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4. 민족불교로 승화된 신라불교
왕실.귀족.민중을 아우른 '불교 르네상스'
사진설명 :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6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스님은 당나라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곳에 봉안했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이차돈 순교-진흥왕 홍법’ 힘입어 든든한 기반
왕실서 통치이념화…방방곡곡 ‘대중불교’확산
고구려와 백제 및 가야와 달리 신라는 상당한 희생을 통해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다. ‘범상하지 않은(非常)한 사람이 있은 뒤에야 범상하지 않은 일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외친 이차돈(異次頓, 厭)의 멸신(滅身)은 주체적인 불교 이해와 민족불교로 승화된 신라불교의 모든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一然)선사의 표현처럼 이차돈의 ‘멸신’(滅身)과 법흥왕의 ‘신략’(神略)은 양 극단을 넘어서서 중도(中道) 지혜의 활로를 열어가는 불교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불교 공인이 있기 이전 신라불교의 전래 기록은 크게 네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는 제13대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에 실려 있는 <박인량수이전>과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김용행의‘아도본비’(阿道和尙碑)에 의거한 것이다.
둘째는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구미시 선산읍)에 이르러 그곳 사람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 기록을 재인용한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및 <삼국유사>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는 제21대 비처왕(479~499) 때 아도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또 모례의 집으로 왔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근거한 것이다. 넷째는 제23대 법흥왕 14년(양나라 대통 원년) 3월11일 아도가 일선군 모례집에 왔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고기’에 의거한 것이다.
이상 몇 가지 기록의 갈래들은 몇몇 정보들이 착종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례’가 인명인지 ‘처소’인지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하지만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에 이미 사적으로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 아도의 어머니 고도령(高道令)이 말한 3000개월이라는 숫자(250년)와 불교 공인의 거리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전법승(阿頭)들이 낙동강 중상류인 일선군 모례의 집을 향해 모여들었다는 사실에는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얼굴이 시커먼 외래 사내’ 정도로 풀이되는 ‘묵호자’(혹은 黑胡子)나 ‘머리카락이 없는 구릉같은 머리를 가진 이’ 정도로 풀이되는 ‘아도’(阿頭/我道) 등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들의 외모나 특징을 가리키는 언표(指目之辭)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몇 갈래의 기록을 통해 신라 전역에는 불교가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라불교는 토속신앙을 기반으로 한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 공인이 매우 늦어졌다. 이미 미추왕대 이래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으나 전법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결국 근신(近臣, 법흥왕의 조카)인 이차돈의 순교(殉敎)를 통해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이후 법흥왕과 조카인 진흥왕의 적극적인 홍법에 힘입어 신라불교는 민족불교로 나아가는 튼실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들 종질간의 왕들은 말년에 각기 출가하여 법공(法興, 元宗)과 묘법(保刀夫人) 및 법운(法雲, 三麥宗)과 묘주(思道夫人)의 법명으로 살면서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라불교는 출발부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三國 중 가장 늦게 받아들이고도 탁월한 自己化
원효-의상 등 걸출한 불교사상가 100여명 배출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고, 인재를 알아보기 위하여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하지만 어여쁜 두 여자로 뽑힌 준정(俊貞)이 남모(南毛)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이자 준정 역시 나라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고 흩어지자 원화는 이내 폐지되었다.
진흥왕은 나라를 흥성시키기 위해 다시 청소년 수양단체인 풍월도(風月道)를 실시하였다. 14~15세에서 17~18세 미모의 남자를 골라 단장하고 꾸며서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화랑의 우두머리를 국선(國仙)이라 하였고 이들 화랑을 따르는 낭도 속에는 중년의 승려낭도 1인이 있었다. 이들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며, 산과 강을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다녔다. 지금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 30여명의 화랑에게는 1인당 250~300여명의 낭도(郎徒)가 있었다. 이 낭도들이 비상시에는 7500~1만2500의 일개 사단 병력으로 전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겨났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국선은 미륵불(彌勒佛)을 상징하였고 진흥왕 및 진지왕대의 진자(眞慈), 진평왕 때의 혜숙(惠宿), 진덕왕 때의 전밀(轉密), 효소왕 때의 안상(安常), 경덕왕 때의 월명(月明), 헌안왕 때의 법교(範敎) 등은 모두 승려낭도들이었다.
왕자들의 이름을 동륜(銅輪)과 금륜(金輪) 등의 이름으로 붙였고, 화랑의 단체가 용화향도(龍華香徒) 혹은 미륵신도(彌勒信徒)로 불렸던 점을 통해 우리는 진흥왕의 미륵신앙과 전륜성왕(轉輪聖王)사상이 주체적인 불교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법흥-진흥 연간으로부터 경덕-혜공 연간에 이르는 불교 르네상스기에 힘입어 신라는 불교국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약 250여년에 이르는 문예부흥기에 불교는 원광과 안함과 자장을 중심으로 한 왕실(귀족)불교와 혜공과 혜숙 및 대안 등을 중심으로 한 서민(대중)불교로 확산됨으로써 민족불교로의 승화와 완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문아(원측)와 원효와 의상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광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이를 없애는 것은 사문의 할 바가 아니오나, 제가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는 바에야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며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올렸고, 살생유택의 조목을 ‘시일(擇時)’과 ‘대상(擇物)’을 가리는 지혜의 활로를 열어감으로써 불교의 생명존중 사상을 현실에 접목해 내었다. 안함은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의 번역과 참서인 <동도성립기>를 지었으며 불연국토(佛緣國土)사상의 제창 등을 통해 뒷날 ‘흥륜사 금당 십성’으로 모셔졌다.
자장은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백년을 계를 깨뜨리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백을 표하며 출가하였고, 당나라 유학을 통해 대장경 한 부질을 가져왔으며 오대산 문수신앙을 전국 곳곳에 전파하였다. 통도사의 창건과 황룡사 구층탑의 조성을 통하여 안함이 제기한 불연국토사상을 현실화시켰다. 그리고 당나라의 복식과 문물 제도를 따르게 하였고 대국통이 되어 교단을 통일하였다.
귀족 출신으로서 국선 호세랑(好世郞)의 낭도로 있다가 안강의 적선촌으로 물러난 혜숙은 이십 여년 뒤 근처로 사냥을 나온 당시 국선 구참공(瞿公)의 잔인함과 불인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자신의 다리살을 베기까지 하였다. 그는 왕실이나 귀족들이 거처하는 성안의 큰 사원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던 당시의 승려들과 달리 시골 마을에 숨어살면서 불법을 교화하며 살았다.
귀족 천진공(天眞公)의 심부름 할멈(傭)의 아들이었던 혜공(惠空)은 어려서부터 신이하여 성인(聖人)으로 우대받았다. 출가한 뒤 조그만 절에 살면서 언제나 등에 삼태기()를 지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미치광이처럼 대취하여 교화함으로써 부개(負)화상이라 불렸다. 그는 포항 오어사에 머물며 찾아온 원효와 세미나를 벌이며 토론하였고 법력이 뛰어나 무수한 이적을 남겼다.
항상 장터거리에서 동발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을 외치며 교화하며 살았던 대안은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금강삼매경>의 ‘헝클어진 경(散經)’을 차례로 맞추어 줌으로써 신라에서 성립된 경전의 편집자로 널리 알려졌다.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던 원효(元曉) 역시 붓을 꺾어 버리고 속복을 입고 저자거리에 들어가 무애박을 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불법을 널리 알렸다. 가난뱅이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불교를 알게 하여 대중불교의 지평을 열었다.
무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 역시 불교를 숭상하여(崇佛) 나라를 위호(護國)하였다. 문무왕이 임종 직전에 이르러 ‘나 죽은 10일 뒤에는 곧 곳집 문(庫門) 밖 뜰에서 서국식(불교식)으로 화장할 것’을 명한 유조(遺詔)는 불교의 통치이념화와 서민대중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의 사방 평정과 정법(正法) 치국사상과 상통하고 있다. 또 서국식의 장례로 무상의 도리를 가르치는 불교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검소한 의식을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긴요하지 않은 과세와 불편한 율령격식의 수정과 폐지 명령은 불교 경설의 치화(治化) 인민 수호국가의 정신에 부합하고 있다.
왕이 서라벌의 성곽을 신축하려고 했을 때 ‘비록 초야의 모옥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만 행하면 복업이 장구할 것입니다. 하오나 만일 정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을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의상의 글을 보고 축성(築城)의 역사(役事)를 그만두었다. 이러한 왕의 모습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위에서 신라불교는 공인 100여 년 만에 민족불교의 터전을 닦았고, 원효와 의상과 같은 걸출한 사상가들 100여 명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그 에너지 위에서 비로소 삼국의 통일과 석불사 대불의 완성 및 불국사의 조성이 가능할 수 있었다.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상징물들이 이 시대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동경 흥륜사 금당 십성’의 배치도는 이러한 신라불교의 전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 은, 동, 철, 돌, 나무, 종이 등이 아니라 신라의 물과 흙으로 빚은 소상(塑像) 열 분은 모두 신라불교의 성취를 만들어낸 인물들로 모셔져 있다. 금붙이나 대리석이 아닌 흙과 물로 빚어진 이 소상들은 각기 중앙의 아미타불을 시위하고 있다.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의 소상은 동쪽 벽에 앉아 서방(庚方)을 향하고,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의 소상은 서쪽 벽에 앉아 동방(甲方)을 향하고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나 16나한을 모시지 않고 신라불교의 대표적 지성 10인을 모셨다는 사실은 불교의 주체적 이해와 민족불교를 향해 나아간 신라불교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 영 섭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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