를 원하면 그대는 그를 법정에 끌어낼 수 있다. 그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대의 잘못된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이미 3년에서 5년의 세월이 걸린다. 이제 그대는 안전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결혼하는 순간 그대는 죽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법이다. 법적인 현상이지 생명의 그 무엇이 아니다. 법정은 삶을 지킬 수 없다. 법정은 오직 거래 관계만을 지킬 수 있다. 법정은 오직 법만을 지킬 수 있다. 이제 결혼은 죽은 관계다. 그것은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뭐라고 정의될 수 없다. 이제 그대는 정의된 세상 속에 들어왔다. 그대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순간, 문을 닫으려는 순간, 새로운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 순간 그대는 갇히게 된다. 그리고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내 때문에 나는 자유롭지 않다."
그대가 아내라면 남편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는 서로를 소유했기 때문에 서로 갇힌 것이다. 이제 그대는 싸움을 벌일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고 거기에 갈등만 남았다. 이 모든 것이 안전을 찾아다닌 덕분에 일어났다.
이런 현상을 모든 것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삶은 불안전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그것은 삶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랑이 거기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그대를 떠날 수 있다는 공포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어떠한 안전 조치도 취하지 마라. 그때 사랑은 성숙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실 사랑이 그대를 죽이는 것은 아니다. 안전성이 그대를 죽일 것이다. 안전성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랑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실제로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나는 사랑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죽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떤 사람도 사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너무나 위험한 나머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죽음이 거기에 있고, 생명은 흔들리는 잎새 위에 있는 한 방울의 이슬이다. 언제라도 바람이 불면 이슬은 사라질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삶이다.
죽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에 사랑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강렬해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음 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든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한다. 그대는 사랑 속에 전 존재를 쏟아 부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연인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안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대는 사랑을 뒤로 미를 수도 있다. 사랑으로 뛰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힌두교에는 아름다운 신화가 하나 있다.
힌두교에는 인드라(Indra)신이 다스리는 천상세계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거기에 아름다운 여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지상의 여인보다 훨씬 아름다운 신들이 있다. 그들은 섹스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란 천상의 여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우르바쉬(Urvashi)라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우르바쉬가 인드라에게 가서 한 가지 청을 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며칠 동안만이라도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인드라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무슨 멍청한 말인가? 그대는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자 우르바쉬가 말했다. “그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존재들입니다.”
생기가 넘치게 만드는 죽음이 없기에 그들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의 반대 상황일 뿐이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거기에 죽음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배경으로, 토대로 삶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르바쉬는 말했다.
“제발 지상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결국 그녀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푸루루바(Pururuwa)라는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인드라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대는 지상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그대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고 말하라. 만약 그대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그대는 다시 여기로 와야 한다.”
사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모든 신비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교활하게도 인드라는 그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우르바쉬는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했다.
“좋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하겠습니다. 나에게 호기심을 갖지 말라고, 내가 누군지 묻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가 만약 내가 누군지 묻는다면 나는 즉시 그를 떠나서 여기로 되돌아오겠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내려온 우르바쉬는 푸루루바를 만나서 말했다.
“나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 내가 누군지 묻지 마라. 당신이 묻는 순간 나는 지상을 떠나야 한다.”
그때도 사랑은 호기심이 되었다. 푸루루바는 우르바쉬의 말 때문에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는 잠도 못 잘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도 아름다운 여인이…… 도저히 세상 사람같지 않은데……. 그녀는 미지의 차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그는 호기심이 생길수록 점점 두려워졌다. 그녀가 그를 버리고 떠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두려워서 잠을 자면서도 그녀의 사리를 쥐고서 잠을 잤다. 그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물을 수 있다. 그는 항상 머리 속에 그질문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잠속에서도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르바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잠을 자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물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그는 그녀의 사리를 움켜쥐고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니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우르바쉬는 사라져야 했다. 푸루루바의 손에 사리를 남겨 두고서 떠났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한다.
천상에서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진정한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삶은 오직 지상에서만 가능하다.
죽음이 있는 곳에서만 삶은 존재한다. 그대가 어떤 것을 안전하게 만들 때마다 거기에 생명은 사라진다. 불안전성 속에 남아 있어라. 그것이 삶의 성질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다!
생각해 보라. 만약 그대의 몸이 불멸이라면 그것은 추해진다. 그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찾을 것이다. 자살할 수 있는 길을 말이다. 만약 자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있다면, 그대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불멸은 너무나 지루한 것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안락사에 대해서 계속 생각한다.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살기 때문이다. 백 살이 가까운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자신을 죽일 권리를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을 때 자살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붓다의 나이가 40세나 50세면 너무 많다. 평균 연령의 거의 20세에 달한다. 인도에서는 20년 전에 평균 연령이 23세에 불과했다. 이제 스웨덴 같은 곳은 83세까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150세까지 쉽게 살 수 있다. 러시아에는 150세에 이른 사람들이 15명이나 된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일 죽일 권리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 권리를 부여해야만 한다.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조만간 자살은 기본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백 살도 너무 긴 세월이다.
백 살이 된 사람은 50년을 더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가 좌절하는 것은 음식이 없어서가 아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불멸이 될 때 삶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 의미는 죽음과 함께 생겨난다. 사랑도 그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때 사랑은 불타오르고 진동하며 고동친다. 그것은 잃어버릴 수 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어떤 확신도 할 수가 없다. 그대는 내일을 위해 그것에 관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대는 거기에 내일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대의 연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때 사랑은 강렬해진다.
그래서 먼저 안전한 삶을 만들려는 노력을 그만두라. 그때 그대를 둘러싼 벽은 무너질 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비를 느낄 수 있다. 그대에게 직접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태양이 직접 그대에게 떠오른다. 그대는 툭 터진 하늘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 무섭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대가 감옥 생활에 너무 익숙한 탓이다.
그대는 이 새로운 자유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자유는 그대를 더욱 생기에 넘치게, 더욱 열려 있게, 더욱 풍부하게, 더욱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때 그대의 삶은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대 가까이 있는 죽음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죽음 가까이 있어라. 그대는 죽음에 대항해 왔다. 죽음의 골짜기를 멀리했다. 그러나 삶의 봉우리가 높을수록 죽음의 골짜기는 깊다. 그래서 나는 항상 니이체의 좌우명을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매우 종교적인 금언이다.
니이체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하게 살아라.”
그것은 그대가 적극적으로 위험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니다.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방어벽을 쌓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 주위에 어떤 장벽도 쌓지 말라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살아라. 그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충분히 위험하다. 그러나 일부러 어떤 위험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이 방편을 수련할 수 있다.
“그대 자신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느껴라, 멀리 그리고 가까이.”
그때 이것은 매우 쉽다. 거기에 벽이 없다면 그대는 이미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는 그대 자신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대가 끝나는 지점은 없다.
그대는 하나의 중심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경계선도 갖고 있지 않다. 경계선은 계속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말이다. 전 공간이 그것 안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별들이 그것 속에서 돌고 있다. 항성이 그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전 우주가 그대의 주변이 되었다.
이 무변 광대함 속에서 그대의 에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광대함 속에서 그대의 고통이 어디 있으며 에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대의 좁아터진 마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토록 무변 광대함 속에서 마음은 간단히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오직 좁아터진 공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제한되고 닫히고 사로잡힌 공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로잡힘이 문제다.
위험하게 살아라. 불안전 속에서 살 준비를 갖추어라. 그리고 그대가 위험 속에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더라도 그대는 어차피 위험 속에 살수밖에 없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무척 두려워했다. 그리고 사실은 모든 왕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못살게 굴기 때문에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 그는 친구를 가질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친구 역시 또 하나의 적일 뿐이다. 그는 왕을 죽이려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왕궁에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친구가 없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나 스탈린 같은 사람은 단 한 명의 친구도 가질 수 없다.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다. 마치 친구처럼 다가와서는 기회를 보아 그를 밀어내고 자신이 왕좌에 앉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올 때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해치운다.
조금 전까지 아주 친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적으로 돌변한다. 그들의 우정은 전술일 뿐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친구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친구를 원한다면 권력을 갖지 마라. 그때 온 세상이 친구가 될 것이다. 그대가 힘을 갖고 있다면 그때는 그대 자신만이 유일한 친구일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은 적이 된다.”
그 왕 역시 무척 겁이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특히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의 공식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국사(國師)와 고문들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왕궁을 짓되 문을 오직 하나만 내십시오. 그리고 문에다가 병사들을 일곱 겹으로 배치하십시오. 첫 번째는 파수를 보게 하고, 두 번째는 첫 번째를 지키게 하고, 세 번째는 두 번째를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일곱 번째 다음에 문을 하나 내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전하께서는 안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은 궁전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문만을 만들었다. 일찌감치 그런 궁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문 주위로 일곱 병사들을 배치해서 병사들끼리 서로를 감시하게 했다.
그러자 그 소식이 전국에 퍼졌다. 이웃 나라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 궁전을 찾아왔다. 그 역시 무척 겁이 많았기 때문이다. 궁전을 둘러보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안전한 궁전이로군. 이런 곳에 사는 그를 죽이기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왕은 그런 생각을 제안한 국사와 고문들에게 감사했다. 오직 문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위험도 없었고 무척 안전해 보였다.
그 왕이 문을 바라보고 흡족해 하는 동안 문 옆에 거지가 하나 앉아 있었다. 그는 연신 조롱 섞인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자 그 궁전의 주인인 왕이 거지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그렇게 웃고 있는가?”
거지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결정적인 실수를 한 걸 보고 웃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 문마저 잠궈 버리십시오. 이문도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이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이란 누군가가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아무도 못 들어간다면 적어도 죽음은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한 가지 일을 더 하셔야 합니다. 이 문마저 잠궈 버리십시오. 그때는 당신이 진짜로 안전할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이 문마저 닫아버린다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자 거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99%는 죽어 있습니다. 오직 이문만큼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이 유일한 위험입니다. 그러니 이 문마저 막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둘레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그 안에서 그는 평안하게 앉아 있다. 그러나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그리고 평안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일어난다. 평안은 죽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어라. 위험하게 살아라. 열린 삶을, 닫히기 쉬운 삶을 살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일어날 수 있다. 많은 것이 그대에게 일어날수록 그대는 더욱 풍부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쉽다. 그대는 이 방편을 수련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생각만 하라. 그대가 전 공간으로 퍼져 나가고 있음을.
(질문)
어떤 사람을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사랑은 지속적인 흐름이 되어야 합니까? 그러면 어떤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사랑이 헌신으로 바뀌어집니까?
사랑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해야 할 어떤 일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행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랑과 관계 있는 것이다. 아무도 하루 24시간 계속 뭔가를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사랑이라는 것을 행위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24시간 사랑을 계속할 수 없다.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계속하게 되면 지쳐서 쓰러질 것이다. 체력을 소모시키지 않는 것이라도 지루해서 계속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고 나면 그대는 미움 속에서 이완되어야 한다. 오직 반대극에서만 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이 항상 증오와 뒤섞여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그대가 이 순간에는 사랑하지만 다음 순간 증오하기 시작한다. 똑같은 사람이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연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대의 사랑이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런 불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랑이란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대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질 수는 있다. 그러나 행위로서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에 있어서 행위란 우스운 것이다. 그것은 노력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노력이라면 그대는 사랑을 하려다가 곧 지쳐서 쓰러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작동 원리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상태이지 행위가 아니다. 그 마음의 상태가 한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사랑으로 나타나고 한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기도로 나타난다.
그때 그대는 단지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마치 그대의 호흡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랑 속에 있는 것도 자연스런 상태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려 든다면 그대는 곧 호흡하는 행위 때문에 지쳐 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완해야 하고 그때 죽게 될 것이다. 만약 호흡이 그대의 노력 때문이라면 그대는 언젠가 호흡을 깜빡 잊어버릴 것이고 그대의 육체는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호흡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호흡이다. 그대가 호흡하지 않으면 육체가 죽게 되듯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대의 영혼은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사랑을 영혼의 호흡으로 여겨라.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그대의 영혼은 활기에 넘칠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내 곁에 있을 때에만 호흡하고 다른 데 가서는 호흡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죽을 것이다. 일단 죽고 나면 그대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연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마라. 오직 나만을 사랑하라."
그때 사랑은 위축되기 시작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무슨 도덕 규범이 아니다. 그대는 행위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단지 사랑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그대는 원수가 옆에 있어도 호흡을 한다. 마찬가지로 원수가 옆에 있을 때에도 사랑의 상태 속에 있을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그 사랑을 하나의 행위로서 이해했다. 그때 매우 곤란에 봉착하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은 불가능하게 들린다. 사랑을 하나의 행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이다. 그대 곁에 원수가 있든 친구가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대는 언제나 사랑 속에 있을 수 있다.
증오의 상태 속에 있는 두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려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하나의 행위인 것이다 그들은 증오라는 마음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사랑이라는 마음 상태 속에 있다면 그때 미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원수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떤 사람이 슬픈 상태 속에 있을 때 마음껏 웃기란 정말로 어렵다. 그때 웃음은 완전히 인위적인 노력이다. 자신과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웃음은 가식이다.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계속 분노의 상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이 불가능하다. 그때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며 하나의 행위가 된다. 억지 사랑이 된다. 반면에 그대가 사랑의 상태 속에 있을 때 분노란 하나의 노력이며 행위가 된다. 그때의 분노는 억지 분노다.
붓다나 예수는 미워할 수 없다. 미워하려면 인위적인 행위가 필요한데 그들은 그런 가식적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그와 정반대 상황 속에 있다 그대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대가 증오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려는 것이 무척 어렵고, 사랑한다 할지라도 이미 거짓이다. 결국 그대는 마음의 상태가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의 상태 속에 있을까?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종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만약 그대가 한순간이라도 사랑의 상태 속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순간은 항상 그대에게 주어질 것이 것이다. 그대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대는 언제나 사랑 속에 있을 수 있다, 24시간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 상태 속에 있을 수 있다. 오직 한순간만이라도 사랑의 상태 속에 들어갈 줄 안다면 그때는 한순간이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이다. 그 한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한번 그대가 사랑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을 알 수 있다면 그대는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 산다. 시간은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을 의미한다. 그대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때 현재를 잃어버린다. 현재만이 유일한 존재이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지금 여기만이 유일한 존재이다.
그대가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비밀을 안 것이다. 다음 순간이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대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이 순간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 순간은 지금이라는 모습으로 항상 그대 곁에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Eckhart)는 이렇게 말했다.
“그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이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지나가는 것은 우리들이다.”
지나가는 것은 우리들일 뿐 시간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모습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니 24시간 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그때 그대는 현재라는 순간조차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생각하는 것(thinking)’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산다는 것(living)’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로 이 순간을 생각할 수 없다.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뿐이다. 현재 순간에는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대가 현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가 된다.
꽃 한 송이가 여기 있다. 그대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말하는 순간 그 말은 현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다. 그대가 생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재 속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시간은 없다. 그래서 명상 속에서는 그대가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 속에서도 그대는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생각의 멈춤이다. 존재의 순간이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이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대는 거기에 없다. 그래서 생각에 너무 사로잡힌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신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신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바빠서 신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들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사랑의 순간은 시간이 없는 순간이다. 그때 24시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대는 24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살아 있든지 죽든지 할 뿐이다.
그래서 문제는 시간이 아니다. 사랑의 상태 속에서 지금 여기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왜 증오가 거기에 있는가? 그대가 증오심을 느끼는 것은 안전만을 생각하는 그대의 마음 때문이다. 그대의 생명이 위험 속에 있다고 느낄 때, 그대의 존재가 소멸될 수 있다고 느껴질 때 갑자기 증오심이 그대 속에 불쑥 치민다. 그대는 자신이 파괴될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위험을 느낄 때마다 그대는 증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대의 삶은 위험할지 모르지만, 그대의 육체는 죽을지 모르지만 그대의 존재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는 한 그대를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대는 절대로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없다.
예수는 사랑 속에 머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사랑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죽음에 속한 것만, 육체만, 마음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거기에 죽음이 있다. 매순간 그대는 두렵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겠는가?
사랑은 공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공포가 거기에 있고 그래서 그대는 억지로 자신이 사랑 속에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대의 사랑은 그대의 심리 상태를 반영해 주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사랑한다. 그대는 사랑에 빠져 있으면 공포를 덜 느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죽음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존재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사랑을 가진 그대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대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마다 그대는 자신이 존재계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다. 그래서 적어도 그대의 삶은 황폐한 삶이 아니다. 그대는 적어도 우연히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그대는 어디엔가 필요한 존재다. 그대가 없이는 존재계도 뭔가를 잃은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런 기분들은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그대가 그 누구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때, 누구에게나 거부당할 때 그대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삶이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음을 느낀다. 아무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죽어도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아무도 그대가 있었다는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대에게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준다. 사랑 속에서 공포를 덜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사랑이 사라질 때마다 그대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증오심을 갖게 된다. 증오는 하나의 방어 수단이다. 그대는 파괴당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도리어 그대가 파괴적으로 변한다.
사랑 속에서 그대는 환영받고 있음을 느낀다. 자신은 불청객이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이다. 존재계는 그대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 존재계를 대표하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이 사랑 역시 그 기초는 공포다. 그대는 공포에 대항해서, 죽음에 대항해서, 존재계의 냉담한 무관심에 대항해서 사랑을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계는 그대에게 무관심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태양, 바다, 대지와 별들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무관심하다. 그 누구도 그대에 대해 걱정해 주지 않으며 특별히 그대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하늘은 무심한 것이다. 그대 없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존재계를 보라. 표면적으로 보면 그 무엇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태양도 그대를 걱정하지 않으며 별들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대지조차도 그대에게 무심하다. 그대가 있든지 없든지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대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필요 없는 존재다. 아무도 그대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그대에게 공포를 준다.
키에르케고르가 고뇌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 미묘하게 지속되는 공포가 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기분 말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를 사랑할 때 그대는 다른 차원이 그대의 존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 적어도 한 사람은 그대가 죽었을 때 울고 슬퍼해 줄 수 있다. 그대가 사라지면 그대의 부재를 느낄 사람이 한 사람은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한 사란 덕분에 그대는 삶의 가치와 목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무척 이나 소중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대의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내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환상을 갖게 해주는 계약 관계와 같은 것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 역시 내가 필요하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내 삶의 목적과 가치를 얻었다. 또한 당신 역시 나에게서 당신 삶의 목적과 가치를 얻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 계속 환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 광대한 우주의 무관심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의 꿈속에 빠져 산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따로 만들어 낸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무심한 세상은 그대에게 그것이 꿈이며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 세상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대는 연인과 함께 그대만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그대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삶은 의미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하는 사랑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묘하게 조작된 환상이다.
인간은 나약해서 환상 없이는 살 수 없다. 환상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붓다밖에 없다. 그는 어떤 환상도 만들지 않는다. 환상 없이 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랑 속에 살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것은 한 인간이 그대를 필요로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이해, 즉 깨달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존재계는 그토록 무관심해 보인다. 존재계가 사실은 그대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 존재계의 일부이다. 완전히 유기체적 결합으로 이어져 있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 그것은 그대와 분리된 현상이 아니다. 그대와 나무는 같은 존재계의 부분이며 그대의 의식은 곧 나무의 의식이다. 바다와 모래와 별들 역시 그대와 하나를 이룬다. 그대는 고립될 섬이 아니다.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 있다. 전 우주는 그대 속에 있고 그대는 우주 속에 있다.
그대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대는 행위가 아닌 진정한 사랑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대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어떤 환상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때는 굳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죽음도 그대를 소멸시킬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공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그것은 그대가 바로 존재계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명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명상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존재계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때 사랑의 꽃은 저절로 피어난다. 아무런 행위와 노력도 없이 말이다. 그때 사랑은 호흡처럼 자연스럽다. 그대는 사랑을 호흡한다. 이 사랑은 헌신 속에서 자라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그것이 사랑의 궁극이다.
그대가 호흡을 느끼는 것처럼 사랑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이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그 속에서 느긋하게 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그것은 궁극적인 헌신이며 지복의 절정이다. 그 상태를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서 그대가 진정한 사랑 속에 있을 때는 일부러 헌신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이 자연스런 것처럼 헌신 또한 자연스런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이 특별히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것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스런 상태의 사랑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행위가 될 때 그 속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는 환상을 주는 사랑 같은 것을 추구하지 마라. 그것은 붓다나 예수가 말한 사랑아 아니다. 그들은 사랑의 행위가 아닌 자연스런 사랑의 상태를 강조했다.
그대가 명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죽음이 없는 그대의 내면을 깨닫지 않는 한, 그대가 존재계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한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이 명상의 방편들은 그대의 삶을 인위적인 행위에서 자연적인 상태로 옮겨가게 도와준다.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라. 시간은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깨어나라! 주시하라! 이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