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0일(일)
점심을 먹고 나섰다. 버스 127번을 타고 대저역에 하차, 대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 미남역 하차, 버스 44번으로 환승.
44번 종점이 반여3동 시장 앞이며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인지사(광명정사)가 있다.
인지사에서 나와 다시 44번을 탔다. 동래시장에서 하차, 법륜사까지 걸었다. 10분 정도 걸렸다.
법륜사 앞에 오니 길이 낯설지 않다. 약 30년 전에 자주 다녔던 곳이다. 승용차로.
법륜사(法輪寺) / 전통사찰
-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학소대(鶴巢臺)에 자리하고 있으나 건물들로 멋진 경치를 볼 수가 없다.
칠산동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있었던 곳이다.
1898년 범어사의 포교당으로 창건.
야학운동을 통한 문맹퇴치와 3.1운동의 본거지로 민중교화와 민족정신을 배양하던 곳이다.
범어사가 1800년대 말, 부산지역 포교를 위해 개설한 포교당은 모두 5개, 서면과 영도지역 등 4개 포교당은 모두 없어졌다.
종교적인 역할뿐 아니라 교육, 계몽 역할까지 하였다.
1921년부터 경영한 ‘싯달 야학교’를 통한 승려들과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이 민족 운동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법회를 이은 부산지역 최초 불교 유치원인 ‘법륜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인터넷 검색)
법륜사 입구
법륜유치원
범종루 겸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상은 그림이다.
극락전
학소대란 편액이 걸린 건물, 3층석탑은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안에서 본 경치
삼존석불조성기념비, 1962년 세웠다고 한다.
법륜사에서 본 경치, 우측 작은 산은 아마 '배산'인 것 같다.
법륜사 경내는 조용하였다. 신도도 승려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경이다.
복천동 고분군과 박물관을 볼 수 있겠다. 부지런히 걸었다.
복천동 박물관 주위에 실형이 살았기에 이곳에 자주 왔다.
아내는 연애할 땐 반송동(해운대구)이 집이 있었지만 결혼 후 처가는 명장동(동래구)으로 이사하였다.
안락로타리를 통해 명장동 가는 것보다 복천동 이 길이 편했다. 약 30년 전의 일이다.
담장은 내성초등학교, 왼편이 복천동 고분군이다.
해운대 장산이 보인다. 반여동쪽이다.
복천동 고분군을 지나 복천박물관에 들어갔다. 박물관 구경을 하고 나와도 해가 아직 하늘에 있다.
동래읍성을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동래시장,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한산한 편이다. 모처럼 칼국수가 먹고 싶었다.
3,500원의 칼국수는 양이 적지도 않았고 맛도 괜찮았다. 아주 오랜만에 칼국수를 먹었다. 오후 6시 30분.
동래시장에서 버스를 타고 구포시장에서 다른 버스인 127번으로 환승하여 집으로 왔다.
*복천박물관과 동래읍성 등 사진은 이 카페 '여행기'에 올릴 예정.
2022년 2월 23일(수)
오늘도 점심을 먹고 나섰다.
부산김해경전철 수로왕릉역까지 걸었다.
수로왕릉역에서 본 경치,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김해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우측에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백양산이다.
반대편이다. 우측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보인다.
수로왕릉역에서 탑승, 대저역에서 지하철로 환승, 미남역에서 내렸다.
온천장 가는 버스로 환승하면 조금 덜 걸을 수 있지만 오늘도 1만 보 이상을 걸어야 하니 금정사까지 걷기로 하였다.
차도만 따라가면 될 것 같았다. 지하차도엔 인도가 없다. 돌아서 헤매다보니 유락여중 앞이다.
1977년 11월 내가 대입 예비고사 시험쳤던 곳이다.
동래원예고등학교, 중 3때 이 학교 지원하려 원서값 500원 받아들고 제일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어머니한테 무지하게 혼났다.
부산전자고등학교, 고 3때 문교부 검정 용접 기능사 시험(이론)을 치뤘던 곳이다.
금강공원 입구다. 이곳에 몇 십 년만에 와본 것일까? 40년 넘지 않았을까? 금정사는 금강공원 안에 있다.
금정산 금정사((金井山金井寺) / 전통사찰 (금정선원으로 전통사찰 등록)
-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1924년 승려 '금우'가 창건했다.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 것으로 봐 옛날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또 이곳은 동래부(府)의 사형 집행장으로 인적이 드문 곳이다.
'금우'가 이곳에 토굴을 짓고 그 원혼들을 달래주는 기도를 시작했다. 이후 신도들이 모여들어 창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당대 고승인 한암(1876~1951)·효봉(1888~1966)·경봉(1892~1982) 등이 금정사에 머물렀다.
전쟁으로 해인사 가야총림 문을 닫고 승려들은 남하, 그 해 겨울 가야총림 방장 효봉은 금정사, 제자 구산은 진주 응석사에.
1954년 승려 석주의 불력으로 제대로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이때 선학원에 명의 등록했다.
1969년 대웅전/ 1980년대 선방과 칠성각, 종각/1991년 보제루, 식당, 요사채 등을 완공해 현재 모습이 되었다.
(인터넷 검색)
보제루
일을 하는 여신도가 열 체크하고 들어 가라고 한다. 조용하다.
오층석탑과 종루
칠층석탑과 사적비
담장 넘어 삼문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순국한 병사와 주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 입구이다.
금정사를 창건한 '금우'는 사형 당한 원혼을 위로하였다. 지금은 임진란 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대웅전
문 밖에서 찍었다. 사진 촬영 금지. 안에서 뭐라할 사람도 없으니 찍어도 되겠지만,,,,,,
금정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15호 / 1677년(숙종 3) 제작
(불상 1점, 후령통(1점), 경전류(7종 8점), 다라니(다수))
원래 전북 완주 고산현 '대둔산 용문사'에 봉안했던 세 불상 중의 하나였다.
함께 조성한 다른 불상 하나는 현재 '전주 일출암'에 봉안하고 있다.
두 목불좌상은 수인이 서로 좌우대칭, 금정사 불상이 아미타불, 일출암 불상이 약사불로 추정한다.
석가불은 현재 어디 있는지 모르며, 아마 19세기 용문사가 폐사되면서 불상들이 흩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금정사 여래좌상은 통견 차림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였고, 상체는 약간 앞으로 숙여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자세.
(인터넷 검색...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정리)
금정선원
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 몇 년 되었을까?
보제루, 화엄찰해보광명전
칠성각
금정사와 이웃하고 있는 임진동래의총(부산시 지정 기념물)에 왔다.
내용을 읽으니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마음은 숙연해 진다.
동래부사들의 비석들
담장 넘어 금정사, 보제루 옆 모습이다.
사당 입구 삼문
충혼각, 사당 뒤에 묘가 있다.
금강공원 안에 절이 많다.
휴정암,약수정사, 청용사, 소림사, 금강사, 금어사 등등.
육교를 건넌다.
육교 위에서 본 경치이다. 금련산, 황령산이 보인다.
고층 건물이 하루가 다르게 세워지고 있다. 몇 년 뒤에는 다른 경치를 볼 수 있겠다. 장산이 보인다.
터벅터벅, 부산대학교 후문 정류장 다음 정류장이다.
110번 버스를 탔다. 만덕을 지날 때 '만덕사지 당간지주'가 보이면 내리려고 했다.
당간지주는 나오지만 정확한 주소가 안 나온다. 만덕사지는 마을이 들어서 터를 찾을 수 없다.
만덕사지 삼층석탑은 부산시립박물관 야외에 있다.
구포시장이다. 127번이 조금 전에 간 것 같다.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동구 3곳, 서구 1곳, 영도구 1곳, 기장군 7곳 중 5곳이 남았다.
2월 중 다 방문하려고 하였지만 내가 게으르다.
(2월 25일/금, 동구 3곳을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