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간을 벌써 대여섯번째 뛰어넘어 이 집 저 집 다녀온 열 살짜리 내 손에는 뜨끈하고 푸짐한 시루떡 접시가 또 들려있었다.
옆집 정주네 민자언니네 영란이네 석분이네 찬자언니네 찬웅이 오빠네 영선이네 그리고 이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웃들에게 나와 언니는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떡을 돌렸다. 이웃에게 떡을 나눠주는 일은 더없이 재미있고 신이 났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슴은 쿵쿵 소리를 냈다. 어린 나였지만 떡을 받아 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과 행복은 물론 감사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가을 농사가 끝나고 볏가마니가 처마 밑마다 높다랗게 쌓여갈 무렵이면 어김없이 할머니와 어머니는 시루떡을 찌셨다. 일 년 동안의 풍작을 감사하는 오래된 관습이라고 들었다. 곱게 빻은 쌀가루와 물렁하게 삶은 팥을 한 켜씩 교대로 떡시루에 팔부쯤 채우고는 커다란 솥 위에 올려 떡을 쪄 내셨다. 팥 대신 말린 호박이나 무채를 중간중간 넣기도 했는데 호박떡은 빛깔이 곱고 달달하였다. 무떡은 부드럽고 특유의 무 향내를 지녔다. 큰언니는 그때를 못 잊어 지금도 김장을 하는 날이면 무떡을 해서 형제자매와 자식들과 나눠먹는다.
당연히 나눠주는 일에 대해서라면 할머니와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농사일이 그러하듯 두 분 역시 뼈 빠지게 일하시는 것을 나는 보고 자랐다. 물론 아버지도 함께였다. 그렇게 힘들게 기른 채소나 곡식은, 특히 알토란처럼 여물고 좋은 것들은 손이고 몸이고 거칠어진 그분들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살고 계시던 아버지의 형제 여섯 분 몫이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분가한 자식들을 위해 보따리를 더 싸셨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싸는 일로 평생을 보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사실은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사신다.
보따리만 나누셨을까. 한여름에 휴가랍시고 형제분들이 서울에서 오면 어머니는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어머니의 수건이 젖어들고 가슴께와 등에는 젖은 옷이 달라붙어 있었다. 반면에 분을 발라 희고 고우신 작은어머니들은 마루에 앉아 깔깔거리며 고스톱을 치셨다. 초라해보이던 어머니 때문에 어린 나는 속상해서 화를 내고는 했지만 밥상 앞에 앉은 작은 어머니들은 형님이 만든 음식은 뭐든지 구수하고 맛있다고 밥그릇과 반찬그릇을 싹싹 비우셨다. 기쁨으로 빛났던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내 화는 저절로 가라앉았다. 힘든 만큼 애쓴만큼 기쁨을 받아든 어미니를 보았다.
종자골에서 텃밭을 가꾸다보니 상추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나누게 된다. 특히 3년 전에 풍년이었던 자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그 해에는 자두가 유별나게 풍년이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두를 나눠주고도 자두나무에는 자두가 여전히 넘쳐났다. 자두는 익는 시기가 짧고 저장 기간도 짧다.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나눠 먹어야 할 때임이 분명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자두를 땄다. 자두가 푹 익었으므로 이제 멀리있는 사람들에게 보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집에 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강남쪽 친구들 몇몇에게 나눠줄 요량이었다.
자두 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고개를 잔뜩 들어올려야 하고 나뭇가지를 잡아다녀야 하고 아니면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까지 올라가야 하는 일이다 땅에 떨어진 것은 풀속을 뒤져야 하는 일이다. 한 개씩 한 개씩 따내야 하는 일이다. 자두를 따는 시기에 장마가 겹쳐져 대부분 비가 내리거나 비가 온 뒤라서 축축하고 무더웠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몸은 흠뻑 젖는다.
나는 서너개를 따보다가 고개와 팔이 아파서 못하겠다고 손을 놓았고 자연스럽게 자두를 따는 일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염려마 자두 따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나는 가끔씩 '여보 조심해 조심해' 말만 건네는 이기적이고 얄미운 여편네다. 그가 높은 곳에 올라가 자두를 딸 때 가끔 자두가 가득한 바가지를 건네받아주기는 했다.
상품으로 내다 팔 물건인 양 그는 우체국에 가서 박스를 사왔고 나는 상처가 없고 단단한 자두를 골라 박스에 얌전하게 담았다. 먹을 것을 남에게 줄 때는 제일 좋은 놈으로 주라고 어머니는 누차 말씀하셨다. 전문적으로 자두를 기른 것이 아닌데다가 토종인지라 크기가 작으나 다행하게도 새콤달콤한 맛은 으뜸이다.
서울시내 특히 강남 교통이 어디 만만한가. 하필 장마비가 쏟아졌고 잠실을 비롯한 강남 일대는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했으며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교통지옥이었다. 열한 시에 출발해서 둔촌동을 거쳐 오금동을 거쳐 학동에 자두 한 박스씩을 내려놓고 일원동 집으로 돌아오니 다섯시가 훌쩍 넘었다.
부산이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차도 막히고 비도 내리고 점심을 먹을 수 없었던 우리는 쪼글쪼글해져서 땅바닥에 떨어진 자두처럼 시들어 있었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김치국을 끓여서 찬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으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고생스러웠지만 자두 배달을 무사히 했으니 얼마나 좋아.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다들 맛있다잖아. 그렇게 힘들었어도 끝까지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않는 착한 그에게 나 역시도 긍정의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맞아맞아 자기 참 대단해. 그 많은 자두 혼자 다 따서 나눠주고. 자두를 먹은 사람을 계산해보니 백여명은 되겠는걸.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
거기까지면 얼마나 현명하고 좋은 아내인가. 나는 그 정도의 품위있는 인격체는 못된다. 네 시간 넘는 시간을 버텨야 했던 차 안에서 욕설처럼 인정사정없이 내뱉고 싶었던 그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각오하고 각오했던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배달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 나는 다시는 배달 안 가요 안가 자두나무야 내년부터는 딱 한 바가지만 열려라. 오늘의 수고가 와르르 허물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그 말 때문인가. 자두가 제대로 열리지 않더니 4년 만에 자두가 대풍년이었다.
이번에도 그 많은 자두를 혹 버리게 될까봐 그는 노심초사 종자골을 드나들며 자두가 적당히 익을 시기를 엿보았다. 이래저래 병치레로 종자골에도 자주 못가는 처지였던 나였다. 그는 혼자서 자두를 땄다. 사다리를 백번은 오르락내리락 했단다. 박스포장을 해서 양평우체국으로 갔단다. 무려 아홉 박스씩이나! 자두장사를 하느냐고 직원이 묻더란다. 우체국에 주차장이 좁아 한참 옆쪽 경찰서에 차를 세우고 아홉 박스를 우체국까지 직접 들어 날라야 했다는데. 전화로 그 말을 듣는데 내 가슴에서 언제인가처럼 감동의 찡 소리가 울렸다.
무더위에 사다리를 놓고 한 개 한 개 손으로 자두를 직접 따느라 비지땀을 바가지로 흘렸을 터인데 거기다가 그 무거운 박스를 옮기느라 또 얼마나 비지땀을 흘렸겠는가. 그럼에도 전화기 목소리는 얼마나 기쁘고 활기차고 명랑했던가. 어쩌다가 상장을 받고 신이 난 개구쟁이 아들의 목소리였다.
그 뒤로도 이집 저 집 이 친구 저 친구 무려 스무 집이 넘게 나눠주었다. 물론 자두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자두보다도 달콤한 행복과 기쁨의 문자와 전화를 받았다. 특히 한 친구의 동영상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자두 한 접시가 올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자두를 먹으며 한마디씩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자두보다도 어여쁜 어린 손자가 자두가 맛있어요 잘 먹을께요 감사해요 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일러주는 말을 어눌하지만 귀엽게 말하는 모습, 며느리가 다정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모습은, 남편의 수고로움을 단번에 기쁨으로 되돌려주는 묘약이었다.
그 많던 자두를 전부 따내고 나니, 자두나무가 땅에 닿을 듯 늘어졌던 가지를 이제 날아갈 듯 높게 들어 올리고 있다. 얼마나 가벼워 보여! 그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자두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눠주고 나눠준 당신도 가벼워보이는데! 내가 기분좋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눔의 기쁨으로 가벼워진 자두나무와 그를 바라보는 동안 잘 살고있구나 잘 살고있구나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