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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문학,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장 지 성
- 어두운 가족사의 그늘
나는 광복이 되던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당시 아버지는 영동군청 산림과에 산림주사 직으로 근무하면서 직장에서 가까운 영동읍 부용리 영동의 토호 강옥가(姜玉家) 고택 옆집에 세를 얻어 어머니를 기거케 하였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께서 늦은 나이에 늦둥이 외아들인 나를 그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두 딸을 낳은 후 늦은 나이에 기다리던 아들을 보게 되었음으로 기쁨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늦게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였다. 아버지께서는 결혼 20년까지 슬하에 아들을 보지 못하자 후실을 들여 이미 두 아들을 얻으신 것이었다. 후실한테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득남의 영광은 이미 쇠퇴한 후였다.
내가 굳이 어디에서도 누설치 못했던 나의 가족사를 여기에 밝히는 까닭은 이러한 요인들이 후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께서는 집을 떠나 후실과 딴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농장으로 들어가 홀로 많은 농토를 경작하며 세 남매를 키우셨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께서는 추수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소작료를 받아가듯 어머니께서 애써 농사지어 거둔 농산물을 챙겨 가시는 바람에 끊임없이 가정불화가 이어졌다. 이러한 충돌은 내가 결혼한 후 세 자녀를 볼 때까지 연례행사처럼 지속되었다. 어느 해 그곳 형제들 몫의 토지를 모두 매각 처분해 간 후에야 길고 긴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외로움 속 가정불화를 지켜보면서 그 아픔을 견디고 추스르기 위한 잠재적 해법이 후일 생각해보면 곧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었고 또한 나를 지탱하여 준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홀로 유년 시절을 보내다 심심하여 둘째 누나가 등교하는 영동초등학교에 따라다니다 일곱 살 때 자연스럽게 조기 입학하여 3학년 때 학구(學區) 변경 강화로 양강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새 학교는 집에서 십오 리 정도의 먼 거리로 재를 세 번 넘어야 되고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 겨울에도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다. 그러나 학교를 오가던 산길엔 철따라 아까시아꽃, 찔레꽃, 들국화 등이 지천으로 피었고 꾀꼬리 뻐꾹새 등 각종 새들의 지저귀고 있어 이 모든 풍광들이 각인되어 나중에 내 문학 속의 서정성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도 문학파였는지 수시로 우리에게 작문(글짓기) 시간을 가져주었고 간혹 내 글이 뽑혀 앞에 나가 더듬거리며 읽곤 하였다. 그 무렵 우리 집을 찾으신 먼 친척 분께서 나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셨다. 나는 한걸음에 읍내 서점으로 달려가 윤석중 선생님이 발간한 월간지 『새 벗』을 구입하여 단숨에 독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기억들 모두가 어쩌면 문학성의 잠재력을 일깨워준 불씨가 아니었는가 생각하여 본다.
나의 모교인 양강초등학교에 들어서면 큰 상수리나무가 교문 앞 운동장에 몇 아름의 수령을 자랑하며 그늘을 펼쳐주고 있다. 현재는 그 둘레에 대리석 돌 의자를 설치하여 학교를 찾는 이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십여 년 전에는 학교 측에서 나에게 놀이터 이름 짓기를 문의해 온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자리>란 이름과 함께 취지문을 써주어 지금도 와비(瓦碑)로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모교 운동장에
하늘 가린 상수리나무
반백년 세월 접어
찾아 든 이 가을에
낙엽도
받아쓰기를 하는가
한 잎 두 잎
추억들.
- 졸시 「받아쓰기」전문
읍내에 있는 영동중학교로 진학하여 1학년 때의 일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여름 방학숙제로 시 5편을 써오라 하셨다. 당시만 해도 시집으로는 「진달래꽃」「산유화」「못 잊어」 등 김소월의 시집이 선물용이나 소장품으로 겨우 눈에 보일뿐, 시골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시집을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 나보다 한 살 많은 둘째 형이 천안에서 방학을 맞아 다니러 왔는데, 형의 학교인 <교지(校誌)>가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펼쳐보니 내가 좋아하던 산문도 있고 내 또래들이 쓴 시들도 많았다.그 당시 활자화만 되면 모두 명시요 명작이라 여기던 터라 나는 몇 번이고 그 시들을 읽으며 나만의 시 작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형을 졸라 그 교지를 내 것으로 챙긴 후 방학 동안 여러 개의 시를 짜깁기하여 시 5편을 완성, 개학 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숙제로 제출하였다.
며칠 후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호명하며 이 시를 본인이 썼냐고 넌지시 물으셨다.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굳어져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친구들의 시선을 피하였다. 매우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에겐 자극과 오기가 되었다. 앞으로 훌륭한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한 동기가 된 것이다. 나는 학교 도서관 등 눈에 띄는 대로 문학에 대한 책을 빌려 읽으며 어느덧 나는 꿈 많은 문학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 문학 선배들을 만난 후
영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한 학기를 쉬어 같은 반이 된 나의 첫 문우인 박희성(시조) 군과 2년 선배인 박용삼(시. 시조. 소설) 이방남(시조) 송두헌 형들을 만났다. 특히 박희성의 친형인 박희선(시) 선배를 만나 문학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며 수년간 모은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 스크랩을 빌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잡기장에 옮겨 적는 열정으로 문학의 시야를 넓혀나갔다. 박희선과 박희성 형제는 이미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이 된 두각을 나타낸 준 시인이었고 박용삼, 이방남 선배도 각종 문학상에 응모하여 입상하는 등 든든한 선배들이었다. 이러한 선배들은 만난 것은 나의 문학 진로에 큰 도움과 힘이 되었다.
그리던 중 1학년 후반기에 처음으로 충청일보에 투고한 시 「꽃」이 문화면에 발표되었다. 그때의 기쁨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시도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으면서 나의 문학을 향한 열정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이방남 선배는 당시 시내 평화여관 집의 아들이었는데 우리는 선배의 방을 아지트로 삼아 그곳에서 <피노래> 문학 동인(이방남, 박희성, 장지성, 김사진, 정현희, 배순식)을 결성하며 1963년 동인지 『해안림』을 활판인쇄로 출간하였다. 또한 <문학의 밤> 행사도 가졌는데, 영동문화원에서 안톤 체홉 작 「청혼」의 시극(詩劇)까지 펼치는 열렬한 문학도가 되었다. 이 무렵 영동의 <피노래> 동인과 청주의 <푸른 문> 동인은 서로 다투어 충청일보 문화면에 서로 경쟁하듯 시단을 쟁탈하였는데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 모두의 문학적 밑거름과 자양이 되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숲」이 당선된 후 본격적으로 문학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1964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당대의 문호인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교수님과 김구용, 김상일, 손소희 함동선 등의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학우 박남규(소설), 최범서(소설), 윤금초(시조),유광우(소설), 장지성(시조), 조영일(아동문학), 장현규(시), 박희국(소설) 등과 <원형질> 문학 동인을 결성,비록 프린트판 동인지였으나 수차례 발간하는 열정을 불태웠다, 또한 이 무렵 시조 분야에도 깊이 매료되어 윤금초 문우와 함께 월하 이태극 박사님을 수시로 찾아뵈어 재학 중 『시조문학』지에 초회 「안부」작품과 2회 「꿀벌 연가」를 추천 받았다.
또한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딸기밭 소묘」가 가작으로 당선되어 문우들에게 축복을 받기도 하였다.」
1
무엇으로 남기를 원하는가.
조용히 풍화되어 가는
내 육신의 어느 부분에서
한 뼘씩으로 커나가는 욕망의 그늘
생성하는 의미의 땅거죽에서
부시게 빛나는 동화의 잎들의
그 자리한 정물
어디쯤에서 햇살은 뿌리를 내리고
꿈이 익는 가를
소녀여
목 쟁반을 내놓고 이야기 해 보자.
2
언젠가 자홍색 표지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를 풍기며
처녀 시집
램프를 켜들고 달려온 소녀
채취가 무르녹도록 악수를 하고
구름 끝의 바람처럼 웃던
그 시절
그때 딸기가 익었던가
익어 터졌던가.
3
달빛이 넘치는 밤에
천개의 별들을 합성하여
술을 만들면
그 빛깔은 어느 은밀한 색일까
얼마나 멋있게 취할 수 있을까
.......하고
딸기를 심던〮......
4
옛 날에 옛 날에
웃음을 포개어 지층을 높이던
그 시절
무엇으로 사멸되길 원하는가
샘물에서 물방울이 튕겨 오듯
그렇게 포말 져 강으로 흐르는 기원이
이 밭 가장에서 조용히 머물면
그대의 심혼은 딸기가 되어
새로운 자리를 열심히 닦아
영지를 넓히고
터득하고
5
나의 눈이 처음으로 트이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본 소녀의 볼을 하고
나를 빨아들이던 매혹적인 입술
갸봇이 고개 숙인
그 성숙이
모래알처럼 굿굿한가
전원의 소녀여.
6
우리 가을 애길랑 아예 말자
귀뚜리 우는 묘지의 슬픈 바람 소리
그 주위에 있는 것은
모두 그렇게 보이듯
이 밭의 가상 자리에 의자를 놓고
램프의 설운 가락에 시를 읽히며
딸기여
너의 눈빛으로
우리들의 피부를 색칠해 보자.
- 졸시 「딸기밭 소묘」전문
66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가작으로 입상한 「딸기밭 소묘(素描)」 전문이다. 당시 서정주. 김현승 시인의 심사평이 있기에 여기에 기술하여 본다. 당선인 文孝治의 「바람 앞에서」는 시상의 통일과 시어의 세련된 점에 있어 단연 어느 응모작품보다도 우수한 것이었다. 가작의 張芝城의 「딸기밭 素描」는 좋은 시의 발광체들을 군데군데 지닌 점,장례를 많이 촉망케 한다. 그러나 아직 포에지로 순화 안 된 개념 층의 정리는 이 작자 당면의 과제라야 할 줄 안다.(徐廷柱記)
「딸기밭 素描」는 분방한 감성과 뛰어난 상상력 구사에 있어,「 바람 앞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순수언어의 매력에 있어 두 편이 똑같이 뛰어난 작품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두 선자의 오랜 논란 끝에 당선작과 가작으로 운명적으로 나긴 하였으나 가작도 당선작에 떨어지지 않는다.(金顯承記)
심사평에서 밝혔듯 당선작 결정에 두 분께서 자신이 미는 작품을 위해 오랜 격론을 벌이신 모양이다.결국 가작 제도를 즉석에서 신설하여 입상되었지만 이 또한 김현승 선생님의 심사기처럼 운명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2년 전 어느 날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김천 집의 서제 삼오야서(三五野墅)에서 밤늦게까지 한국 문단사를 두루 나누던 중 선생님은 당시 66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심사평 과정을 야사처럼 말씀해 주셨다. 각자가 선택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 위하여 몇 시간 대립한 끝에 두 분은 심사실에 맨 처음 들어오는 사람(기자)에게 두 작품을 읽혀보고 그 결정에 따르자고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분위기를 파악한 기자가 감히 누구 작품에 손을 들어 주겠는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나인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덤덤하게 당시의 일화를 말씀하셨다. “선생님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바로 저예요” 하며 말씀드리니 그제야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7년, 문학도들이면 선망의 대상이었던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제6회 신인예술상에서 단편소설 구약신서(舊約新書)」가 장범루(張凡樓)란 필명으로 당선되었다. 그것도 문학부문 각 장르에서 특상으로 수상되는 영예를 안은 원고지 120매 분량의 중단편이었다. 이로서 시. 시조.소설 전 장르를 섭렵(?), 당시 문우들한테 문학 깡패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그러한 패기와 열정이 마그마처럼 나에게도 내재되어 있었구나 하는 감회에 젖어본다.
시상식 때 축하해 주기 위해 국립극장을 찾아주신 월하 이태극 박사님께서 신인문학상 특상으로 2회 추천작 「꿀벌 연가」를 추천완료 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으나 나는 객기(?)인양 3회 추천의 정도로 밟겠다고 고집하였다.
그 후 군 입대 중 1969년도에 작품『과수원 마을』로 추천을 받았다. 그것도 윤금초 시인이 지니고 있던 내 작품을 시조문학사에 제출해 준 덕분에 60년대 시인의 반열에 같이 설수 있는 잊지 못할 도움을 주었다.
- 고향을 지키며
1970년에 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박남규, 윤금초 문우를 서울 광화문 근처 모 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취직자리를 알선하여 주겠다며 상경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시골에서 노모를 모셔야 했기에 나는 두 분의 제안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고향에 내려와 보니 이복 큰형이 어머니 농사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시골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시골에 눌러앉자 형은 다음 해에 슬며시 올라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님의 곁을 떠나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기에 농사짓기를 결심, 그 해 12월 31일 처(전선구)와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껏 사과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군이 된 것이다.
그 무렵 고향에서 함께 문학의 꿈을 키워왔던 문학 선배이자 동료인 박용삼, 이방남, 박희성 등 모두가 생활의 근거지를 찾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영동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임진철(희곡)의 도움을 받아 박운식(시), 전태익(시조), 김석환(시), 민영이(소설), 성낙수(시) 양문규(시) 양선규(시) 이한순(시) 등의 후배 문학도들을 규합하여 <영동문학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매곡면 농협에 근무하는 박희선(시) 선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문학회지 『추풍령 』휘호를 미당 서정주 선생님께 받아와 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영동을 일컬어 예로부터 예향의 고장, 문향의 고장이라 일컫는다. 그만큼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사실 영동의 문학적 태두(泰斗)는 나의 이웃 동네 산막리 출신인 1920년대 아나키스트인 흑성(黑星) 권구현(權九玄)(1898-1938) 시인이다. 또한 우리나라 육군 창설 멤버였던 군번이 8번인 지오 이영순 장군 시인과, 고교시절 학원문학상 시부 수상자이자 드라마 작가였던 향산 구석봉 시인,그리고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고원 시인, 소설가 이동희 교수, 수필 문단에서 크게 활동하시던 송도, 이숙 수필가, 그리고 대전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박명용 시인 등 훌륭한 문인들이 영동 출신임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권구현 시인은 1920년대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아나키즘 문인으로 신채호, 이광수 김화산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시· 시조· 소설· 서예· 미술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 족적을 남기셨으며 대금 연주의 명인으로 모든 예술의 천재인 분이다. 시집으로는 『흑방의 선물』(영창서관1922)이 있고 소설로는 「폐물」 「인육시장의 점경」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권구현 전집』(김덕근 엮음, 도서출판 박이정, 2008년)이 발간되어 한국문단사의 재조명을 받고 있고 선생의 시비가 영동 양산 국민관광지 문향의 숲에 건립되어 선생의 문학 혼을 기리고 있다.
당시 권구현 선생의 출신지가 우리 고향 근처라는 게 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를 확인하고자 내가 사는 양강;면사무소 민원실을 찾아 權九玄 선생의 제적부를 샅샅이 들쳐보았으나 그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하여 동명이인을 살펴보다 權龜鉉이란 이름이 있어 추적해 보니 權九玄은 필명이고權龜鉉이 본명임을 알았다. 또한 내가 3학년까지 다니던 영동초등학교 1회 졸업생임을 학적부를 들춰 밝혔고 선생이 묘소가 고향 뒷산에 있음을 현지를 찾아 알아냈다. 지금도 선생의 고향 마을엔 먼 일가들이 살고 있으며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선생의 조부가 높은 벼슬인 감찰사로 마을 앞 농토 일대를 소유했던 부농의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부친이 재산을 거의 탕진하였고 선생은 서울 등지에서 일정한 직장도 없이 원고료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 순천에서 박봉이와 동거 중 음독, 40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과연 천재는 단명이란 말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 작고 문인들의 시비건립 추진
이 무렵 우리 지역에서 사단법인 한국예총 영동지부 발기를 준비, 중앙으로부터 인준 받은 예술협회 3개 지부가 있어야 된다는 규정 때문에 <영동문학회> 시대를 마감하고 1986년도 한국문인협회 영동지부를 결성하여 초대 한국문인협회 영동지부 회장 직을 맡은 나는 그동안 발간해오던 「추풍령」을 협회지 「영동문학」으로 개정하여 발행하였고 첫 사업의 일환으로 영동출신 <작고문인 시비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추진위원장 직을 맡게 되었다. 양산 송호리 국민관광지 아름드리 천년 솔밭에 시비동산을 조성, 영동군의 군비를 일부 지원 받고 전국 규모의 성금을 모금하였다. 그리하여 <흑성 권구현 시비>와 <지오 이영순 시비>, <향산 구석봉 시비>를 건립하고 1993년 12월 4일 현지에서 영동의 각 기관장 및 많은 문인들과 주민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또한 솔밭을 시비 동산이라 이름하는 뜻에서 <문향의 숲>입석비를 세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늘 푸른 숲들이 유구하듯이
우리의 영동은 숱한 문인들이
고향의 얼을 빛내주고 있으며
또 그렇게 유구히 문향의 맥을 이어나갈 것이다.
눈물겹게 살다간 문인들의 숨결과 발자취들을
여기 한 그루씩 심는다.
1993. 11. 10.
한국문인협회 지부장 장지성
이런 행사를 계기로 영동 문인 협회는 지역회원은 물론 전국에 산재한 영동출신 문인 100여 명을 초대하여 전국 군단위에서는 처음으로 <영동문학인대회> 초대형 행사를 회장 재임 중에 가졌다.. 또한 1993년 충북 도청에 근무하는 전태익 시조시인과 협의. <충북시조문학회>를 발기하여 장이두 스님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박용삼, 장지성, 이계상, 송재섭, 최정란, 정은기, 윤상희, 최진섭, 윤현자, 나순옥, 조선호 등과 뜻을 모아 창립하였다. 그리고 1995년도 협회지 『충북시조』를 창간해서 지금까지 19집을 발간하며 30여명의 회원들을 늘려 꾸준히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다.
-백수 정완영 시인과의 긴 인연
1960년대 말에 약관의 나이로 문단에 입문하면서 많은 스승들과 선후배들을 만났다. 하지만 지방에 살다보니 극히 개인적인 만남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시절 <원형질> 동인 중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는 최범서, 윤금초, 유광우, 김종국, 유상용 등 몇 동기들과는 지금도 정기 모임을 지속하고 있고, 이미 작고하였지만 영동 문학의 텃밭을 일구고 가신 향산 구석봉 시인과 옥천이 고향인 고, 이은방 시조시인과는 매우 가까운 친분 관계를 작고하기 전까지 가졌다.
그 중에서 특히 백수 정완영 선생님과는 선생님을 모시는 많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문연(文緣)을 지속하고 있다. 내가 속한 영동 문인협회에서는 연례행사의 하나로 해마다 가을이면 <시 낭독회>를 가졌다. 당시 회장으로 있던 1990년도 시낭송회에 선생님을 연사로 모시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서 하루 밤을 머무르신 선생님께서는 다음날 한 번 읽어 보라고 하시며 작품 한 편을 나에게 보여주셨다.
건네받은 시는 현재 직지사 정문 옆에 자연석 시비로 아담하게 새겨진 4수 연시조 「직지사 운」 작품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의중을 읽고 대뜸 내 차로 선생님을 모시고 직지사로 달려가 주지 스님인 록원 스님을 만나서 선생님의 작품을 보여드리며 “스님 이 시를 경내에 세우면 직지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며 취지를 말씀드렸다. 스님께서는 시를 읽어보시고 흔쾌히 승낙하시며 시비를 세운 경험이 없어 걱정하시기에 나는 영동의 작고 문인들 시비 3기를 세운 경험이 있다고 소상히 말씀드렸더니 스님은 그 자리에서 연수원장인 법일 스님을 불러 같이 상의하여 시비를 건립하라는 모든 전권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실 시비 한 기 세우는 것은 그리 간단한 공사가 아니었다. 장소는 정문 앞 산기슭으로 결정되었으나 우선 시비를 세울 적합한 석재와 시를 쓸 서예가, 그리고 글자를 새길 각자 공 등 선생님의 시에 부합되는 최고의 권위 있는 명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서예는 지금 예술원 회원으로 계시는 이근배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당대의 명필이신 일중 김충현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와 해결되었다. 그리고 돌은 1차 구해온 것이 작품 4수가 들어가기가 협소하여 일 년 이상에 걸쳐 탐석하여 가져온 온 돌이 현재 시비로 선 자연석인데 그야말로 선생님의 시와 격이 맞는 명석(名石)이었다.
모든 공정작업은 내가 영동에서 시비를 세울 때 맡겼던 사람들을 총동원하였다. 각종 장비까지 영동에서 운반해와 약 한 달여에 걸친 작업 끝에 시비가 드디어 완성, 전국 유명 문인들과 시조협회 회원들이 대거 참석, 직지사에서 주관하여 성대히 시비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당당 3년 여나 걸친 공정기간이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동기가 되어 정완영 선생님과는 더욱 돈독한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며 더욱이 선생님께서 고향인 김천으로 거처를 옮겨오신 후, 내가 농군으로서 바뿐 일정과는 상관없이 간간히 호출 받아 밤늦게까지 시담을 나누다 자정이 되어야만 나를 해방(?) 시켜주시곤 하였다.
이암(離岩)을 불러놓고, 실개천을 흘러놓고
철 따라 꽃이 피는 과수원을 차려놓고
잘 가꾼 세월 한 자락 지성(芝城)이 난 부럽다.
반겨줄 사람 하나 다시없는 내 고향 땅
순금으로 빚은 햇살 행여 반겨 주시려나
민들레 꽃 피는 언덕에 터를 잡아 내가 왔다.
지성(芝城)과 나 사이가 고개 너머 칠 십 리 길
쇠기러기 울고 가는 빗살무늬 하늘 저 쪽
구름도 산 너머 마을 쉬어 가는 한 나절.
- 白水 정완영 <이수동(二水同) 시인에게>
영동은 삼봉천과 천마천이 합류하여 유역을 이룬 소읍으로 한문으로 풀어쓰면 이수동(二水同), 즉 두물머리인 영동(永同)이 되며, 이암은 우리 마을 앞에 우뚝 선 명산을 말한다.
선생님께서 어느 날 슬며시 나에게 건네준 우정의 시요, 애정의 시이다. 선생님의 현재 세수가 97세이시고 아직도 정정한 모습이니 선생님의 자호처럼 백수는 넘게 사실 것이다. 지금도 같이 자리를 하면 기억 속의 모든 시들을 꺼내어 한바탕 시 강좌를 하신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지시면 흘러간 옛 노래를 같이 부르자고 어린애처럼 조르신다. 이러한 선생님의 순수함과 유머 감각이 건강과 장수를 지속하는 비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내륙(內陸)도
깊은 김천
교동의 연화지에
왕벚꽃
화들짝 핀
수궁(水宮) 같은 몽돌찻집
그 봄날
백수시담(白水詩談)에
하르르 지는
꽃잎 꽃
잎.
- 졸시「연화지의 봄」
어느 해 봄날 선생님께서 경기도 화성에 사는 김영주 시인과 영동의 최정란 시인을 같이 김천으로 불러 점심까지 베풀어주시고 교동에 있는 연화지 연못의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마주하며 몽돌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시담을 들려주시던 그 날의 정경을 떠올리며 쓴 「연화지의 봄」이란 나의 졸시이다.
선생님과 같이한 숱한 세월들... 언제나 선생님께서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듣는 편이다. 선생님은 메모지나 참고 자료가 필요 없으셨다. 모든 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어 그저 끄집어내시면 되는 것이다. 올해도 꽃피는 봄이면 선생님과 마주하며 어느 문학 개론에도 찾을 수 없는 진곡하고 구수한 시담을 또 들을 수 있겠지 하는 고대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 금강산 호텔. 남북문인 시 낭독회
월하 이태극 선생님이 애지중지 가꾸어오셨던 『시조문학』지가 선생님의 노환으로 김 준 시인에게 인계되면서부터 그 잡지 발간에 협조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나는『시조문학』사에서 운영하는 각종 문학상 심사 및 신인문학상 심사평을 도맡아 쓰는 추천위원의 한 사람으로 수년 전까지도 협조하여 주었다. 1999년 여름 『시조문학』지를 협찬하는 <한국시조진흥회> 회원의 여름 세미나 행사를 강원도 만해마을에서 가졌다. 그곳에 무산 스님이 계셨다. 함께 간 시조진흥회 회원들과 김준 박사와 함께 집무실로 찾아뵈니 스님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우리들에게 일일이 근황을 물으시며 문단의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범문을 구수하게 들려 주셨다. 또한 월하 선생님께서 잘 가꾸신 『시조문학』지에 애정을 가지시며 『시조문학』지 발전을 당부하여 주셨다.
2001년 6월 14, 15 양일간 <만해축전> 일환으로 금강산 호텔에서 이북 문인들과 남북문인시낭독회 행사가 있어 원로시인이신 고은 대회장을 비롯하여 신경림, 문효치 신달자 시인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시조 장르에서는 장순하, 이근배, 김제현, 김준, 김교환, 윤금초, 한분순, 박시교 시인 등 많은 문인들과 함께 초청되어 참석하게 되었다. 비록 이북 시인들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불참하는 바람에 우리끼리 시낭독회를 가졌지만 이북 땅에서 펼친 시낭독회와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다녀 온 기쁨은 지금도 눈에 어리는 귀한 추억중의 하나이다.
또한 만해마을 입구 시벽(詩癖)에 세계 유수한 시인들과 국내 저명한 시인들과 함께 이영도 시조문학상을 수상한 나의 작품 「아지랑이」가 동판으로 새겨져 있음은 개인적으로 기쁨이요 영광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아득히 그 속에서
서럽게 웃음 지으며
가고 있는 거냐
뒤돌아보는 거냐
못다 푼 숨결로 남아
번열하고 있는 거냐.
우리 이별 없을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세상 저 밖으로
이름 없이 사라져 간들
그 시절 눈물로 되어
떠 흐르는 것이냐
- 졸시 「아지랑이」
돌이켜보니 이십대 약관의 나이에 문단에 발을 들여놓아 거의 반세기를 맞았다. 그냥 물길 흘러가듯 순탄하게 오늘에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눈물겨운 애환사도 많았다. 때로는 잰걸음으로, 때로는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결코 한 눈 팔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 같다.
1982년 『풍설기(風雪期』 첫 시조집을 펴냈고 1991년에 『겨울 평전』을, 2003년에 자유시집 『제목을 팽개쳐 버린 시』를 발간, 2010년에 『꽃 진 자리』를 간행하였다. 시인으로서 다소 게으른 행보에 자책도 하여보지만 이 시점에서 더욱 분발하여 서랍 속에 가두어 둔 시편들을 포함, 앞으로 두어 권의 작품집 발간과 단시조집, 시조선집 및 시, 시조, 소설 등을 망라한 전집 발간을 등을 계획하여 본다. 또한 내 서제에 걸려있는 <언제나 초심으로>란 좌우명이듯 문학열(文學熱)을 향한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은 한 시도 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되뇌어 본다.
- 내 인생에 문학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