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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굿 워크
E. F. 슈마허
-한 세기의 종말 앞에서
대량의 저가 석유로, 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값싸고 풍부한 화석연료 덕분에 무엇이 가능했을까요? 먼저 고도로 석유 의존적인 현대식 농업시스템이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갖가지 종류의 음식이지만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주로 석유를 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갈수록 음식에서 석유 맛이 납니다. 물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석유가 하는 일을 예전에는 적절한 재활용이나 윤번제, 흙속의 미생물이 하거나 생물학적 농법 혹은 유기농법이 대신했습니다.
이 방식은 인간 생존의 토대였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사용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의 과학이 침투하자 오히려 이 방식은 정체되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서구는 이 방식을 버렸고, 그 대신 이제는 화학물질과 인공 비료에 토대를 둔 농업 시스템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생물에게 맡기던 일을 지금은 아랍인들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재생 가능한 자원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현대화된 농업시스템으로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들 하지만 40억 인구를 전부 현대식 농업기술로 먹여 살리려면 에너지, 즉 석유라는 측변에서 볼 때 농업 한 분야에만 지난 30년 간 발굴한 석유 매장량을 죄다 써야 합니다. 농업 한 분야에서만 말입니다.
짧은 기간 대량의 저가 석유가 낳은 또 다른 결과는 바로 흉물스러운 도시의 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도시가 필요하다고들 합니다. 자급농업 상태에서는 문화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인구밀도가 상당한 수준이 되어야 상호 간에 성장이 가능해져 인간 정신을 꽃피울 수 있다고 합니다. 도시는 지난 5,000~6,000년간 존재해왔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도시는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도시는 도시 내부뿐 아니라 도시 외부의 땅에도 의존합니다. 내륙 도시들은 주변에 식량을 공급해줄 배후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동물이나 인간이 유일한 운송에너지였기 때문에 도시의 반경이 더 커질 수 없었습니다. 해안 도시의 경우는 이외에도 풍력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도시들은 배를 통해 식량 공급이 가능했던 해안가를 따라 생겨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약 100년 전만 해도 20만 명, 30만 명이 넘는 대도시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시 팽창의 발목을 잡았던 식량 공급 문제가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이용하게 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지난 100년 간 그랬듯이 더 크고, 더 복잡하고, 더 자본이 드는 기술적 흐름을 계속 고수한다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기 됩니다. 모든 것은 이미 부유하거나 힘 있는 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끼어들 수 있는 틈을 마련해줄까요? 일부 가난한 사람들은 “틈에 너 자신을 맞출지어다”라는 제1계명을 따르지 않은 채 당돌하게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내 맘대로 할 테야, 능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손재주도 있으니 내가 뭐든 만들어볼 거야.” 하지만 곧 자신에게는 자본이 없어서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기술은 인간적인 규모 이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 기술을 다시 인간적인 규모로 되돌릴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산업사회의 4대 죄악
양극화는 우리 시대에 이르러 더욱 벌어져 상당한 크기의 회색지대가 매우 검은 쪽과 매우 흰 쪽으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런 양극화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사악한 악은 양극화에서 나옵니다. 유럽에 사는 우리도 이런 악을 따라하고 받아들이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하지만 여기서 과오를 범하지 맙시다. 유럽보다는 요동을 치는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좀 더 알기 쉬운 선을 찾으려는 커다란 움직임과 의식적인 노력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현실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산업사회는 앞으로 급격히 바뀌지 않는 한 파국ㅇ로 치닫게 된다고 봅니다. 지금 산업사회는 끝없는 성장을 목표로 추구하기에 파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파국이란 말은 복음서의 관점에서 볼 때 산업사회가 추구하는 끝없는 성장이라는 목표에 실패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는 이 괴물 같은 개발이 던진 엄청난 시험문제를 모두 잘 풀어 승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기에 파국이란 말을 썼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채, 따라서 타락할 수도 없는 상태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진짜 문제입니다.
왜 산업사회는 실패해야 할까요? 왜 산업사회가 낳은 사악한 정신이 산업사회를 실패로 이끌게 될까요? 대단히 실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세계 인구가 분명히 자급의 수단을 넘어 불가항력적으로 늘어나게 되기에 유기적 관계들이 붕괴되고, 계속해서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사회에서는 독성을 확산시키거나 식품에 불순물을 섞는 식으로 자급수단 자체가 위협받기에 다른 유기적 관계도 붕괴하게 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연료와 금속처럼 재생 불가능하고 희소한 광물자원들이 빠르게 고갈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삶의 방식은 더욱 고도로 복잡해지는 데 비해 이런 방식을 매끄럽게 잘 유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인간의 도덕적, 지적 능력은 오히려 저하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자연에 폭력을 가하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폭력은 언제든지 동료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무기를 갖고 다른 사람에게는 생존의 조건으로 비폭력을 강요합니다.
산업사회의 생사가 걸린 문제들이 정치개혁이나 경제개혁, 혹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된다고 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들은 우리 각자의 마음과 영혼 깊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드러나지 않게 내밀한 개력이 일어나야 할 곳은 바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입니다. 마음속 깊이 들어가 비폭력을 찾아야 합니다.
-거대 기술의 노예가 되어
새로운 기술은 기술을 낳아준 체제의 모습을 갖고 태어나고 다시 체제를 굳건하게 만듭니다. 만약 사유건 공유건 간에 대기업이 지배하는 체제라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기술도 ‘거대해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대기업은 고도의 전문 인력과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어마어마한 돌파구’로서 거대 기술을 만들고 설령 폭력적인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처할 방법까지 알아내게 될 것이다”라며 거대 기술이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이때 슬로건은 ‘오늘의 돌파구가 내일의 위기를 막아준다“입니다. 우리 귀에는 ’백열 기술혁명‘, 핵시대, 자동화 시대, 우주 시대, 놀라운 공학적 위엄, 초음속의 승리 등과 같은 말도 들립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주거와 같은 기본 욕구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례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의 1인당 평균소득은 영국이나 서유럽보다 두 배나 많지만 미국인들은 유럽보다 훨씬 더 비참한 빈곤에 시달립니다. 세계 인구의 5내지 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미국인들이 전 세계 천연자원 생산량의 35%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막대한 부는 특정한 곳에만 쌓여 있고 나머지 도처에 존재하는 극도의 불행, 비참, 절망, 투쟁, 범죄, 도피 등이 미국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란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자원과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거대 기업, 거대 정부, 거대 학계 같은 상부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다가 결국은 이 모든 상부구조의 토대인 기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기술평가단이 도처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기술 발전을 ‘평가’했습니다.
기술 발전이 자원사용의 측면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기술 발전이 환경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기술 발전이 사회‘정치적으로 타당한가?
이들의 조사에 의하면 콩코드 여객기는 잘한 게 없습니다. 콩코드는 희소한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환경에도 큰 부담을 지우고 심지어 위험하기도 해서 사회, 정치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객기는 영불 공학기술의 놀라운 성과로 묘사됩니다.
이제 사회구조에 끼친 현대기술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기술이 노동의 본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기술이 현대 사회에 끼친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바로 이 점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이해력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심한 파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 이래로 이런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지기는커녕 대다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창조적 노동이 무자비할 정도로 빠르게 소멸되고 있습니다.
현대기술이 인간의 정착형태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지만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엔과 세계은행은 어느 규모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비율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화 지수를 측정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도시화 지수가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도시화의 비율이 아닌 도시화의 형태입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물론 도시도 필요하지만 농촌에서 나오는 식량이나 원자재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도시와 농촌 양쪽에 모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농촌 지역과 가까운 인근지역에 도시가 있어서 사람들이 하루 동안에 소로 방문할 수 있는 형태가 도시화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밖의 다른 형태는 인간의 감각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백 년간 이루어진 도시개발은 실제로는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접근은 매우 심할 정도로 차단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흉물스럽고도 지극히 병적인 양극화 현상이 인간의 정착형태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도시 기획자들은 ‘파리가 사막으로 둘러싸이게’되자 정부에 맞서 싸웠습니다. 미국에서는 중소 규모의 지방도시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광역도시를 지칭하기 위해 ‘메갈로폴리스’라는 조어까지 나왔습니다. 영국에서도 섬처럼 고립된 인구 고밀도 지역을 ‘메갈로폴리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반쪽과 인구밀도가 너무 빽빽한 반쪽으로 나눠져 극단적으로 치우친 정착형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100년도 더 전에 사회주의자들이 한 요구를 기억하십니까?
제조업과 농업과의 결합, 국가 전체에 걸쳐 고르게 인구를 분산시킴으로써 도농간 간극을 점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
그렇다면 지난 100년간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물론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사반세기 동안, 즉 20세기 말에는 어떻게 될까요? 앙갚음으로 다시 정반대로 갈 것입니다. 더는 도시화가 아닙니다. ‘메갈로폴리탄화’입니다. 현상에 맞게 용어도 무시무시한 메갈로폴리탄화는 주지하다시피 정치, 사회, 도덕, 심리, 경제 분야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세계은행이 발행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도시 개선작업이 급속한 도시화의 속도와 재정부족과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지극히 낙담스러운 상태이다. 안타깝게도 도시의 행정당국은 이 문제를 다룰 역량이 없다. 앞으로 현재의 인구와 도시의 주심지역 인구를 합치면 20년 이내에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중소 규모의 도시를 서둘러 개발하고, 새로운 도시개발 지역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뒤이은 설명으로 바로 그 가능성이 묵살되고 맙니다.
대부분의 소도시에는 교통이나 서비스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하다. .....운영진과 기술진들은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이주하길 꺼린다.
대도시에 사는 운영진과 기술진들이 소도시로 이주하길 꺼린다! 이 말로 이야기의 전모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오직 대도시에만 잘 맞도록 개발된 기술을 그대로 소도시에 가져오겠다는 발상입니다. 소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이런 거대 기술을 다룰 수 없기에 운영진과 기술진을 ‘대도시’로부터 모셔 와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으로 타당하지 않기에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획은 경제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현대기술은 대량생산을 촉진하며 고도로 복잡하고 대자분이 듭니다. 이 기술은 대도시나 메갈로폴리스에만 잘 들어맞을 뿐 다른 곳에는 맞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방법이 대다수 사람들에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지능과 자원을 조금 동원하여 좀 더 작은 규모에도 잘 맞는 기술만 만들면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에 끼친 기술의 영향력을 살펴봅시다. 이것은 분명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먼저 자유란 무엇일까요? 철학적 논고를 길게 펼칠 것 없이 도전적인 젊은이들에게 먼저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어 봅시다.
젊은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반면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저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렇게 많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잃은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자유를 원합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자유에도 수요와 공급의 격차가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의 자유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물론 조직의 규모와 복잡성은 자유와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왜 더욱 더 규모를 키우려는 흐름이 생겼을까요? 일부 편집증적인 거인들을 제외하고 큰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흐름이 생겼을까요? 대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기술의 진보 때문입니다.
-복잡하게 만드는 바보
단순하게 만드는 천재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기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길로 들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헐값이던 화석연료 덕분에 기술은 네 가지 방향에서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먼저, 모든 것이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이런 특성을 ‘규모의 경제학’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조직 단위에서도 그렇지만 순수 기술 분야에서도 단위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벽돌산업의 정산적인 평균 규모는 일주일에 만 개정도의 벽돌을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세기에 들어서서는 10만 개였고, 오늘날 평균 규모는 일주일에 100만에서 200만 개 정도입니다. 이제 이란 국왕은 일주일에 500만 장의 벽돌을 생산하는 공장을 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거대증’의 한 흐름입니다.
두 번째는 물건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상당히 평범한 물건을 만드는 데도 놀라운 정도로 복잡하고 기발한 장비가 투입됩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가령 치약을 구입해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치약은 짜보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화려한 색깔이 나온답니다. 세 가지 색깔은 뒤범벅으로 섞이지 않은 채 아주 교모하게도 마치 세 가지 다른 색깔의 깃발처럼 나온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번은 자동차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저 역시 품위 없이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도 창문을 올리고 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철부지 소년마냥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물론 버튼은 눌러야 했습니다. 내린 창문을 다시 올리기 위해서도 버튼을 눌러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할까요? 복잡성은 일종의 병입니다. 설령 비용이 문제가 안 되는 경우에도 대량생산기계로 물건을 생산하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복잡한 물건일수록 고장이 쉽게 납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져가야 할까요? 너무 복잡해져서 자기 힘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로 가져가면 한동안 자동차를 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수리비로도 150달러나 듭니다.
세 번째 흐름은 앞선 두 가지와 연결됩니다. 생산에 드는 자본비용이 점차 증가하면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부자거나 세력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령 으뜸의 사례는 아니어도 농업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도의 과학적‘화학적 농법으로 경작되는 대규모 농지를 갖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럴 경우 가족이 먹고 살 정도의 농사만 짓는다 해도 농부는 그처럼 소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하고 유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점점 더 많은 자본이 있어야 농사가 가능한 반대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됩니다. 기존의 기술로 농장을 운영하려면 영농기술이 믿을 만할지라도 너무 많은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에 농장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부자부터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가난한 나라의 경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물건을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자본이 들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만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간기술은 자본이 많이 들지 않지만 아직도 쉽게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가난한 나라들은 여기서도 소외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자 나라에서 계속 사들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나라는 개발이 되면 될수록 실제로는 독립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 나라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기술 발전의 네 번째 흐름은 기술의 폭력성입니다. 폭력을 인간들 사이의 전쟁보다 더 넣ㅂ은 개념으로 보면 생태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폭력적인 태도가 계속 증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은 무슨 짓이든 해도 좋다는 신념 아래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구의 저 얇은 표면에 독성물질을 마음대로 쏟아 부어도 된다는 생각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이 생기면 과학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혹은 약으로 고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기술은 모든 곳에서 폭력성이 증가하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어왔습니다.
저의 슬픈 가족사로 인해(슈마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도 암으로 죽거나 투병생활을 했다)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한 해 보다는 빈번히 질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한 치료제에서 더 많은 해를 입고 있으며, 여기서 입은 손상 정도는 많은 경우 전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방약은 실제로 완전히 무시되는 실정입니다.
둘째로 많은 물건이 더욱 간단한 방법으로 생산될 수 있습니다. 복잡한 기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삼류 기술자면 됩니다. 하지만 상당히 간단한 기본 원리로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찾으려면 천재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선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죠. 하느님은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만큼 아주 잘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식은 분명 아닙니다. 일단 일을 시작하려면 본질적인 것과 거의 암적인 성장에 가까운 것을 서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기계장비들을 살펴보면 연장과 기계 장비와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연장이란 인간의 창조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우수한 도구이며, 따라서 당연히 매우 단순합니다.
셋째로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기술은 보통사람들을 소외시키려는 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정의나 평등과는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물건을 좀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체계적으로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연장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마음에 드는 연장을 볼 때마다 그걸 사봐야 쓸 시간이나 있겠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좋은 연장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기계는 생각이 필요 없는 메커니즘으로 움직입니다. 기계의 메커니즘은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고 대량생산에 잘 맞도록 조정됩니다. 그러면 기계값이 더욱 비싸지지요.
넷째로 지금까지 폭력적인 방향으로 기술 발전이 진행되었다면 이제 비폭력적인 방향에서 살펴봅시다. 여기서 ‘비폭력’이란 자연체계를 강제로 거스러지 않고 생태적 원리들을 존중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노동하는 생산양식을 말합니다. 의도하지 않는 손상과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길 경우 훨씬 더 폭력적인 기계장치를 동원해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필요한 위의 네 가지 기준, 혹은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 지침은 단순한 이론 작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며, 비폭력적인 기술 혹은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고 갖춘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기술은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화석연료에도 덜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낳게 되고, 여기서 나온 생활양식은 인간이 지닌 현실적 욕구에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위의 지침이나 기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지침이라도 제시해야 합니다. 지침이 없으면 대안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작업은 체계적인 토대 위에서 서둘러 시작할수록 더 좋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시작하여 수년간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비록 힘은 적지만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의 경험을 통해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작지만 위대한 실험
중간기술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지금까지 가나와 인도가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두 나라의 중간기술 조직들은 자기 힘으로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측으로 가나나 인도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곧바로 가나의 쿠마시에 있는 기술자문 센터나 인도의 러크나우에 있는 적정기술 개발협회로 가라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면 물론 우리가 도와줍니다.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잘 운영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부유한 나라도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점차 깨닫고 있습니다. 농촌 지역 주민들이 도시로 빠져 나가면서 제3세계에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재개발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나라에도 필요한 지역에 따라 중간기술 조직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중간기술개발그룹의 활동은 다섯 가지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전 세계 빈곤의 근원이자 중심은 주로 가난한 나라의 농촌 지역인데 현재 시행되고 있는 원조와 개발은 여기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농촌 지역의 경우 지역에 맞는 효율적인 작은 기술과 그 기술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소외되어 도시로의 인구 유출뿐 아니라 실업도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원조국들과 원조기관들은 농촌개발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적정기술의 채택 및 실행과 관련된 체계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개발에는 주어진 상황에 잘 맞는 올바른 ‘기술 수준’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술을 선별해야 하는데, 이때 부유한 나라에 유용했던 기술 수준이 가난한 나라에서도 반드시 최선이며 유일하게 가능한 기술이라고 가정할 수 없습니다.
빈곤 상태의 개발도상국에 가장 잘 맞는 정정기술은 ‘중간’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괭이와 트랙터의 중간, 혹은 팡가(동아프리카에서 쓰는 날이 넓고 긴 칼)와 콤바인의 중간을 말합니다.
‘중간’ 수준의 기술과 거기에 맞는 장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분명 세계 여러 지역에 존재했지만 어떤 격차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어디에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언제 절실히 필요한 것을 구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중간기술을 개발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지식을 세상에 소개하고, 체계화하며, 필요하면 보완하는 한편 이런 지식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 전역에 연결된 ‘지식센터’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10년간의 작업에서 얻은 여러 증거로 중간기술개발그룹이 메워야 하는 ‘지식 격차’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력은 풍부하나 자본은 적고, 기술이나 조직적 정교함도 부족한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서 이용했을만한 기술의 경우 대체로 문서화 작업이 빈약하여 기록을 구하기 어렵거나 아예 기록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선’을 쫓느라 ‘차선’마저 놓치게 되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과거에 있었던 훌륭한 지식과 장비가 사라져 버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쫓아야 진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은 환영할 만한 것이겠죠. 적어도 그런 흐름이 ‘최선’을 누릴 형편도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차선’이라도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작은 일터가 일자리를 만든다
잔치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잔치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제 말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값싸고 풍부한 화석연료와 몇 가지 환상 덕분에 우리 사회에 형성되었던 어떤 특이한 생활방식이 이제 끝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몇 가지 환상이란 무엇일까요? 말하자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고, 우리 가운데 일부는 신나게 즐겼습니다. 세 명의 위대한 마법사 혹은 요술쟁이가 잔치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마법사는 모든 자연법칙을 깨고 유한한 환경에서도 무한성장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물론 이 환상은 오랫동안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결정적으로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로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이제야 인류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컴퓨터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마법사는 기괴한 자연법칙을 들먹이며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단순하고 지겨운 일을 계속할 노동력이 무한히 공급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환상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에 대해 가졌던 환상과 유사합니다. 이제 노예들은 깨어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없으면 더는 잔치를 벌일 수 없으며, 자신들이 주인보다 훨씬 더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권력 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나라는 더 진척되었고 어떤 나라는 아직 뒤처져 있습니다. 이제 산업체제 전체를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세 번째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인데 이 마법사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문제의 범위가 명확하게 한정된 경우 과학이 개별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A라는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새로운 문제들이 무더기로 생겨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과학자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 우리 시대의 과학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물론 매우 유능하게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될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집니다. 마치 밑 빠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성공의 정점에 서 있는 지금, 인류는 오직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문제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땠습니까? 분명히 조상들은 과학자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생존했습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최상의 삶을 추구해온 오늘날의 기술 발전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마법사들이 모두 가짜고 환상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아직도 우리는 마치 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처럼 서로에게 주문을 겁니다. 이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니 돌아올 수 없습니다. 풍부한 화석연료와 언제라도 이리저리 등 떠밀려 조립라인에 배치될 수 있는 풍부한 노동력 덕분에 지금의 기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기술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서 매우 불친절합니다. 이 기술은 천연자원, 특히 연료에 대한 편식이 심각합니다.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화석연료, 제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연료의 사용을 훨씬 더 줄이고 대체연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가 조만간 올 것입니다. 저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대체연료의 양은 적으며, 어마어마한 연료 집중화에 토대를 둔 대규모 기술로는 이런 대체연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 밖의 다른 문제들도 기술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기술은 한 때는 자기식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제 더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백 년간 내려온 이 거짓 유산을 버리고 탈출할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큰 문제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머리를 쓰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아가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합니다. 막상 실제로 일을 시작해보면 그렇게 많은 이론과 생각에 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됩니다. 일의 성공 여부를 따지며 골치를 앓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해야 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곧 나쁜 일을 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사회의 치료제가 아닌 병균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