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나는 종종 롯데백화점에 들르곤 한다. 백화점 쇼윈도 마네킹이 갈아입는 옷들을 보며 매번 군침만 흘리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게 그곳에서의 내 주요 임무(?)인데, 물론 그런 착한(혹은 소심한) 나 자신이 기특해 아주 가끔 대형사고도 친다. 거기에 따르는 정신적 피해는 매번 카드 청구서가 날아들 때 자각하지만. 그런 몇 번의 대형사고의 주범 중에 ‘KUHO’라는 의류 브랜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외받는 구석자리에 있으면서, 도도하게 반짝이는 ‘구호’라는 그 상호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비쩍 마른 여인네의 굴곡 없는 몸매를 감상하는 듯 건조해 보이는 그 옷들은, 그러나 입어보면 갖고 싶다는 맹렬한 욕망을 좀처럼 다스릴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몇 개의 옷들을 손에 넣었고, 뒷감당하느라 허리가 휘면서도 뿌듯해하곤 했다. 그게 2년 전쯤의 일이다.
한동안 구호의 이미지는 내게서 잊혀졌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중요한 이유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2003년의 마지막 언저리인 12월 5일, 스타타워에서 구호의 패션쇼를 보게 되었다. 모두들 목이 빠져라 쇼에 심취하는 동안, 나는 이 재능 있는 디자이너가 왜 한동안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지, 혹시 <스캔들> 영화를 위해 옷을 만드는 일은 포기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는 영화 때문이 아니라 의상과 소품, 그리고 그 영화의 프로덕션 디렉터로 일했던 정구호라는 인물 때문에 <스캔들>을 보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스캔들>의 대박 뒤에는 모든 의상과 소품을 담당했던 정구호가 있었고, 그전에는 영화 <정사>와 <텔미섬씽>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3년 만에 패션쇼를 열었으니,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쇼가 끝난 이틀 후, 우리는 수송동의 제일모직 건물 11층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대개의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선병질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염을 기르고, 뿔테 안경을 쓰고, 편해 보이는 굽 낮은 로퍼를 신고 사무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작고 낮은 목소리로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도대체 그의 어디에 그런 날카로운 감각이 숨어 있는지 의아심마저 갖게 된다. 그러나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 안에 숨겨진 면도날 같은 날카로운 감성을 감지하게 된다. “3년 만에 쇼를 했어요. 6개월 이상 준비했죠. 늘 그렇듯이 패션쇼란 30분 안에 모든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엑기스를 뽑아내야 해요. 이제부터는 상품 작업을 하고, 다시 FW를 준비해야겠죠.” 디자이너 정구호에게는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며 다시 도모할 날을 기다렸던 3년의 시간이 있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이란 말 그대로. “구호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개인 숍을 연 후, F&F라는 회사와 합병했고, 그 후 약간의 문제가 불거져 브랜드를 회사에 넘겨주게 되었고, 제일모직에서 구호를 인수하면서 저를 다시 불렀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꽤 긴 시간 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구요.”
삼성그룹이 어떤 회사인가. 그리고 그 계열사인 제일모직은? 이 회사는 국내 패션계에서 매머드급 존재다. 공룡 같은 거대한 몸집으로는 발 빠르게 변하는 여성 패션계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이들은 여성복 사업 부분을 강화하기로 결정하면서 구호를 인수했다. 처음 이 브랜드를 탄생시켰던 정구호를 제일모직 상무보에 앉힌 일은,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나게 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옛 주인이었던 정구호에게도 그렇고, 한동안 구호 브랜드를 찾지 않았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디자이너가 혼자 의류 브랜드를 만들고 기업화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디자이너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죠. 재정, 매출기획, 스케줄, 인력 관리 등등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저의 경우는 대단한 행운을 만났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그 행운의 봄날이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그로서도 회사로서도 앞으로 계속 환한 햇살이 내리쬐기를 바라는 일만 남았다.
자, 이쯤 해서 슬슬 그가 의상 디자이너란 직업 외에 다방면에 촉수를 뻗치고 있는 것들에 주목해보자. 우선, 뉴욕 얘기부터. 파슨스 스쿨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5년간 식당과 카페를 경영한 시절은, 그가 지금의 디자이너로 살게 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특이한 인테리어는 뉴욕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덕분에 이곳의 몇몇 식당이 오픈할 때 그의 재능을 빌리기도 했다. 또 하나, 요리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코르동 블루에 가서 수학했을 정도로, 그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 많다. 당연히 그는 <스캔들>에 나오는 상차림에 무척 신경을 썼다. 그릇에서부터 상, 요리에 이르기까지. 아마 디자이너가 안됐다면 요리사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 작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많이 회자되었으니 그건 생략하기로 하자. 덧붙일 것은, 지금도 그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영화 시나리오가 적지 않다는 것. 제2의 <스캔들>을 기대해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30대에는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게 의미 있는 일이었죠. 40대에는 그걸 토대로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리고 50대에는, 40대에 이룬 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펼쳐가는 시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 전반의 플랜은 그렇습니다. 흔히 스페셜리스트라고 하면, 오로지 한 분야에만 매달려 그 일에 모든 걸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외국의 저명한 학자가 업적을 쌓은 후 돌연 현대 무용가가 되어 세상을 감탄시키는 일이 저에겐 생소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재능과 능력으로 각 분야에서 새로운 뭔가를 펼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훌륭하게 소화되고 받아들여진다면 당연히 그렇게 가야 한다고 여기죠.” 그는 제대로 짚어냈다. 우리가 바라는 성공하는 인간형은, 한 우물을 깊게 판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그 기준을 토대로 대역을 넓혀가는 제너럴리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의상 디자인에 자질이 있다고 해서, 그가 갖고 있는 다른 재질을 묻어버리는 고루한 인식은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구호라는 브랜드가 여성복에서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토털 브랜드로 끌고 가는 게 제 목표죠. 남성복, 아동복, 액세서리, 인테리어, 리빙, 식음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컨셉트로 묶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는 야심가다. 그 엄청난 계획은 차근차근 계획하고 밟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읽혀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