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무차대회] 고난에도 꺼지지 않았던 불조 혜명
⑥ 선원 역사와 현황
중국에서 시작된 선불교는 신라 때 우리나라에 유입돼 현재 한국불교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산선문으로 시작된 선원의 역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과 정화불사를 거치는 동안 부침을 겪었지만 고난 속에서도 선맥을 꺼지지 않았다. 본지는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를 앞두고 근현대 한국불교 선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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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립 특별선원인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어온 대표도량으로 여전히 안거 때마다 100 여명의 납자들이 정진하고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근현대 한국불교 대표 선원들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며 침체됐던 선불교의 활발발 가풍을 되살린 장본인이 경허스님이다. 스님은 1899년 해인사 선방에서 십수명의 스님과 정혜결사를 함께 했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선원이 새롭게 문을 열었는데 정광호가 정리한 <한국불교최근백년사편년>에 따르면 1900년부터 10년 사이 범어사가 선풍진작에 앞장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범어사 안양암 선원을 시작으로 계명암, 원효암에 선원이 개설됐고, 안심료, 원응방, 승당에 선회가 만들어졌고 1910년 성월스님이 금어선원을 개설했다.
<선원총람> 기록을 보면 금어선원은 동산스님을 조실로 정진했는데, 1932년 동안거 대중수는 78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스님들이 안거에 들었을 정도다. 성철스님 역시 그해 여름을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1909년 하안거부터 1957년 동안거까지 금어선원에서 총 2307명이 정진했고, 1952년 하안거 때는 “100명이 운집해 식량이 모자라 동래군청에 배급받아 온 국수와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연명”했다고 한다. 직지사와 순천 선암사는 염불회를 수선회로, 염불당을 선실로 변경해 정진하기도 했다.
근대 선원의 현황은 <근대선원방함록>에서 일부 확인된다. 책에는 해인사 퇴설선원, 수덕사 능인선원과 수덕사 산내암자로 비구니 수행도량인 견성암선원 범어사 금어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도리사 태조선원의 안거대중 현황이 정리돼 있다. 선원별로 차이가 있지만 1900년대 초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기록이다.
특히 주목되는 곳은 해인사 퇴설선원으로, 1899년 동안거부터 1967년 하안거까지 이곳에서 정진한 스님의 현황이 잘 보존돼 있다. 1899년은 경허스님이 해인사 퇴설당에서 정혜결사를 하던 해라 더 의미 깊다. 조당(祖堂) 경허스님을 비롯해 찰중 해봉스님, 지전 천원스님 등 19명이 정진했다.
구산선문 개창…선불교 대중화
조선 500년 거치며 위축됐지만
근대 경허스님 통해 선풍진작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역경도
납자들 수행 의지는 못 꺾어
이후 58년간 이곳에서 수행한 스님은 2292명으로, 용성스님, 백초월스님, 효봉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1967년 해인사가 총림으로 지정된 후 퇴설당을 이끈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스님, 고암스님, 자운스님, 혜암스님이 정진했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사 능인선원은 1910년 동안거부터 1967년 하안거까지의 방함록이, 견성암선원은 1927년 동안거부터 1949년 동안거 방함록이 전해지는데 조실 만공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비구니 선원을 대표하는 견성암은 법희스님이 1913년 이곳서 정진하고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1913년 이전에 창건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원총람>에 따르면 “당시 견성암은 두어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통합종단 출범과 종단개혁을 거치며 선수행 풍토는 점차 활발발해졌다. 적을 때는 10여 개에 불과했던 선원도 요즘에는 100개에 달하며 외호대중을 포함한 2200 여명이 안거 때마다 정진한다. 1990년부터 2000년대 선원의 숫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간화선 화두참구를 통해 깨닫겠다는 수행자 증가와 납자들을 공양하는 불자들의 신앙심이 확대됐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여타 선원 가운데 조계종립 특별선원인 봉암사 태고선원과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인 석남사 정수선원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때 희양산문이 개창됐던 봉암사는 근대 불교에서 큰 획을 그은 결사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47년 성철스님을 비롯해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이곳서 모여 공주규약을 제정하고 치열하게 정진했다.
6.25전쟁으로 중단됐다가 이곳에 수좌 스님들이 다시 모인 것은 1967년부터다. 1947년 봉암사결사를 새롭게 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1960년대 제8교구본사 직지사 교무국장을 지냈던 박춘근(당시 도현스님)씨는 “범어사 회주를 지냈던 지우스님이 당시 봉암사 주지로 임명됐고 종정을 지낸 서암스님이 나한 같이 계셔서 봉암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향곡스님과 서옹스님이 조실을 지내며 납자들을 제접했다.
1980년경 서암스님이 태고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이어 종단은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고,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희양산 봉암사 경내지에 일반인, 등산객,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어 1984년에는 종립선원으로 지정됐다. 여전히 봉암사 태고선원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수행도량으로, 안거 때마다 100명에 달하는 대중 스님들이 정진한다.
석남사 선원은 1957년 주지였던 인홍스님이 개원했다. 1963년부터 1998년까지 3년 결사를 꾸준히 진행해왔는데 해마다 찾아오는 납자들이 늘어나 심검당선원과 금당선원을 차례로 개원해 선풍진작에 기여했다. 이곳이 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된 것은 1999년 8월이다. 많게는 90 여명의 대중 스님이 정진했던 이곳에는 여전히 1년 결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안거 대마다 40명 안팎의 스님이 화두를 든다.
■ ‘방함록’ 통해 본 정진대중 현황
방함록은 안거 때 방부를 들인 수좌 스님들과 외호대중의 소임과 법호, 법명, 출가한 사찰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근대선원방함록>에 따르면 방함록은 1899년 들어 보편화됐다고 한다.
이후 “사찰이나 선원에서 개별적으로 방함록을 제작했고 그 내용을 선학원이나 선림회 등에 통보해 전국 단위의 방함록이 작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의 <선사방함록>은 1994년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가 창립한 이후부터 나온 것이다.
근대 불교자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정광호가 펴낸 <한국불교최근백년사편년>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전국선원안거방함록’일람표가 있어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 스님들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1935년 하안거 때는 석왕사 내원선원, 통도사 백련선원, 승가사선원, 망월사선원, 고운사선원, 도리사 태조선원, 월정사 상원선원 등 22개 선원에서 368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1936년과 1938년 사이에는 선원의 숫자나 수좌들 수도 줄어 매년 안거 때마다 10여개 선원에서 150명 안팎의 수좌들이 정진하다가 1940년대에 들어 크게 증가한다. 1940년에는 40 여개 선원에서 하안거 동안거 동안 각각 494명과 495명이 방부를 들였다.
해방 후 곧바로 6.25 전쟁이 발발하고, 종단은 다시 정화불사를 겪으면서 선원과 수좌 스님들의 숫자도 적었다. 그러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총림복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워지면서 수행가풍은 더욱 진작됐다. 1967년 해인총림이 지정되고 동안거 결제에 대중이 운집했다. 성철스님의 그 유명한 <백일법문>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또 1960년대에는 새로 문을 연 곳도 많았다. <조계종사 근현대편>에 따르면 “1969년 결제에 들어간 선원은 총 39개였고 결제 대중은 600 여명으로 추정”된다. 또 “1970년대에 들어 매 결제마다 개원한 선원수는 42~43개 정도였으며 많을 때는 45개까지 개원”했고 “정진 대중수는 700 여명 내외”로 추산된다.
1980년 10.27법난 후 선원수가 줄어 34개 선원에서 670명가량이 정진하던 것이 차츰 늘어나다 1989년을 기점으로 선원과 대중수가 크게 증가했다. 조계종 교육원이 발간한 <선원총람>을 보면 1989년에는 52개 선원에서 비구 525명 비구니 517명 등 총 1042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런 흐름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개혁종단이 출범하고 종단이 안정되면서 선원과 정진대중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995년에는 65개 선원에서 1210명의 스님들이 방부를 들였는데 비구니 스님이 633명으로 비구 스님을 앞지르는 기염을 토했다. 1999년에는 77개 선원에서 1640명이 정진을 이어갔다.
2000년대 들어 승가나 사회적으로 수행열풍이 확산되면서 수행자의 수도 확대됐다. 2001년에는 선원이 90개로 늘었고, 정진대중은 1826명에 달했다. 2005년도에는 선원은 91개로 증가폭은 없지만, 선원에 방부를 들인 스님은 2115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 2014년 동안거 기간에는 98개 선원에서 2196명이 정진한 것으로 집계됐다. 어현경 기자
[불교신문3102호/2015년5월2일자]
[간화선 무차대회] “우리시대 영산회상, 세계평화 초석 놓길”
출재가 함께 ‘산철’ 정진하며 무차대회 기다리는 일심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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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무차대회에 대한 관심은 선방에서도 높았다. 서울 약사암 일심선원에서 정진 중인 성곡스님은 이 대회가 바로 ‘우리시대의 영산회상’이라며 적극적인 동참의지를 보였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오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광복 70주년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 및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의 열기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해제 중인 전국의 선원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곳이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약사암 일심선원이다.
일심선원(선감 성산스님)은 해제기간이지만 서울 도심 심장부에서 거행되는 국제적인 한국의 전통 간화선을 전 세계에 알리는 행사에 동참하기 위해 수좌들과 재가불자들이 수행정진하며 행사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21일 찾은 일심선원에는 만행을 떠나지 않고 선원에 남은 스님 5명이 간화선 무차대회에 동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심선원은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약사암이 건립한 비구선원이다. 2011년 약사암 주지인 성곡스님이 돌아가신 모친 방정순(만행)보살의 원력을 이어 노후복지기금을 출연해 선원을 건립했다. 서울 도심에 이런 선원이 있는 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년 10∼12명의 운수납자들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약사암 주지 성곡스님은 “5년여 동안 선원 수좌스님들의 수행환경을 만들어 왔지만 올해처럼 뭔가를 해 보려는 적극적인 자세는 보지 못했다”며 “특히 5월16일에 개최되는 간화선 무차대회를 앞두고 정진열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날 선방에는 약사암 주지 성곡스님을 비롯하여 성민스님 일우스님 성은스님 설주스님이 정진을 하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죽비소리만 조용한 정적을 가를 뿐 일심선원은 ‘도심 속의 적막강산’이었다. 포행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준 성은스님은 간화선 무차대회에 큰 관심을 표방하며 “선종(禪宗)의 깃발을 세운 조계종에서 선(禪)은 핵심”이라며 “어느 불교행사든 선을 바탕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만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심선원을 후원하고 있는 재가불자들도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는 옆 공간에서 틈틈이 가부좌를 하며 한국 간화선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널리 전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번 간화선 무차대회가 두 번 다시 없는 선근공덕을 쌓을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각자의 마음을 점검하고 있다. 일심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 정인영(55, 법명 대승관)씨는 “이번 간화선 무차대회를 통해 한국의 전통 간화선이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약사암 주지 성곡스님은 “이번 간화선 무차대회는 우리시대의 영산회상으로 생각해 특별히 대형버스를 예약해 놓았다”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만날 수 있는 이번 행사에 전국의 많은 불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널리 동참해 삶의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불교신문3103호/2015년5월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