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병역 기피자 한 해 5만~10만명…
나이 고치기, 女裝, 자살 위장까지
병역기피자 한 해 5만여 명도 넘어
1956년 겨울, 서울의 20대 남자들은 외출 땐 불시에 군·경 합동 단속반의 검문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징병 소집에 응하지 않은 병역 기피자를 색출하려는 길거리 검문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1956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6만789명의 청년이 단속반에 붙잡혔고 이 중 4만6500여 명이 입대했다(경향신문 1957년 3월 31일 자).
1950~1960년대에 병역 기피는 그렇게 만연했다. 준법 의식도 낮았던 데다, 배고픔과 구타를 견뎌야 했던 불합리한 병영 상황 등이 빚어낸 결과였다. 군 면제를 받으려고 특권층은 '빽'을 썼고 약삭빠른 이기주의자들은 온갖 수법을 동원했다.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고, 항문에 양잿물을 발라 치질을 가장하는가 하면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위장한 사람도 있었다.
뇌물을 써서 호적을 고쳐 나이를 징집 상한 연령보다 높게 바꾸는 일이 많자 언론엔 '연령 인상자(引上者)'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심지어 군대 가지 않으려고 1년 넘도록 여장(女裝)을 한 채 식모살이를 한 청년이 검거되기도 했다. 기피자들 상당수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았다. 1954년 2월 한 달간 치안국에 자진 신고한 병역 기피자는 5만5028명이나 됐다. 1956년 3월에도 당국이 추산한 전국의 기피자는 약 10만명이었다.
종교적 이유로 총을 들지 않겠다는 병역 거부자도 이미 1957년 처음 발생했다. 당시 당국과 사법부는 이런 거부자를 맹비난했다. 1957년 7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의 병역 거부 사건 재판에서 서울지법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교리를 내세운 건 더욱 가증(可憎)하다"며 금고 1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교주가 그러한 교리를 미끼로 신자 획득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말도 했다(조선일보 1957년 7월 25일 자). 1959년 4월에 또 열린 종교인의 병역 거부 사건 판결에서도 '대로(大怒)한' 판사는 피고인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광신도"라면서 구형량인 징역 1년의 2배인 징역 2년을 선고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기피자 단속 강도는 이전 시대와 차원을 달리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 연두 순시 때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병무청 순시 땐 "병역 기피자는 우리 사회에서 제거돼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3월엔 기피자를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는 등 처벌을 크게 강화한 법률이 발효됐다. 이후 1975년 상반기의 기피자는 징집 대상 인원 9만여 명 중 단 24명뿐이었다.
숱한 곡절 끝에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병역의 의무를 피해 도망갈 구멍은 거의 없어졌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약간 이완시킬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총을 안 들겠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대체 복무만 하고도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받게 됐다. 인권과 양심의 자유는 소중한 가치이지만, 60년 전 재판장도 분노했던 '양심을 빙자한 병역 기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만만치 않은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