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이야기 28. 명명백초두에 명명조사의로다
“분명하고 분명하게도 백가지 풀 끝마다 분명하고 분명한 조사의 뜻이 있구나”
“준순주를 만들 줄 알고 경각화를 잘 피우도다. 거문고로 벽옥의 곡조를 타고 화로에 백주사를
단련하도다. 몇 가지 기량을 어디서 배웠는가? 모름지기 풍류가 자기 집에 흘러남을 믿을지어다.”
앞 부분은 방거사 부인의 어록이지요. 방거사의 가족은 모두 도인이었다고 전합니다. 가족 모두가
생사의 일을 마친 선지식이었답니다. 그 중간에 방거사의 부인은 “백 줄기 풀 끝마다 분명한
조사의 뜻”이라 하였고, 방거사의 딸 영조는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니 주리면 밥 먹고
곤하면 잠을 잔다.”고 하여 일상의 평상심이 도임을 말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만일 말하기를 [내가 한량 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하면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진실로 보살이라고 이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온갖 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하느니라.”
야보선사: “소라고 부르면 소이고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로다”
“노파의 적삼을 빌려 입고 노파의 문 앞에서 절을 하니 예의가 법도에 맞음이 이미 충분하구나.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은 흔적조차 없도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하면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지니,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와 <법>이 없음을 통달하면 여래는 그를 진실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참으로 요즘 같은 세월에 금강경의 이런 말씀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모든
일을 다 행하면서도 남 앞에서 나를 낮추고 그들과 하나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금강경에서 추구하는
진실한 보살의 인격일 겁니다.
야보선사: “일물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
“하늘이 뛰어난 6척의 몸을 낳으시니 문장도 능하고 무예도 능하며 정서도 잘하도다. 하루 아침에
본래면목을 알아 깨뜨리니바야흐로 부질없는 이름들이 천하에 가득함을 믿겠도다.”
조사관과 조사선
여기서 조사관과 조사선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사관’이란 말이 문헌으로 처음 나타난 곳은, 1229년 1월 5일 황제의 천기성절을 맞아. 성수 무강을
빌기 위해 찬술 간행된 선서인 [문무관] 제 1칙이라 합니다. 이로써 ‘조사관’이란 말이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 두루 쓰여진 시기는 고려 중엽에서 말기가 마땅할 겁니다. 이 무렵에 살았던 야운 스님, 곧
권단이란 분이 자경문의 저자란 말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조사관은 조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으로 화두 역시 관문의 하나로, 만일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조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관문을 뚫어야 비로서 마음 길이 끊어진 미묘한 깨달음을 얻고 역대 조사들과 손을 맞잡으며 조도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조사선’은 남종선을 가리키는데 여래선이란 말과 상대되는 말입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초조달마스님
이래 육조혜능스님에 이르러서 이후 가히 ‘선종의 황금시대’라고 일컫는 오가칠종의 기라성 같은 선사가
쏟아져 나온 시대를 가리킵니다.선의 특성은 장경에 의지하는 교종과는 다른데, 불립문자로서 교외별전이란
말로 표현하는데, 언어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선지식인 사부가 제자에게 전하는 방법으로, 조조상전의
방법을 씁니다. 이와 같이 조사가 직접 제자의 견성성불을 알아차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전하여
인가한 가닭에 조사선이라 주장합니다.
한편 <선원제전집도서>에서 종밀스님은 선정 삼매로 얻은 바의 깊고 낮음에 따라 다섯 종류로 선을
나누었는데,
1. 외도선:유무에 집착한 외도는, 진성근본의 입장에서는 불구부정하여 범부와 성인의 차이가 없지만 선
수행의 입장에서는 유천유심의 단계가 있다고 계교하여 위 깊음을 좋아하고 아래 낮음을 싫어하여
수행합니다.
2. 범부선: 인과를 믿어서 마음에 좋아함과 싫어함을 남겨두고 수행합니다.
3. 소승선: 아공의 한쪽 진리를 깨달아 수행합니다.
4. 대승선: 아공법공의 2공을 깨닫고 진리를 드러내서 수행합니다.
5. 최상승선 또는 여래선: 경전의 뜻과 같이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의
지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헤아려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입장에서 수행합니다.
선종 스님들은 최상승선만이 달마스님이 전한 선이고 그 외는 달마 스님의 다섯 종류 선에서 여래선이란
말은 최상승선이란 말로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섯 종류의 선은 다섯 종류의 맛이 뒤섞인 잡된 선이라는
혹평을 하는데, 아직도 알음알이인 의리명상에 걸려 있는 오염된 여래선과 달마 스님이 정한 청정한
선과의 차이는 크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처음 여래선이란 말은 앙산 혜적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데요. 다음은 [경덕전등록]
권11 앙산혜적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화이야기 29. 금년 가난에는 꽂을 송곳조차 없구먼
앙산 스님이 향엄스님에게 묻기를 “사제의 견처가 요즘 어떠한가?”향엄스님이 대답합니다.
“제가 갑자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게송을 지었어요.
거년빈 미시빈
금년빈 시시빈
거년빈 무탁추지지
금년빈 추야무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네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지만
금년 가난에는 꽂을 송곳조차 없구먼”
이를 보고 앙산스님이 말하였어요, “자넨 여래선을 얻은게야, 아직 조사선은 멀었다네.”
이에 햐엄스님이 다시 게송을 읊었습니다.
아유일기 순목시이
약인불회 별환사미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짝여 그에게 보엿다가
만약에 알아채지 못한다면 따로 사미를 부르리라.
이에 앙산스님이 돌아와 위산스님에게 알렸지요. “기뻐하십시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쳤습니다.”
위의 게송 중에 거년빈 송은 여래선의 경지요, 아래 아유일기송은 조사선의 경지라고 평하지만.
그것도 분별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요즈음 ‘생명과 환경평화’를 부르짖는 현세대의 대표적인
두 스님을 예로 들어 본다면,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나선 도법스님은 여래선의 경지요, 천성산 도룡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100일 단식을 통해 생명평화를 온 몸으로 보여준 지율스님은
조사선의 경지라 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첫댓글 소라고 부르면 소이고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