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哲宗,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재위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원범(元範), 휘는 변(昪), 자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며, 사후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1908년(융희 1년)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철종 이원범은 1831년(순조 31년) 음력 6월 17일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용담 염씨(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은 홍국영이 상계군을 정조의 후사로 추대하려던 사건과, 정조 사후 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신씨가 천주교를 비밀리에 신봉하던 것이 적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이후 순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한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아들여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한다. 1817년 순조는 강화도 안에서 은언군 아들들의 집을 지어주는데 노론 대신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순조는 석방이 아니니 번거롭게굴지 말라면서 넘어간다.
1822년에는 위리안치형에서 형을 감형하여 은언군의 자식들의 집 주위의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하게 해주어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하는 조치를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반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순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30년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 철종은 1831년 한성 경행방 사제에서 출생할수 있었다. 그러나 1836년 민진용의 옥사로 인해 그의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당하게 된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원경과 영평군 경응을 낳고, 후실 부인인 용담 염씨에게서 원범을 얻었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으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강화도 생활
- 민진용의 옥사, 강화도, 용흥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이주한 철종의 가족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철종의 생가는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번지에 있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강화도에서 농민과 행상으로 살던 그는 양순이라는 천민 처녀를 만나게 된다. 시골도령으로 자라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철종은 강화에서 살 때 양순과 혼약을 맺은 사이였다. 하지만 천민은 궁녀조차 될 수 없는 엄격한 규범 때문에 양순을 궁궐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양순을 잊지 못한 철종은 상사병을 앓는다. 그러자 왕가의 사람들은 양순을 은밀하게 죽여버린다. 일설에는 그의 방탕한 생활과 죽음의 원인을 양순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철종은 비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는 것이다.
치세
즉위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4] 철종이 항렬상 선왕인 헌종의 후사는 될수 없어도,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후사가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사대부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한다.
즉위 초반과 섭정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 인해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무는 세도가들에 의 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가가 사사로운 인맥으로 관직에 오르게 된 어느 시골의 관리가 한성에 입경한 뒤에도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군수에 임명되었다고 그의 앞에서 자랑하기도 한다.
친정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 조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동학과 삼남지역의 민란
- 동학, 임술농민봉기, 진주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최제우의 처형 이후 동학에서는 상소와 연판장을 올려 교주가 역적이 아니라며 신원을 요구하였다. 1862년 1월에는 향리, 아전들의 착취에 견디지 못하고 경상도 진주에서 난이 발생한다. 진주민란은 육지로 확산되었지만 곧 관군에 의해 제압된다.
62년 9월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대정현 사람 강제검과 제주 봉개리 사람 김흥채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한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 진주민란과 제주민란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실질적으로 거두는 향리와 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년 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장두인, 강제검, 김흥채는 체포후 압송되어 처형된다.
사망
1862년부터 철종은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고, 누워있거나 의관의 진맥을 보면서 겨우 정무를 결재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했다.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병으로 승하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그의 7촌 조카뻘이며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계승하였다.
사망 직후
1862년 이후 자주 약방의 입진을 받던 철종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에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은 서로 옥새를 손에 넣으려 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미 신정왕후와 미리 밀계를 맺은 상태였다. 왕의 임종을 지켜본 신정왕후는 재빨리 어보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한다. 그는 흥선군의 적실 제2자 명복을 익종대왕에 입승대통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로서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 이후 철종의 시신은 빈전에 안치되었다가 경기도 고양에 장지가 정해졌다.
묘호는 철종이고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예릉(睿陵)이다.
사후
1903년(고종 광무 7년)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에 의해 고향 생가가 중건하였다.
그의 생가는 대한민국에 와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그에게도 황제로 추존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나 1908년(융희 1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어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가족 관계
- 부 : 순조숙황제
- 모 : 순원숙황후 김씨
- 사친 부 : 전계대원군
- 사친 모 : 용성부대부인 염씨
- 왕비 :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王后 金氏,1837년-1878년)
- 원자(元子,1858년 음력 10월 17일 ~ 1859년 음력 4월 23일)
-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 왕자(王子,1854년 음력 7월 10일 ~ ? )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 왕자(王子,1859년 음력 10월 13일 ~ ? )
- 왕자(王子)
- 후궁 : 숙의 방씨(淑儀 方氏)
- 후궁 : 숙의 범씨(淑儀 范氏)
- 영혜옹주(永惠翁主,(1859년~1872년 음력 7월 4일) - 하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 朴泳孝, 1861년~1939년)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 후궁 :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왕자(王子, (1862년 음력 윤 8월 8일 ~ ? )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천민 처녀
강화도에서 행상과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강화도령 원범은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잊고 강화도에서 함께 자란 양순, 또는 분이 라는 이름의 천민 처녀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그리고 양순 또는 분이와 혼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원범은 왕으로 지목되어 가마를 타고 한성부로 올라갔고, 신분의 차이 때문에 양순(또는 분이)과 혼인할수 없었다.
그러나 철종은 조선국왕이 된 뒤에도 양순의 존재를 잊지 못하고 계속 찾았다고 한다. 궁녀 혹은 후궁들과 연회를 즐기다가도 뻐꾸기 소리를 듣게 되면 이 천민 처녀를 찾았다고 한다. 양순은 얼마 뒤 갑자기 죽게 되는데 원인은 전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조정에서 그녀를 살해했다는 전설도 있다. 일각에서는 철종의 병세와 여색 등의 원인을 이 천민 처녀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물장수 출신 사또
안동 김씨 세도가와의 인맥 또는 뇌물로 변방의 수령직을 얻게 된 어느 바보 북청 물장수가 있었다 한다. 이 북청 물장수는 고신(임명장)을 받으러 한성부로 상경했는데 임금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군수직에 임명되었음을 자랑하였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이 물장수가 왕에게 임금님 나으리 내가 바로 북청군수로 부임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놓았다고도 한다. 이 바보 북청물장수의 일화는 유주현의 작품 대원군에도 언급되었다.
기타
철종이 후궁에게서 난 유일한 딸 영혜옹주는 노론가 출신 개화파 정치인 박영효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영혜옹주는 결혼 직후 사망했고, 후사가 없는 박영효는 고종의 배려로 궁녀 몇명을 첩으로 맞이한다. 그 중 한명인 범씨에게서 서자 2명을 얻게 된다. 한편 영혜옹주를 낳은 생모 역시 범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