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종(端宗)의 최후
영월 동강 낙화암(落花岩) / 단종릉 장릉(莊陵) / 장릉의 영천(靈泉)과 정자각(丁字閣)
14살에 왕위에 올랐던 조선의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내주고 허울뿐인 상왕(上王)이라는 이름으로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그마저도 2년 만에 강봉(降封)되어 노산군(魯山君)이라는 평민 신분으로 격하되고 멀리 강원도 산골짜기로 유배(流配)되어 온 곳이 바로 이곳 영월의 청령포(淸泠浦)다.
수양대군(世祖)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단종을 역적(逆賊)으로 몰아 사약(賜藥)을 내리니 당시 단종은 17세였는데 죽은 후 시신(屍身)에 손을 대면 삼족(三族)을 멸한다고 공포하여 아무도 감히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는데 시신은 동강(東江) 가에 버려졌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노산군(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고, 예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훗날 기록된 ‘숙종실록’에 보면 사약(賜藥)을 가지고 온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의관을 갖추고 왕명(王命)을 기다리는 단종에게 차마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사약을 올린 후 눈물만 흘리자 하급 관원이 활 끈으로 단종의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보냈고 시신은 강에 버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정(朝廷)에서는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도 있는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6명이다.
(2) 영월의 낙화암(落花巖)
단종이 승하(昇遐/사망)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侍女)와 시종(侍從)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동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꽃잎처럼 목숨을 바쳤는데 이들이 투신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그곳을 낙화암(落花岩)이라 불렀다.
관풍헌(觀風軒)은 영월의 관아로 동헌(東軒)이었던 곳인데 홍수가 나자 단종이 죽기 전 강변마을 청령포에 기거하던 단종은 이곳에 와서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관풍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강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현재 동강 옆에 조성된 금강 공원에는 낙화암이란 비문을 새긴 작은 비석과 단종의 뒤를 따라 목숨을 바친 시녀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민충사(愍忠祠)가 당시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3) 충신(忠臣) 엄흥도(嚴興道)
동강(東江) 하천 변에 방치돼 있던 단종의 시신(屍身)은 손을 대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공포(公布)로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해 영월 북쪽 5리(2km) 지경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암장(暗葬)한다.
관헌이 알게 되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종을 고이 모시고 일가족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다. 엄흥도는 집안의 안위(安危)보다도 단종의 애달픈 죽음이 가슴 아파 집안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신(忠臣)으로서의 도리를 지킨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호장(戶長)-나라에서 수령(首領)을 파견하지 않은 고장의 행정을 총괄하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