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사에 있어 대화왕조가 가라인이 세운 가야왕조라는 것을 누차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해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1987년/하나출판사/윤영식/285p>를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 가라인의 왜국과 대화조정
『응신의 왜왕 즉위년은 임진(A.D. 390)으로 이 시점부터 백제·왜 분립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지난 과정을 돌아볼 때 가라국왕 아라사등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왜의 땅에 진출, 처처에 신토(新羅)를 개척 한·왜통합왕국을 건설한 때가 근초고왕 19년(A.D. 364) 이전 4세기 중반부였다. 이 이후부터 백제의 간섭을 받기 시작 近仇首(久저)와 莫古(막고해)가 가라지역에 진출하였고 이어 근초고왕 21년(A.D. 366)에는 왜의 사마숙니가 爾波移(가라국왕 아라사등의 이명, 반정)를 백제에 보내어 근초고왕을 위로(복속의 표현)함으로써 마침내는 가라와 왜의 땅이 백제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26년을 지난 이 시점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라국왕 아라사등의 아들 응신이 왜왕의 위에 오르게 된 것이고 이렇게 됨으로써 백제의 간섭에서 벗어난 '가라인의 왜국'이 탄생한 셈인데 이 왕국이 일본학계에서 말하는 소위 '대화조정'인 것이다. 그래서 응신인 중대형의 천지개벽 이야기가 있게 된 것이고, 신무를 시어천하지천황 또는 숭신을 어조국천황 등으로 거듭 호칭하게 된 연유가 이에 있는 것으로써 이 신무, 숭신, 응신 등 '神'자 돌림이 모두 아라사등의 중자 예전별명을 거듭거듭 기·기상에 분식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 예전별명을 신라국왕자 천일창과 동일인물로 밝힌 바 있었으며 이 천일창과 그의 父 아라사등의 설화가 각각 있었는데 이 두 이야기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본 바도 있다.
그래서 지금 응신이 왜왕위에 즉위하는 이 시점이 그들의 설화에서 어느 대목에 해당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가라국왕 아라사등의 왜지진출"항을 보면 천일창 집안에서 키우던 황우를 어느 날 갑자기 군공들에게 잡혀 먹혔다가 노부의 가르침을 받아 소값 대신에 군공들이 극히 귀하게 여기는 백석이란 신물을 얻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에서 군공들은 백제왕가를 상징한 표현이고 백석은 왕권을 상징하는 신보로서 응신이 왜왕위에 즉위한 것을 말한 것이며 여기 가르침을 받았다 한 노인은 물론 그의 부 아라사등의 신령인 것이다.
이렇게 그들 집안의 설화와도 대조한 바 무리 없이 부합되는 것을 보았고 다음은 응신의 실재에 객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기록을 찾자면 제삼자의 입장인 중국측 기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측 사서에 있는 왜국 관계 기록을 보면 '삼국지·위지·왜인전'에 왜의 여왕 비미호가 대방태수를 통해 위와 교섭(A.D. 238∼248)한 기록이 잠간 보인 후 장장 150여년간 소식이 완전 두절되었다가 돌연 응신의 즉위 이후 무렵부터 때를 맞은 듯 '송서', '남사', '양서' 등에 왜의 5왕(讚, 珍, 濟, 興, 武) 관계 기사가 거의 80여년간에 걸쳐 이어지다가 백제 동성왕의 즉위(A.D. 479)와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왜왕기사는 소식이 영 끊겨 버린 것이다. 이러한 주기적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는 앞으로 점차 이야기되겠지만 응신 즉위 무렵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가서 보면 '남사' 왜국전과 '양서' 왜전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晋安帝時 有倭王讚, 讚死, 立弟彌, 彌死, 立子濟, 濟死, 立子興, 興死, 立弟武」
보는 바는 왜왕 찬이란 분이 진의 안제 때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는 것인데 안제의 재위는 A.D. 396∼418로서 4세기말엽에서 5세기초엽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은 응신의 재위기간과도 중복됨으로 해서 아무래도 왜왕 찬과 응신과는 불가분의 관계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잠시 미루고 왜왕 찬의 다음을 보면 그가 죽자 동생 彌가 위를 계승하여 그의 집안이 삼대를 이어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동생 미'가 다른 중국측 기록에서는 모두 '동생 진'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彌는 珍의 이명일 수도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珍의 잘못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단 왜 5왕의 관계를 계도로 그리면 아래와 같이 된다.
이와 같이 이들이 친족관계란 걸 알 수 있는데 이 5왕이 활동한 전체기간을 보면 진의 안제(A.D. 396∼418) 때부터 시작하여 왜왕 무가 마지막 보이는 때가 '남제서' 왜국전의 건원원년(A.D. 479)으로서 동성왕 즉위년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왜왕 찬과 응신을 동일인물로 볼 때 응신의 즉위가 임진년(A.D. 392)이므로 이 때부터 왜왕 무의 마지막기사가 있는 건원원년(A.D. 479)까지는 88년간으로서 이 기간이 왜국에 5왕이 있었던 시대로서 소위 대화조정인 것이다.
그러면 먼저 왜왕 찬과 응신과의 관계를 보면 '일본서기'상에 있는 대로의 응신재위 기간은 경인년(A.D. 390, 이주갑조정)부터 41년간으로 되어 있는데 이 41년은 경오년(A.D. 430)이다. 이에서 경인년 즉위를 아신왕과 일치시켜 임진년(A.D. 392)으로 조정되어야 하므로 따라서 재위 기간(A.D. 392∼430)도 39년간으로 준다. 일단 응신의 재위기간을 이렇게 보고서 중국측 사서를 보면 왜왕 찬이 마지막 보이는 때가 '송서' 왜국전의 元嘉二年(A.D. 425)이므로 응신의 재위 끝과는 5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응신과 왜왕 찬의 활동이 동시대로서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응신이 장수를 누린 분이 되는데 팔십을 살았다 할 경우 근초고왕 6년(A.D. 351) 출생이 되고 왜왕에 즉위한 때는 42세쯤이 되어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활동기간이 일치하므로 찬과 응신이 동일인물로 되었지만 또 응신을 시어천하지천황이라 하여 아득한 옛날로 밀어 올려 등재시킨 신무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신대기 하 11단(一書第一)에 신무의 이름을 狹野尊이라 한다 하여 특기하고 있다.
이에서 狹野(사노)는 바로 찬(讚)의 음훈 '산'을 다시 한자의 음을 빌어 달리 표기한 것이고 이 讚을 훈독하면 '호무'가 되어 응신의 화풍시호인 譽田의 譽(호무)와 그대로 일치한다. 결국 이 왜왕 찬이란 이름을 음으로 읽으면 신무의 협야존이 되고 훈으로 읽으면 응신인 예전이 되므로 아주 편리하고도 절묘하게 연결이 되도록 지어진 이름인 것이다. <倭五王의 謎>를 쓴 安本美典氏가 소개한 '왜왕 찬=응신'설을 최초로 주장한 前田直典은 '호무'란 말은 옛날부터 찬미의 의미로 사용됐다. 찬미의 뜻으로서의 '호무'는 일본서기의 신대기에도 만엽집에도 보인다. 왜왕 찬의 찬이란 명칭은 응신천황의 이름 '호무'를 漢譯한 것이다<安本美典/倭五王의 謎/講談社/현대신서/p34>고 하여 찬과 응신이 동일인물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뿐만이 아니라 신무의 이름 '사노'가 讚(산)에 해당하기도 하고 찬과 응신이 활동한 시기도 일치하므로 해서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이렇게 왜왕 찬, 즉 응신이 즉위하여 재위 39년여인 경오년 무렵에 돌아가고 그의 동생 진이 위를 계승하여 삼대에 걸쳐 珍王家를 이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시 응신의 형제들을 생각해 보면 신대기 상 8단(一書第一)에서 소잔명존인 청의 아들에 狹漏彦, 八嶋, 篠 등 三人이 있고, 이들은 예진별명, 예전별명, 진언에 각각 해당한다고 언급된 바 있다. 이 篠(시노), 즉 진언이 응신 등과 부를 같이하고 있으면서도 천신계 신분인 그의 형들과는 달리 국신계로서 신분을 크게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생각컨대는 효덕기에 남녀법이란 고대 왜에서의 신분 분류기준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무조건 두 부모 중에서 신분이 낮은 쪽의 부나 모의 신분을 쫓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진언의 경우 父는 천신계이지만 그의 신분이 국신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은 그의 모가 국신계 여인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본서 '소잔명존과 대기귀신의 국양' 참조). 신무 즉위전기 갑인년조에 의하면 응신과 진언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는 기사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천황이 제황자와 선사를 이끌고 동으로 정복의 길에 나섰다. 속흡지문에 이르렀을 때 한 어부가 배(艇)를 타고 왔기에 천황이 불러 묻기를 "네가 누구냐"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은 국신으로서 이름은 진언이라 합니다. 곡포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천신의 아들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맞이하려고 왔습니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나를 위하여 길을 안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천황이 명하여 노(椎, 槁)의 끝을 건네 주어 잡도록 하여 황주에 끌어들여 해도자로 하였다. 이름을 내려주기를 추근진언이라 하였다. 곧 왜직부의 시조가 되었다」
이에서 응신인 신무를 천신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진언 스스로는 국신이라 하였고 노(椎)의 끝을 그에게 건네 주어 황주(황궁을 상징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로 끌어들였다 하여 응신의 뒤를 이어 왜왕이 된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언이 곧 왜직부의 시조가 되었다 하였고 고사기 및 성씨록에는 대왜국조라 하여 왜의 국주에 상응하는 호칭으로 일컬어지고 있음도 볼 수 있는데 성씨록 대화숙니조에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이 珍(우쓰)彦이 여기에서는 宇豆(우쓰)彦으로 한자만 달리 표기하였고 성씨 대화숙니의 대화, 대왜국조의 대왜 등은 대화조정과도 연관이 되는 것이다. 또한 효원記에 의하면 比古布都押之信命(경진주신)이 '木國造의 祖 '宇豆比古(우쓰히고)'의 妹 山下影日賣를 취하여 건내숙니를 낳았다 하였으며 이와 같은 내용의 기사인 경행紀 3년 2월조에서는 屋主忍男武熊心命이 紀直의 遠祖 토道彦(우지히고)의 女 影媛을 취하여 무내숙니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어 여기에서 대화숙니의 조 珍彦(우쓰히고)을 木國造의 祖 宇豆比古(우쓰히고) 또는 紀直의 遠祖 토道彦(우지히고)으로도 표기한 것을 알 수 있고 이 木國造의 木(기)과 紀直의 紀(기) 역시 같은 성씨명인데 기직을 성씨록에서 보면 응신인 천일창과 조를 같이 하는 친족관계인 것도 이미 확인해 본 바 있다』
○ 보충해설
△ 위에서 천일창이 「군공으로부터 소값 대신에 白石을 받았다」라는 것은 천일창이 왜왕 응신이므로 "천부로부터 탈취한 적옥(赤玉)"으로 고쳐야 한다.
△ 또 前田直典의 "왜왕 찬=응신"설에서 「응신천황의 이름 호무[譽]를 한역(漢譯)한 것이 찬(讚)이다」라고 하였으나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응신천황의 본명이 讚이다. 사서를 지으면서 본명에서 여러 가지 분식이칭들을 만들어 쓴 것이기 때문이다.
△ 기직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紀直; 神魂命五世孫 天道根命之後也(하내국천신)
가야계 이칭에 자주 쓰이는 '길 道'자가 쓰이고 있다. 응신의 이칭에 다지[田道]가 있고, 예진별명의 이칭에 道臣命이 있고 진언의 이칭에 우지.노.와끼이라쯔꼬[토道稚郞子]가 있다. 성씨록에 나오는 고혼명은 고황산영존으로서 초고대왕의 이칭이지만 신혼명은 아라사등의 이칭이다. 「고황산영존은 고천원계고 신황산영존은 출운계<고사기/강담사학술문고/次田眞幸/2000년/上/38p>」라고 한다. 고황산영존은 백제계고 신황산영존은 출운을 최초로 개척한 가야계인 것이다. 출운을 최초로 개척한 소잔명존(=아라사등)이 곧 신혼명이다.
紀直; 神魂命子 御食持命之後也(화천국천신)
미게[御食/三毛/三木]가 가야계 이름이고 고사기 중애기 기비대신조에 보면 응신이 미게쯔오호가미[御食津大神]로 나와 어식지명(御食持命)과 같은 이름이다. 또 미게[御食]란 이름은 서기 신대기 상5단 4신출생장 이설11에서 월야견존(=귀수태자)이 위원중국에 가서 죽여버리는 保食神과 연결되는 이름이다. 이 보식신사건은 천손으로 천강한 귀수태자가 서기 371년 3월 축자평정을 완료할 즈음 아라사등이 전사한 사건을 달리 꾸민 것이다.
기직은 아라사등의 중자 응신의 후손인 것이다. 大己貴神을 大穴持神이라고도 하는데 오호아나[大己]는 오호아나[大穴]와 같고 무지[貴]와 모지[持]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이므로 가야왕족이다. '무지[貴]'로 성씨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荒荒公; 任那國豊貴王之後也(섭진국제번)
역시 가야계다. 아라아라[荒荒]>阿羅羅>阿羅國이고 임나국은 가나[任那]가라>가나[金]가라다. 풍은 구주 북부에 가야가 개척한 지금의 후꾸오까[福岡]를 중심으로 한 豊國(=豊城)에서 땄고 '무지[貴]'는 大己貴神에서 딴 연결고리다.
'紀'자 돌림자를 쓰는 그룹이 하나 더 있는데 紀角, 紀朝臣 등이고 이들은 무내계로서 紀直만 가야계다.
紀朝臣; 石川朝臣同祖 建內宿니男 紀角宿니之後也(좌경황별)
건내숙니는 무내숙니이고 기각숙니는 서기 응신기 3년 시세조에 나오다시피 아신·응신연합군의 대진사왕 4차 역쿠데타전역에 참가한 무내숙니의 아들이다.
△ 위의 인용문에서는 응신의 즉위를 아신왕과 같은 서기 392년으로 보므로 견해가 조금 다른데 응신의 즉위는 서기 표면기사에서 이주갑조정하여 서기 390년 정월 1일이 맞고 그 4일 후인 정월 5일에 아신도 즉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대화왕조는 서기 390년부터 동성대왕이 즉위한 서기 479년까지 정확히 90년 간 존속했다고 본다.
△ 용과 거북, 뱀은 가야왕족의 상징
가야는 해양강국으로서 4세기 중반 열도까지 개척함으로써 해신으로 불렸고 용으로 종종 상징하였는데 성씨록에도 유일하게 용과 관련된 이름이 둘 있다.
大伴造; 出自任那國主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가나[任那]국주는 가라왕이다. 왕의 이름이 용주왕이고 그 손자가 사이[佐利]왕이다. '사이[佐利]'는 「(ㅅ+아래아)이>사이/새[新], 소이/쇠[金]」로 갈라진 것인데 원래의 성씨가 김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나라 문제라면 조조의 아들 조비를 지칭하는데 역시 꾸민 것이고 아나무지[安貴]가 오호아나무지[大己貴]에서 오호[大]를 뗀 것이다. 안귀공의 아들 龍은 일명 辰貴라고 하여 뜻이 같은 '용 辰'자에 다시 무지[貴]를 더 붙여썼다. 가야왕족인 것이다.
또 백제 동성대왕을 모델로 꾸민 서동설화에서는 용의 아들이라고도 하여 서동이 가라왕족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백제 진사왕의 시호에서 辰은 침류왕과의 관계에서 침류왕을 龍으로 비유한 것이고 진사왕의 아들 진손왕은 그 부왕의 이름에서 딴 것이므로 가야왕족 이름에 들어가는 '辰'자와는 의미가 다르다.
서기 신무기에는 진언이 타고 온 것이 배[艇]로 나오지만 고사기 신무기에는 "거북등을 타고[乘龜甲]" 나타났다고 하여 이 인물이 가야왕족임을 바로 알려주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탄강신화에 나오는 바로 그 거북이고 수로부인 설화에 나오는 거북이기도 하다.
또 <춤추는 신녀/이종기/1997년/동아일보사>에 보면 구주 팔대시 백목묘견궁 영부사에 모셔진 김수로왕의 그림에 뱀과 거북이 있고 묘견공주가 구주에 상륙할 때도 세 사람의 지도자와 가랏빠[加羅輩] 3천을 이끌고 거북을 타고 뱀을 앞세우고 상륙했다고 한다.
거북은 가라인들에게는 선단을 의미하고 김수로왕 탄강신화에 나오는 거북도 바로 선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락국 건국세력이 외지에서 이주해오는 것을 토착민들이 환영하는 형식이다. 외지에서 이주해 오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신화를 꾸민 것이다. 기타 기·기에는 백제와는 달리 가야계를 뱀으로 일관되게 은유한 사례가 여러 차례 나온다.
△ 그런데 아신과 응신의 밀약에 의해 서기 390년에 성립된 대화왕조의 응신이 상당히 장수를 한 편인데 그 사이에 백제는 왕이 여럿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 즉 아신왕 즉위 서기 392년, 아신왕 몰 및 전지왕 즉위 서기 405년, 전지왕 몰 및 구이신왕 즉위 등이다. 그리고 응신의 몰년이 서기 426년으로 추정되는데 그 직후에 백제에는 열도출신 비유왕에 의한 쿠데타가 있었고 구이신왕은 쫓겨나 열도로 망명한 기사가 일본서기에 나온다. 또 응신은 재위 중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시달리던 아신왕에게 여러 차례 원군을 보내주고 전지왕 즉위할 때쯤 초고대왕세에 빼앗긴 가라본국인 남해안 7국을 도로 반환 받아 아우인 진언이 다스리고 있었다는 내용도 앞에서 이미 나왔다.
◎ 왜의 5왕에 대한 대륙측 기록
○ 중국사적에 5세기초두부터 말에 걸쳐 왜의 讚, 珍, 濟, 興, 武 등 이른바 왜오왕이 차례대로 南朝와 교통한 것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서기 413년 「(東晉) 安帝 義熙 9년 왜국조공(晉書)」 「안제시 왜왕 讚 조공(南史)」
서기 421년 「(宋) 武帝 永初2년 왜의 찬 조공, 제수를 내리다(宋書)」 서기 425년 「(宋) 文帝 元嘉 2년 찬 司馬曹達을 보내 상표공헌(宋書)」 서기 430년 「(宋) 文帝 元嘉 7년 왜국왕 공헌(宋書)」 서기 438년 「(宋) 文帝 元嘉 15년(讚死) 弟珍立공헌, 이에 安東將軍倭國王에 제수(宋書)」 서기 443년 「(宋) 文帝 元嘉 20년 倭國王濟 공헌 이에 安東將軍倭國王으로 삼다(宋書)」 서기 451년 「(宋) 文帝 元嘉 28년 安東將軍倭王濟에 使持節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의 칭을 더하다(宋書)」 서기 460년 「(宋) 孝武帝 大明 4년 왜국공헌(宋書)」 서기 462년 「(宋) 孝武帝 大明 6년 (濟死 世子興 공헌) 이 해에 조하여 이에 안동장군왜국왕 칭호를 주었다(宋書)」 서기 477년 「(송) 順帝 昇明 원년 왜국공헌(宋書)」 서기 478년 「(興死) 武立上表(상표문 중에 臣亡考濟라고 보인다) 이에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에 제하다(宋書)」 서기 479년 「(南齊) 高帝 建元원년 武의 호를 높여 鎭東大將軍으로 부르다(南齊書)」 서기 502년 「(梁) 武帝 天監원년 武를 征東大將軍으로 부르다(南齊書)」
△ 珍의 이체자 '진'이 彌의 간자체 '미'와 비슷해서 오기했든가 아니면 열도어 '메즈라시[珍]'의 머리글자 '메'를 따서 '미'로 기록했든가 했을 것으로 보인다.
○ 위의 기록을 일본서기의 실사분석 결과와 대조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응신은 서기 390년에 초대왜왕으로 즉위하였고 서기 426년에 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서기 425년의 「文帝 元嘉 2년 찬 司馬曹達을 보내 상표공헌(宋書)」이라는 기록이 찬이란 이름으로 마지막 등장한 것이고 왜왕 찬은 일본서기의 응신천황에 해당되어 서기 426년에 몰했으므로 서기 430년의 「文帝 元嘉 7년 왜국왕 공헌(宋書)」이라는 것은 응신의 아우 진언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 "응신천황의 정확한 몰시기" 참조
△ 서기 438년의 「문제 원가 15년(서기 438년) 讚死 弟珍立 공헌 이에 安東將軍倭國王에 제수(송서)」라는 기록은 시기가 늘어진 것이다. 문제 원가 7년에는 응신이 죽고 진언이 즉위한 사실을 왜의 사신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고 원가 15년에야 알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 왜왕 제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서기 443년의 「문제 원가 20년 倭國王濟 공헌 이에 安東將軍倭國王으로 삼다」라는 기록은 「미死立子濟(양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珍王이 서기 443년 이전에 몰했음을 알 수 있다.
△ 서기 462년의 「(宋) 孝武帝 大明 6년 (濟死 世子興 공헌) 이 해에 조하여 이에 안동장군왜국왕 칭호를 주었다(宋書)」라는 것은 제왕이 몰한 직후로 판단된다. 그 다음 대를 이을 흥이 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흥은 세자로만 나오고 「(송) 順帝 昇明 원년(서기 477년) 왜국공헌(宋書)」라는 기록에도 이름이 없고, 서기 478년에 「(興死) 武立上表(상표문에 臣亡考濟라고 文句 有)(宋書)」라고 하여 흥이 죽고 무가 즉위했는데 제의 아들이라고 했으므로 흥은 왕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도 서기 438년의 '송서' 기록처럼 시기가 늘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왕도 그 조부 진언의 경우처럼 쿠데타에 의해 왕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 즉위시기가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서기 502년의 「(梁) 武帝 天監원년 武를 征東大將軍으로 부르다(南齊書)」라는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열도출신의 동성대왕이 열도를 먼저 장악하고 서기 479년에 백제왕이 되면서 아들을 후왕으로 임명하였으므로 따로 왜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왕으로 부임한 동성대왕의 아들들 이름이 동성대왕을 등재한 흠명기 8년 4월조와 15년 2월조에 '東城子言', '東城子莫古'로 나온다.
게다가 서기 501년에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암살하고 백제왕이 된 후에는 무령왕의 아들 斯我가 후왕으로 부임한 것도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무열기 7년 4월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서기 479년 이후에는 무왕의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기 479년의 「(南齊) 高帝 建元원년 武의 호를 높여 鎭東大將軍으로 부르다(南齊書)」라는 기록이 무왕의 마지막기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 대화왕조 5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 讚王은 서기의 응신천황으로 서기 390년 즉위 426년 몰했다. 2대 珍王은 서기의 진언으로서 서기 426년 즉위 늦어도 서기 443년에 몰했다. 3대 濟王은 늦어도 서기 443년에 즉위하고 서기 462년에 몰했다. 4대왕으로 알려진 興은 세자로 끝나고 왕이 된 적 없으며 역시 462년 정도에 몰했다. 5대 武王은 462년 정도에 즉위하여 479년까지 재위했다고 보아야 한다.
대화왕조는 정확히 서기 390년부터 479년까지 90년 간 존속했고 그 후에 가야왕족인 동성대왕이 백제왕이 되어 묘한 과도기가 23년 간 있었고 백제 여씨왕실 기준으로 무령왕부터 열도가 백제령이 된 것이다.
기록을 보면 5왕인 것 같으나 실제는 4왕이며 응신은 천신이고 진언은 국신이며 (응신 찬>찬의 아우 진>진의 아들 제>제의 아들 무)로 이어진 것이며 제의 아들 흥은 세자였으나 왕은 못된 것이다.
무왕은 귀수대왕을 등재한 고사기 윤공기에 신라사신 金波鎭漢紀武라는 이름 등장하여 윤공천황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대화왕조의 마지막왕 이름을 대표로 내세워 가야의 대화왕조가 막을 내리고 귀수대왕의 숙원이던 열도병합이 이루어져 아스까시대가 곧 개막된다는 의미를 가진 은유적인 설화인 것이다.
신라는 가라의 이칭이며 성은 金이고 波鎭은 마치 경주신라인인 것처럼 나타내기 위해 차용한 벼슬이름이고 漢紀는 干岐/旱岐와 같은 진한어 王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름만은 武인 것이다. 이들 왜왕들의 본명은 金讚, 金珍, 金濟, 金武로서 가야왕족들이다.
이들 실질적인 열도의 네 왕 중에 응신은 7명의 천황으로 꾸며져 등재되어 있으나 기·기는 천신계 위주로 쓰다보니 진왕가는 국신계라고 차별하여 천황으로 등재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진언만은 응신과 함께 워낙 뛰어난 활약을 많이 했기 때문에 기사가 부실한 2대 수정천황으로 실려 있는 정도다. 그래서 나머지 왜왕들은 일본서기에도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동성대왕은 역시 천신계로서 응신의 형인 예진별명의 증손자이며 백제왜통합왕국을 이루어 결과적으로 아신왕의 직계후손인 무령왕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무열, 흠명, 서명천황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