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 간증 : 최경식 집사
어머니는 성탄절 새벽송을 도신 후 집에 오셔서 새벽 다섯 시경에 나를 낳으셨다. 내 생일 12월 25일은 해마다 온 세계인의 축제로 함께 지내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시골에서 다녀서인지 고등학교만은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렇지만 5남매의 맏이라는 환경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고3이던 해 8월 초순경, 충북보은의 법주초
등학교에서 개최된 MRA 즉 도덕재무장대회에 우리학교의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보은에 있는 말티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앞의 버스가 벼랑으로 굴러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는 별안간 아이스크림을 사느라 버스를 놓쳤는데 그 차가 사고가 났던 것이었다. 사고를 면한 것이 하나님 공경에 열심이신 외할머님과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란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얼마 후 8월말 충북 단양의 외가댁에 가기 위해 음성에서 열차를 타고 제천으로 가던 중 열차 사고의 위험도 면할 수 있었다. 그 때도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해 9월 하순경,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기로 마지막정리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던 중 쓰러졌다. 극도로 피폐해진 몸에 합병증으로 비혈관이 파열되어 지혈이 안 돼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입원 2일째 담당의사와 아버님이 병원복도에서 말씀을 나누시는데 “오늘 저녁을 넘기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유언을 할 작정으로, 어머님께 보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달라고 했다. 도리어 어머님께서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며 나를 달래셨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누운채로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좋은 일만 하며 살겠
다는 약속의 기도를 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입원 등으로 2개월 정도를 학교에 빠졌기때문에 대학입학예비고사에 응시를 못해 대학시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주님께 은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2년간 농사를 지었다. 농한기나 겨울에는 공사판에 나가 막노동으로 돈을 벌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조간신문 배달도 했다. 당시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진학,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라디오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고 밤 12시 반에 잠들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그리고 군 입대 영장을받고 입대하여, 34개월의 군복무를 무사히 마친 후 경찰에 입문했다.
경찰관이 되어서 다섯 번의 승진시험을 치렀다.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한 과목당 책을 몇 권을 보면 될까요” 했더니 “최소한 일곱권 정도는 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셔서 한 과목당 문제집 참고서를 7,8권씩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시험에 어려움 없이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보통 경정계급에서 6∼7년이면 총경으로 심사승진 하는데 9년이 되도록 승진이 안 되어 계급정년의 위기에 섰다. 10년 안에 승진을 못하면 승진대상에서 탈락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집사람이 한 티끌이라도 인간적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매달릴 것을 촉구했다. 어머님은 물론 온 가족과 지역식구들과 같이 중보기도를 해주셨다. 드디어 경정 10년 만에 총경승진을 했다.
그 후 서울청 특수기동대장 시절 1년 동안 그 숱한 집회·시위현장에서, 시위대와의 물리력 충돌을 하면서도 먼저 기도한 결과 특별한 사고와 변수 없이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지휘관과 참모로서 조직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성령님이 늘 함께 하셨다. 충북보은경찰서장, 충북생활안전과장, 경찰청 보안2과장, 경찰청 보안3과장, 그리고 서울도봉경찰서장으로 근무하는 현재도 힘을 주시고 조직을 챙겨주시고 관내의 치안도 평온하게 관리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남편의 빈 부분을 메꾸어 주고 받쳐주는 평생의 동역자인 오 권사와 3남매 모두하나님의 은혜 속에 최선을 다해 살 것임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린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