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
김상구<청운대교수·칼럼의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이탈리아 시에나 두오모 성당의 바닥에는
희귀한 그림이 대리석에 조각되어 있다.
행운·운명의 여신으로 상징되는 포르투나(Fortuna)다.
누드 차림의 이 여신은 왼손으로 돗대의 천을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돗대의 밧줄을 움켜쥐고 있다.
여신의 왼쪽 발은 배(舟)위에,
오른쪽 발은 육지에 올려놓아져 있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바다나 육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조각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Zeitgeist)을 회화적으로 잘 표상하고 있어 보인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어떤 힘에 의하여 조종되는 숙명적 존재라고 믿었다.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이미 사주팔자가 사람마다 주어져 있다는 믿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의 끝부분에서
"세상일이란 포르투나와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쓴다 해도 이 세상의 진로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포르투나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비르투(virtu)라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포르투나에 의존해서는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르투는 라틴어 vir(man)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의 역량, 결단력, 용기, 탁월함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단어이다.
즉,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 할 시기와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정치적 지혜의 핵심이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이 비르투라는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상황은 그러한 지혜와 비르투가 부재했기 때문에 끊임없는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
비르투를 행하는 힘은 과단성 있는 결단에서 나온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신은 여신이기 때문에
그 신을 정복하려면 난폭하게 다루어야 한다.
운명은 냉정한 생활태도를 지닌 자 보다도,
이런 과단성 있는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것 같다"라고 하면서
포르투나에 거칠고 대담하게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신을 헬레니즘의 여신정도로 격하시키고 있는 셈이다.
기원전 49년 로마의 혁명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고 주저 없이
운명과 맞서던 카이사르의 모습에서 마키아벨리는
진정한 비르투를 발견했는지 모른다.
생각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 안에 비르투(탁월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 비르투가 빠져 있다면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에 불과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좋은 목적은 나쁜 수단을 써서라도 이루어내야 한다고
'군주론'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후일 우리가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스트'로 오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좋은 목적을 위해 좋은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정치적, 사회적 행동이 발생하는 공(公)적 공간속에서는
나쁜 수단도 때에 따라서는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모든 문장에서 나쁜 수단을 사용하기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정치는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철저히 현실적 계산위에 모든 수단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이 마키아벨리스트라고 가정한다면,
웬만해서는 마키아벨리스트 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때로는 나쁜 목적을 위해서 나쁜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사에서 비르투 없이 만용을 부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6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주장한 내용보다는
그가 던진 역설적 질문일 것이다.
군주는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꼭 필요할 경우에만
나쁜 수단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현실적 처방을
메디치 가문(家門)에 주문하고 있지만, 21세기 우리는,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로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인가? 부자인가? 통일인가?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은?….
고전은 현실적 답을 주지 않고
근원에 대한 엄숙한 질문과 궁극의 자리를 관조(觀照)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