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평 3개
1) 파수꾼 - 미성숙한 소통의 비극적 결말(작성자 무드셀라)
단편영화 <아이들>의 연출자 윤상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단편 때부터 소문났던 그의 연출력은 이 첫 장편 데뷔작으로도 큰 호평을 받는다. 많은 영화지망생들의 목표가 된 윤상현 감독. 나도 이번에 단편을 준비하면서 배우분들이 <파수꾼>과 이미지가 비슷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아 촬영 전에 이 영화를 보고 촬영을 준비하였다.
한 아이가 죽으면서 그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그의 죽음을 알기 위해 친구들을 찾는다. 하지만 친구들은 무언가를 숨기는 거같이,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엊그제 시절인데… 나랑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랄까? 감독이 학창시절을 기억했다면, 그와 나와의 자란 성장 배경이 달랐기에 그랬을 수도 있고, 이런 게 지방과 서울의 지역 차이일 수도 있겠다. 아무런 조건 없이 친구들을 사귀던 우리와 다르게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조건을 따지는 그런 무언가 순수하지 않은 우정이라니… 재미있게 본 영화였지만, 그들의 순수하지 않음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2) 네이버 답변(작성자 dbgudwns9) 고3이라는 데 아주 잘 쓴 평.
사실 <파수꾼>의 주인공 셋 다 자신의 다친 감정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미숙합니다. 들뜬 마음으로 즐겁게 놀기는 잘하지만 점점 꼬여가는 상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매듭을 풀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서로 자신이 다치길 피하고 당장의 감정에 휩싸여 상대에게 더 큰 상처만을 되돌려줍니다.
분명 기태-동윤-희준의 사이는 완전히 평등하지 않습니다. 알아온 시간이나 소통의 깊이도 다르고 성격 또한 달라 진정한 평등한 사이가 되기는 어려웠죠. 기태와 동윤 사이를 이해하는 데는 백희(본명 희준)를 제외하고 단편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동윤의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동윤이 기태에게 큰 상처를 되돌려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긴 하지만 그 전까지의 점점 쌓여오던 갈등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동윤은 기태의 주변인들 중 유일하게 권력과 폭력의 범위에서 자유로운 인물입니다. 과거 시절에 대해 들어보면 동윤 또한 중학교 시절엔 꽤나 날렸던 것으로 그려지죠. 다만 동윤은 언젠가부터 그런 권력과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것에 무관심해집니다. 하지만 기태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가정환경으로 인한 애정결핍과 원래 갖고 있던 주변인들의 관심에 대한 욕망이 합쳐진 캐릭터인데다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짱이 됨으로서 폭력과 공포를 통해 손쉽게 주변인들의 시선을 받는 얕은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동윤은 처음엔 이런 기태의 모습에 대해 가볍게 충고합니다. 곧 사라질 것에 목매지 말라구요. 하지만 속은 여리고 표현 방법은 폭력과 자존심밖에 없는 기태는 점점 날뛰기 시작합니다. 물론 찌질하고 소심한 백희의 미니멀한 표현이나 속 좁은 행동도 이 오해의 경연에 한층 기름을 끼얹습니다.
영화 속 대화에서 갈등의 대화들은 갈등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해와 모호함이 둘러싸인,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소모전이죠. 결국 갈등과 심해져 기태는 백희를 여러 번 린치하기에 이릅니다.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윤은 기태에게 굉장히 실망한 모습을 보이죠. 다만 그 당시에는 기태의 여린 속과 그의 결핍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의 기태의 이해할 수 없는 폭력성과 곤조에 대해 질리기 시작하죠.
(솔직히 영화 속에서 기태와 동윤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둘이 가장 친하고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사이라지만 둘은 둘의 깊은 감정과 결핍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단 언제나 얕은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나 하고, 마지막에서 살짝이나마 기태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 외에는 그리 견고한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거든요. 서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관계는 언제든지 깨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태는 동윤이 푹 빠져 있는 여자친구의 소문에 대해 언급합니다. 영화 속에서 이 소문이 사실인지는 확실히 드러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은 모호한 정보와 오해만이 드러나는 갈등이니까요. 기태가 동윤에 대해 기분이 언짢아서 일부러 그런 악담을 했는지, 진짜로 걱정이 되어 소문에 대해 말한 것인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앞부분에서 여자친구에 대한 애정을 재차 물어보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는 복선을 깔아준다고 할 수 있죠.
점점 기태의 곤조에 질리기 시작한 동윤에게 던져진 소문이라는 폭탄은 극단적인 파국으로 이야기를 몰고 갑니다.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동윤을 눈치 챈 여자친구는 또 자기 나름대로 수상한(애정 결핍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자살 시도를 하죠. 얼마나 둘이 정든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윤, 야마가 돌아버립니다.
동윤은 당장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태와의 관계를 끊기로 결심합니다. 결심이라기보단 그저 감정에 휩싸인 증오에 가깝습니다. 기태를 찾아가 린치당하고, 기태에게 매콤한 주먹과 독설을 선사하고는 돌아갑니다. 안 그래도 주변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이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고 그럴 능력도 없는(사실 이 영화 속에서 갈등을 풀 능력을 가진 이는 없어 보입니다. 다들 깊게 성찰하기는커녕 감정에 휩싸여 찌질한 감정싸움만을 이어가고, 사건을 끌어갈 맥거핀으로 쓰인 아버지마저 무력하기 짝이 없죠) 기태는 점점 풀이 죽어갑니다. 안 그래도 애정에 대해 민감한데, 다들 자신을 떠난다고 선언하니까요. (찌질한 백희 때문에 미인도 돌려보냈는데…)
그리고 찾아간 동윤에게서 기태는 결국 박완규(?)보다도 더한 독설을 듣습니다. 애정과 타인의 관심에 대한 욕망이 강한 기태에게, 너의 똘마니들은 너의 힘만을 따른 것이고 주변에는 더 이상 너의 진정한 친구는 없다라는 선언은 더 이상 충격적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애들 앞에서 여러 번 얻어맞고도 강한 생명력으로 버티는 백희와 달리 기태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여리면서도 관심병 강한 마초니까요.
기태의 그 동안의 태도가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도 분명 있지만, 동윤과 백희의 관계의 회복과 그 핵심을 꿰뚫는 처방을 위한 고민보다는 상처를 위한 독설에 노출된 외강내유의 남자 기태는 결국 자살해버립니다.
처음에는 냉정했던 동윤도 그제서야 기태의 진짜 속마음에 대해서 떠올리고 고민하게 됩니다. (다만 백희는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아예 후반 가면 이야기에서 이탈해 버리는데 감독의 실수인지 의도적 연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개인적으로 저는 실망스러웠지만) 장면인 엔딩입니다. 기태의 타인의 사랑과 관심에 대한 욕망 (혹은 관심병)을 그제서야 떠올린 동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중심이 보이는 관객들과는 달리 그제서야 상황의 핵심에 가까이 간 동윤입니다. (그 동안 기태 아버지와 백희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제서야 너가 최고라며 기태를 이해한 것인지 씨익 웃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연출을 꿈으로 하고 있는 고3으로서 굉장히 설레며 본 작품입니다. 그 동안 고교 생활을 정녕 한 것인지 궁금한 노땅들에 의해 왜곡되고 부풀려진 남고생들의 찌질하고도 연약한 심리를 리얼하게 꿰뚫은 작품이고 영화 속 갈등들에 대한 정보나 그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오해와 혼란으로 서로를 다치게 하는 연속 작용을 지독하게 그려냅니다.
다만 너무 갈등에 대한 사실 여부를 모호하게 다룸으로써 몰입도가 점점 떨어지고, 후반부 가서는 백희와 기태 아빠가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용두사미로 끝나는 감이 있거든요. 게다가 아무리 기태를 이해하는 동윤이라지만 과연 자신의 독설로 인해 자살한 친구를 이해한다며 씨익 웃는 결말이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삭제 장면에는 사건의 전말을 토로한 동윤을 때리는 기태 아버지의 장면이 있었다지만 너무 극적이라서 편집했다더군요.)
3) 정형철의 <시네 리뷰>에서(세계일보)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섬뜩하고 이질적이다. 이 영화에서 십대는 여느 성장영화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달리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고 통과했을 법한 ‘인생의 한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그려진다. 영화는 외부세계로부터 그들의 삶을 면도날로 예리하게 도려낸 뒤,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망 속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 학교,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결국 지배한다.
세 친구가 있었다. 사이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미세한 뒤틀림과 어긋남으로 그들 사이는 금이 간다. 한번 금이 가자 걷잡을 수 없이 쪼개진다. 그들 중 한 아이가 죽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추적하기 위해 두 친구를 만난다. 영화의 기본 줄기는 이렇듯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파수꾼>은 이야기의 줄기를 토막토막 잘라서 정교하게 재배치한다. 다중플롯과 복합 내러티브를 통해 예측불허의 시퀀스로 재조직한다. 단순히 시간과 사건을 재배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전혀 다른 정서와 의미의 세계를 창출해낸다.
이러한 영화의 흐름을 지배하는 구조는 기태(이제훈)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다.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묻기 위한 영화가 아닌데도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수없이 유발한다.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헛다리를 짚게 마련이지만 어쩔 도리 없이 이끌려 간다. 그러다 이러한 미스터리 극적 구조가 감독의 의도적인 오인 전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릴 때쯤이면 영화는 다른 질문을 던지며 잘못 들어선 길을 수정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에야 관객들은 본격적으로 세 친구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며 영화는 관객들에게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재구성하도록 이끈다.
결국 세 친구 사이의 관계망에 얽힌 섬세한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영화적 맥락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태, 희준(박정민), 동윤(서준영)의 관계는 겉보기에는 아주 단단한 결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깨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소한 오해와 순간의 엇갈림으로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지만 서로의 가장 절실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태는 희준이 당한 모멸감을 가볍게 여겼고, 희준은 기태의 가장 아픈 곳이 무엇인지 모른다. 동윤은 자신이 받은 상처의 크기로 기태와의 시간을 전면 부정해버린다.
"잘못된 건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사실 기태로 인해 그들의 결속이 와해되기 시작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들의 결속을 지키려 했던 것도 기태가 유일했다. 이는 그가 이들과의 결속 외의 그 어떤 영역도 구축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를 폭력에 의존하여 지속시킬 수밖에 없었던 기태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치명적인 오류는 폭력성 그 자체보다는 세상 모두가 등을 돌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아줄 친구가 있다고 믿은 순진함에 있다. 그것은 그만의 바람일 뿐이었다. 희준과 동윤에게 거부당한 그의 영혼은 삶의 의미를 한순간에 잃고 만다.
보는 이의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이 영화의 비극성은 이들의 미숙한 소통방식에서 비롯된다. 이들 사이에 빚어진 오해는, 어찌 보면 내 친구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손쉬운 동일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살이의 영악함을 아직 체득하지 못한, 혹은 자기포장과 합리화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은 조그만 일에도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걸어버린다.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법이다. 알몸으로 만난 이들이기에 누구보다도 뜨겁게 서로를 갈구했지만, 그만큼 쉽게 피 흘리고 치명적으로 상처받는다.
<파수꾼>은 이 뜨거운 시기 소년들의 특별한 삶을 윤리적 단정 없이 조명한다. 이들의 아픔과 미숙함과 깊은 절망 뒤에서 그들과 함께 흔들린다. 그들의 세계와 영토 안에서 그들 가까이에 카메라를 대고 그들의 비명소리에 함께 공명한다. '파수꾼'에는 그들을 지켜 줄 파수꾼이 없다. 가족도, 학교도, 사회도, 친구도 결국은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그들을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은 이 영화 <파수꾼>인 셈이다. 영화 <파수꾼>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