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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7-10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오늘 본문은 애굽의 바로와 야곱 사이의 대화입니다. 바로가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세월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이 자기 나이가 130인데, 그 세월이 험악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조상들과 달리 험악한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험악하다고 했는데,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원어성경의 ‘라아’(רע)라는 말을 험악하다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라아라는 말은 원래 ‘나쁘다’라는 뜻인데, 성경에서는 보다 폭넓게 쓰였습니다. 우선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 이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하여 영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이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자기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라아 즉 험악했다고 한 것은 자기가 한 평생 큰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때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정신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해서 영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형의 분노를 피해 머나먼 하란의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라헬에 반해 그녀를 얻고자 7년을 종처럼 일했지만,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결혼을 했고, 라헬을 얻기 위해 또 7년을 죽도록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번번이 약속을 어기는 라반에게 속아 큰 곤욕을 치르다, 도망치듯 가족들을 데리고 겨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 에서가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큰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겨우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로 에서와 화해를 하게 됐습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땅에서 지체하다가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복수한다고 큰 사고를 치게 됐습니다. 겨우 하나님의 인도로 벧엘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이 때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큰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말한 그대로 험악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130년을 살아오는 동안 늘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몸이 고달팠고, 마음의 고통이 있었고, 그리고 영적으로도 편한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야곱이 말한 이 험악하다는 말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위기의 세월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코로나사태가 계속되어온 지난 2년 세월이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코로나19바이러스가 유입된 이후 현재까지 대략 60만 명가량이 확진되었고, 사망자도 5천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백신을 맞고 후유증으로 고생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됩니다.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온 몸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나지 못하고, 모이지 못하면서 겪은 정신적인 고통은 또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이것은 수치로 다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많은 분들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겪은 마음의 고통은 또 얼마나 될까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사역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버티지 못하고 문 닫은 교회들도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깊은 영적인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2년 동안 겪어온 이런 고통들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월은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말했던 그 험악한 세월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을 때, 그저 130살이라고만 해도 될 텐데 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을까요? 바로는 지금 초면입니다. 그리고 바로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을까요?
물론 본문이 직접 이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추정해 볼 뿐입니다. 한 가지 주목해 볼 표현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그리고 10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야곱은 바로를 처음 만나 인사할 때, 그리고 헤어지며 인사할 때 일상적인 인사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바로를 만나게 됐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와 가족들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바로를 축복한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말은 그저 자기의 한 평생을 돌아보며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팔자가 사납다거나 박복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분명 이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 중심에는 신앙적인 의미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 부분에 관해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야곱은 무엇보다도 그 험악한 세월을 자기가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깊이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말 속에는 감사가 배어있었을 것입니다.
창 46: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야곱은 애굽으로 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가면서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큰 곤욕을 치렀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명을 받았던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다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애굽에 와 있습니다. 지금 바로를 만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이 대제국의 통치자인 바로를 이렇게 대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역사하셨기 때문임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을 말하고 있지만 그 세월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세월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달력을 앞으로 넘겨서 더 오래 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창 28: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홀로 머나먼 하란으로 가던 중에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며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 정신없이 도망치듯 집을 떠났습니다.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험악한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험악한 세월 내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고비마다 놀라운 역사로 지켜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늘 평탄한 세월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험악한 세월을 사는 동안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험악한 세월을 넉넉히 여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체험을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번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교우를 심방했습니다. 이분은 지금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한 번도 병원에 입원도 해보지 않았고, 수술은 더더욱 안 해본 분이어서 무척이나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떠나본 일이 없었지만 평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사 4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라는 말씀을 읽고, 이 순간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이분이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습니다. 제가 안수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수술이 잘됐고, 얼마 후 회복한 뒤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이 제게 그동안의 간증을 가슴 뜨겁게 하셨습니다. 제가 안수기도한 뒤 믿음이 생기더랍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을 백번도 더 암송하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자기 손을 굳게 붙잡는 느낌이 들더랍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믿고 받았답니다. 손이 붙잡힌 것 같은 그 상태로 수술장에 들어갔는데 수술 후 깨어날 때까지 그대로더랍니다. 그리고 회복이 다 된 후 손을 놓는 것 같더랍니다. 자기는 생생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겪을 때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 위기를 잘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위기,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험악한 세월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이 험악한 세월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연단하시는 하나님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지내며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는 이토록 험악한 세월을 주실까? 아버지 이삭은 평탄한 생을 사셨는데 왜 나는 이렇게 모진 생을 살게 하셨을까?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 25:2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이삭이 야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 그 모습을 보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쌍둥이로 태어나면서 먼저 태어난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야곱이라는 이름은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 즉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이 이름 그대로 속이고, 남의 것을 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 에서가 배고파 정신이 없을 때 팥죽을 내밀며 장자의 명분을 넘겨받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에서처럼 변장을 하고 들어가 아버지를 속여 형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몫을 이루는 귀중한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요?
창 3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브니엘 사건입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야곱이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야곱을 보시고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 생각대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적 잔꾀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빼앗을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됐을까요? 바로 험악한 세월의 연단 때문입니다. 야곱 시절과 이스라엘 시절 사이에는 저 하란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20년이 넘는 기간의 험악한 세월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험악한 세월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백성이 40년의 광야학교를 거친 뒤에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것과 같은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시 119:71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욥 23:10을 보면 또 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같은 우리를 단련하셔서 이스라엘같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같이 쓸모없던 우리를 단련하신 뒤에 이스라엘같이 쓸모있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때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험악한 세월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경기도 광주의 한 도자기 공방을 둘러본 일이 있었습니다. 매장에 한 눈에 봐도 멋지고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진열되어있었습니다. 광택이 오묘한 색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매료시켰습니다. 안으로 들어 가보니 장인들이 도자기를 빚고 있었습니다. 모양이 갖춰있고 무늬와 그림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품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안내하는 분 말씀이 이제 이것들이 1500도 이상의 가마에 들어가 구워져야 작품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험악한 세월은 마치 이 뜨거운 가마와 같은 것입니다. 도자기들이 가마 속의 그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올 때, 멋진 작품이 되듯이 우리가 이 험악한 세월을 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해를 마감하며 코로나의 위기를 지나온 시절을 돌아볼 때 험악한 세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미 함께 해 오셨고, 또 이 험악한 세월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욱 굳게 주님 손을 붙잡고 견뎌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험악한 세월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아름다운 도자기작품처럼 빚으시기 위해섭니다. 그래서 더욱 새로워지려 힘써야 하겠습니다.
상도중앙교회 박봉수위임목사님 설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