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먹장 유병조…자신을 갈아 천년을 살아가는 먹처럼 옹골진 집념, 천년의 흔적을 남기다
<14> 경주 먹장 유병조
By 김창원 기자 2015.04.07
무형문화재 제35호 먹장(묵장)이라고 새겨진 유병조 선생의 대표적인 먹들.
질 좋은 다양한 붓들로 제작과정을 마친 먹을 최종 테스트한다.

학문하는 선비가 늘 가까이 해야 하는 네 가지 물건이 있으니 먹, 종이, 붓, 벼루가 그것이다. 그중에 무생물이면서도 생명이 있는
것보다 오래,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 먹이다.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역사의 한 자락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먹은 제 몸을 갈아 글씨나 그림으로 세상에
남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니, 이는 예로부터 서가의 으뜸이라 했다.
‘칠십 평생 벼루 열 개의 바닥을 밑창 내고, 붓 일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는 그런 먹의 희생적 삶과 중요함
을 알고 ‘서가의 으뜸’이라 칭송했다.
먹은 ‘십 육세 처녀가 삼년 병치레 끝에 일어나 미음 끓이듯 갈아야’한다고 했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갈라는 말일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갈다 보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 자기 위안의 뜻도 담겨 있으리라.
좋은 먹을 만들기 위해 60년이 넘는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사람이 있다. 국내 유일한 먹 기능전승자 덕산 유병조(75)선생은 먹의
마음을 닮아가며 평생을 살고 있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인 그는 좋은 먹을 위해 14살이 되던 해부터 현재까지 줄곧 그을음과 함께 했다. 그의 먹은 써본 사람이
라면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향이 은은하여 집중이 잘되고 벼루에 갈리는 소리가 아늑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며, 너무 검지도 희지
도 않아 먹물에서는 고아하고 기품 있는 빛까지 튕겨난다.
그가 사는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어느새 코끝을 스치는 묵향에 이끌린다. 소나무를 태워 얻어지는 새까만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묵의 향은 과히 10m 밖에서도 일품이다.
◆그을음, 천 년의 역사를 쓰다
유병조 선생이 직접만든 그을음 제조기.
“천 년의 흔적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좋은 먹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공들여 살다 보니 한평생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최고라
해도 아직 70%밖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는 몰라도 먹에서 만큼은 최고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천식을
앓아 기침을 하면서도 오로지 먹에 대한 열정만큼은 청춘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고국에 묻히고 싶다던 조부의 유언과 함께
부친을 따라 6살의 나이로 경주시 산내면에 정착했다.
그의 유년은 먹고, 입을 것도 없을 만큼 지지리도 가난했다. 농사일과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14살 무렵, 먹을 만드는 삼촌을
돕기 시작했다. 그것이 먹과의 첫 인연이자 평생 삶이 되었다. 6ㆍ25전쟁 때, 이북에서 울산으로 피난 온 이름 모를 장인은 두 숙부
에게 먹 제조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자연스럽게 어린 덕산에게로 이어졌다. 눈썰미가 좋았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홀로 먹을 만들어 숙부에게 납품했다.
1971년인 31살, 둘째 숙부의 권유로 독립한 후 제조한 먹은 숙부에게 상표 없이 납품했다. 1983년, 43살의 나이로 비로소 ‘신라조
묵사’라는 상호로 자신의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밤 12시 전에 잠을 잔 적이 없었음에도 생활은 국수로 연명
할 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수없이 실패를 거듭했고, 도전한 끝에 자신만의 먹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1997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부터 먹 만들기
기능전수자(1997-04호)로 선정됐다.
2009년에 비로소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 경주 먹장으로 지정됐다. 경주시장실에서 인증서를 받기 전날 밤에는 한량없는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증서는 지난날을 격려했지만 육십 평생의 배고픔과 서러움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다.
2005년 해인사 팔만대장경 탁본용 먹물 스무 말을 제공한 것도 그였다. 좀으로 인해 훼손되는 나무에 먹물을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
다는 것을 안 그는, 팔만대장경이 오랜 세월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먹 때문이라며 확신한다.
‘신라조묵사’에서 생산하는 먹의 종류로는 송연먹, 문향먹, 송향먹, 송선먹 등이 있다. 최근에는 선생의 전통먹이 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박물관의 문화상품으로 등록되어 전국에서도 구입이 가능해졌다. 중국에서도 주문이 들어와 이제 우리 전통먹이 세계
로 전파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순전 신라먹장 유병조 선생의 피나는 노력에서였다.
먹의 주성분은 그을음이다. 산을 헤매며 상처 입은 소나무에 송진이 엉겨 붙은 관솔을 구하고, 그 관솔을 땀과 함께 태우고 태운다.
먼지 같은 그을음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채취한 그을음을 아교(쇠가죽, 힘줄, 뼈 따위를 끈끈하도록 진하게 고아서 말린
갖풀)와 혼합 한다.
여기에 품격을 높이기 위해 선생만의 비법으로 만든 향을 첨가한다. 먹을 만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꼬박 40~45일. 대단히 검지
도, 모자라게 희지도 않은 은은하고 검푸른 빛깔의 송연먹은 고서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고매한 색채를 지니고 있어 먹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투박한 손에서 묵향이 피어나고
국내 유일의 먹 기능전승자 덕산 유병조선생이 관솔(송진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과 송ㆍ유연을 태워 얻어낸 그을음으로 45일 간의 긴여정 끝에 탄생시킨 주먹먹과 송연먹, 유연먹, 송향먹, 송선먹, 문향먹 등을 최종 점검하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먹의 주재료인 소나무 관솔을 고르고 있는 유병조 선생.
제 몸, 제 마음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사춘기 시절, 선생은 검댕이 투성이의 손과 얼굴로 지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은 지금,
일흔다섯의 선생 곁에는 여전히 한결같은 묵향이 남아있다. 소년은 노인이 되었고 그의 먹은 하나의 작품으로 명품이 되었다.
“먹으로 쓴 글을 태우면 종이만 없어질 뿐 먹은 재 속에서도 희미한 존재를 남긴다. 인간은 백 년도 살기 힘든데, 천 년 세월을
견디는 먹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질긴 생명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먹이다. 그래서 먹은, 천 년의 흔적을 만드는 그을음의 신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표현 같다”
순박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지만, 먹을 대할 때만큼은 사명감으로 달아오른다. 결코 가볍지 않았던 시간들 탓일까. 외소
하고 꽝 마른 체구에 고뇌가 비친다. ‘무형문화재’라는 수식어가 무겁고 무겁지만 아직도 꿈만 같아 명장의 배지를 늘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다닌다.
먹장의 소박한 본가에는 마당에도, 마루에도, 책에도, 그의 손끝에도 온통 은은한 먹 향이 머문다. “나의 인생은 한 번도 호화롭게
살지 못하고 지내왔으나 막상 무형문화재가 되고 보니 굶주려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그는 청렴결백을 추구하는 선비 중의 선비
다. 아직 변변한 작업장도 전수관도 전시관도 없는 없지만 “문화재 유산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 중요하며, 관광문화사업의 활성화
가 소원이다”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는 전통 먹 제조에 후회 없는 한평생을 바쳤고 먹 제조국인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최초 ‘유리에 갈리는 먹’을 개발
했다. 평생 검은 것을 쫓아 살아온 삶이지만, 그의 심성은 맑고 정직했다. 성실한 집념은 새까만 그을음에서 맑은 길을 비춰주었고,
제 몸을 소멸시켜 천 년을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일본 정창원에는 ‘신라의 양가에서 생산된 상급 먹’ 새겨진 먹이 소장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종이, 먹
등을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에 의해 먹 제조 기술이 전해졌던 역사적 사실을 두고 볼 때 백만원을 호가하는 일본 ‘고매원’
의 먹이 우리 무형문화재의 전통먹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전통 먹의 우수성을 인정한 일본인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으나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노하우를 빼앗아 갈 것을 염려했
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본보다 더 좋은 먹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는 그는 일본의 먹을 능가하고픈 열망도 내비쳤다.
그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먹’의 중요성에 대해 일반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한다. 그저 개인의 욕심에서가 아니라 긴
역사와 훌륭한 제묵법으로 한때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신라의 먹이 맥을 잃을까 염려하던 중, 몇 해 전부터 큰아들(유성우),
딸(유정화)씨가 전통 먹 전승자가 되어 전통 먹의 대를 잇겠다고 나섰다.
좋은 먹을 갈면 맑고 경미한 사향의 향기가 풍긴다. 좋은 먹은 무겁고 나쁜 먹은 가벼우며, 두드려 보면 좋은 먹은 맑은소리가
나지만 나쁜 먹은 소리가 없다며 선생은 조언한다.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부드럽게 잘 갈리면서도 찌꺼기 없이 색이 맑아 붓이 잘 내린다”는 서예가들의 말처럼 그의 먹은 신라의
자부심이며 양심이며 아울러 대한민국의 청렴한 혼으로 오늘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박시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